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85화 (185/221)

185화 이혼이 주는 여파

고개를 들자 빅토르의 표정이 보였다.

“라스타 왕국으로 돌아가자. 로즈.”

슬프고 가슴이 아픈 얼굴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보게 된 빅토르의 모습이었다.

“제발 스스로를 더는 학대하지 마.”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서 루비로즈 가문은 권력, 부, 명예를 전부 얻었다.

라스타 왕국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가문은 왕실이 아니라 루비로즈 백작가문이었다.

솔직히 굳이 알펜 왕국까지 그 영향력을 넓힐 필요는 없었다.

왜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 되면서까지, 단교되었던 왕국 간의 교류를 다시 시작하면서까지 무엇을 더 얻으려고 했을까?

빅토르는 후회가 되었다.

벨로나 공작과의 결혼을 하겠다는 결정을 막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확신했으니까.

루비로즈 백작가문은 이미 명예를 드높였다.

그녀는 이미 이뤄 낸 목표에 허우적거리고 절벽으로 향하고 있었음을 빅토르는 몰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번뜩 멍해졌던 정신을 차렸다.

빅토르가 흘린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빅토르를 강하게 밀쳤다.

짝!

빅토르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녀의 손은 얼마나 힘껏 때렸는지 붉어져 있었다.

“그동안 그대와의 세월을 생각해서 이 무례를 불문에 붙이지. 당장 나가라.”

“주군, 이만 나가겠습니다.”

서슬 퍼런 페루제 공작부인의 명령에 빅토르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기사로 돌아갔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는 그가 나간 문을 한참 쳐다봤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에 시녀가 집무실을 환기시키고 청소하기 위해서 들어갔다.

시녀는 문을 열고 잠시 놀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책상에 있었으니까.

분위기로 보아서는 잠도 자지 않고 앉아 있었던 것만 같았다.

“공작부인, 인사드립니다.”

“라스타 왕국의 가신들에게 전해라. 10분 뒤에 회의할 것이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목소리는 뭔가 각오를 다진 듯한 결의가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결정을 내렸는데 감히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라스타 왕국의 가신들과 예정되지 않은 회의를 강행할 정도의 일은 일개 시녀가 알기에 너무 스케일이 컸다.

시녀는 다급하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되자 페루제 공작부인을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우아한 가구와 고급으로 보이는 집기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다른 방들과 다른 점은 한쪽 벽면은 하얗게 되어 있고 그 앞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벽 정면에 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환해라.”

“네.”

시녀가 환수 소환서를 꺼내서 환수를 불렀다.

부엉이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환수가 나타났다.

그 환수를 눈을 감고 있었다.

“연결해라.”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하자 부엉이가 눈을 떴다.

눈에서 빛이 나왔다.

하얀 벽면에 몇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메디치 백작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 벽면에 나타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수를 이용한 화상회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루비카 남작이 입을 열었다.

“어떤 일로 이리 급하게 저희를 부르셨는지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미 루비카 남작과 란델리노의 관계를 알았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그대들을 불러서 기분이 나빴나?”

“아닙니다. 오해를 거둬 주십시오.”

루비카 남작이 다급하게 말했다.

회의를 하는 모두가 알았다.

자신의 주인이 평소와 뭔가가 달랐다.

그들은 긴장했다.

어떤 큰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차가 든 찻잔을 입에 댔다가 뗐다.

“그대들이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서 불렀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벨로나 공작과 이혼하면 잃을 것이 무엇인지, 그 피해를 최소할 방법이다.”

“……?!”

페루제 공작부인 당사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이 커도 너무 컸다.

“각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맞습니다. 두 분이 이혼할 사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발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가신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알펜 왕국 내에서 라스타 왕국의 귀족들과 상단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라스타 왕국의 상단들은 알펜 왕국보다 품질이 좋은 물품들, 가성비가 좋은 물품들을 제공했다.

“각하께서 친히 알펜 왕국과 저희 왕국 간에 단교를 끝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서 많은 백성이 예전보다 풍족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꿔 주십시오.”

알펜 왕국의 백성들이 자국의 상단보다 그들을 찾는 것이다.

상단들은 투자를 늘리고 백성들을 더 고용했다.

바쁜 만큼 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자국의 좋은 물품들을 이용해 라스타 왕국의 귀족들은 알펜 왕국의 귀족들과 연을 만들었다.

라스타 왕국의 귀족들은 알펜 왕국의 귀족들과 달리 적극적인 상단 투자를 통해서 큰 이익을 얻었다.

상업은 귀족이 하기에 천박하다는 알펜 왕국의 사고와 달리 그들은 유연했던 것이다.

“각하, 이혼하게 된다면 알펜 왕국의 귀족에서 제명될 수 있습니다.”

“내가 제명이 될 이유가 없거늘.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리되면 왕국 간 교류를 시작할 당시에 맺은 협정에는 알펜 왕국의 귀족 자격을 박탈한 조건들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알펜의 국왕이 그 협정 내용을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벨로나 공작과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알펜 왕국의 국왕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누명이라도 씌어서 귀족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였다.

알펜 왕국의 법에 따르면 부부는 일심동체로 남편의 죄가 아내의 죄이고, 아내의 죄가 남편의 죄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죄를 묻는다는 것은 벨로나 공작에게 죄를 묻는 것과 같음이다.

그리 되면 친왕파의 거두이자 북부 최대 군사 세력인 벨로나 공작가문과 척을 지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은 벨로나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을 잡는 것이다.

국왕이 악법을 폐지하려고 할 때마다 나서서 막은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거짓 증거를 만들어서 각하를 옭죄려고 한다면 일이 복잡하게 됩니다.”

“각하께서 라스타 왕국에서 멀리 있다고 해도 그 영향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영향력을 더 키운다고 한들 방해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화상회의를 통해서 페루제 공작부인은 라스타 왕국 내에서 그 영향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왕국의 국사와 관련된 자료를 바로바로 받았고 소통도 제때 했기 때문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런 그들을 심드렁하게 봤다.

루비카 남작이 옅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란델리노 백작님은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회의장은 조용해졌다.

영상의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루비카 남작이 카엘족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란델리노는 후계자 후보가 될 자격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혼하게 되면 란델리노와 페루제 공작부인은 남남이 된다.

루비로즈 백작가문의 후계자가 될 기회를 잃는 것이다.

드디어 얻게 된 패를 이렇게 잃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비카 남작과 편을 먹은 귀족들이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아끼신다는 소문이 라스타 왕국에까지 들리옵니다.”

“그런 아드님을 포기하시다니요.”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보낸 자식을 외면하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이혼할 이유가 없는데 이혼하신다면 영식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그들의 말에 그녀의 조카를 지지하는 귀족들도 나불거렸다.

“란델리노 영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같이 지낸 세월이 길든 말든 핏줄이 아니지요.”

“법적인 모자 지간도 이혼하면 끝이지요.”

양측이 이혼을 반대했지만 란델리노에 관한 중요성은 달랐다.

그들이 격렬하게 말하는데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조용했다.

그제야 귀족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할 말은 다 끝낸 것인가?”

차갑고 짜증이 난 표정은 그녀가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나는 그대들이 나를 그리 생각하는 줄 몰랐어.”

“…….”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이 말을 올려봤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더 분노할 것이었다.

“이혼한다고 한들 내가 겨우 알펜 국왕의 함정 따위에 놀아날 사람으로 보이나?”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황망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국정을 장악하지 못한 알펜 국왕과 친왕파 따위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페루제 루비로즈가?”

“죄송합니다. 저희가 경솔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급급하여 잠시 페루제 공작부인이 누구인지 잊었다.

라스타 왕국에서 최대 30만의 군대를 운영할 수 있는 권력자였다.

동시에 라스타 국왕과 동등한 자리에 앉을 권리를 얻은 통치자였다.

왕국 내의 수많은 정책은 그녀의 손을 거쳤다.

혁명파라는 파벌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네, 편한 길로 가실 수 있는데 어려운 길을 가시겠다고 해서 흥분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한 왕국의 국왕이라고 할 수 있는 페루제 공작부인 앞에서 감히 그녀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녀가 당장 명령을 내린다면 다음날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몰랐다.

파랗게 얼굴이 질린 귀족들을 보며 그녀가 일어났다.

“3일 주지. 최대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강경한 그녀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들은 그녀가 결단을 내리면 번복할 수 없음을 잘았다.

회의를 마치고 부엉이 환수도 사라졌다.

그녀는 빅토르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그녀는 대답하고는 한참을 침묵했다.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눈이 찌푸렸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빅토르.”

“네, 말씀하십시오.”

괜스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손짓을 멈췄다.

“이곳을 정리하고 라스타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주군, 드디어 결심하셨군요.”

빅토르가 그 결정을 반기며 미소를 보였다.

그녀가 창밖을 봤다.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바로는 안 될 것이야. 교황 폐하를 설득해야 하고 여러 가지를 처리해야 하니까.”

“물론입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이룬 것이 많으니까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빅토르를 바라봤다.

“그대가 란델리노를 아들처럼 여기고 있음을 잘 알아.”

“아셨습니까?”

“그리 아들처럼 대하는데 모를 수 있나.”

말을 마치고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웠다.

“이혼하게 되면 란델리노도 데려갈 생각이야.”

“정말입니까?!”

핏줄도 아닌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다른 가문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거절했을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이혼하는 마당에 남의 가문 후계자를 뺏으려고 든다고 손가락질 당할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벨로나 공작가문은 상황이 달랐다.

만약 이 결정을 말한다면 벨로나 공작은 기뻐하며 받아들일 것이다.

그에게는 후계자로 삼고 싶은 아들이 있었으니까.

“루비로즈 가문에 입적하게 할 수는 없어도 그대의 아들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 성은 그대를 따를지라도 나는 그 아이를 아들로 대할 것이고 말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빅토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진짜로 이혼하게 되었을 경우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란델리노였다.

그녀가 없으면 란델리노의 자리는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를 단단히 지지해 주었기에 벨로나 공작가문의 유일한 적통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란델리노가 쌓은 인맥과 힘도 모두 녹아 버릴 것이다.

그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그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아들이었기에, 벨로나 공작가문의 이을 유일한 법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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