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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84화 (184/221)

184화 돈 후안의 결말

란델리노는 자유가 되었다.

자유만 얻을뿐 아니라 로빈의 위치도 흔들리게 했다.

레티시아 덕분에 은신할 수 있었던 아그리피나도 돌아왔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오자 그 앞에는 아그리피나가 서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네가 발 빠르게 움직여 준 덕분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그리피나는 주인의 칭찬에도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맞았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아그리피나도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를 배신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미 란델리노를 따르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을 배신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바빠질 것이니 각오 단단히 해.”

“네, 모두가 란델리노님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합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니까요.”

“그래. 어머니도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에도 나를 자유롭게 해주신 것이지.”

더 이상 어머니 몰래 라스타 왕국 측의 귀족들에게 접선 시도를 할 이유는 없었다.

대놓고 만나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카엘족과 로빈을 싫어하는 귀족들이 그에게 몰려들 것이다.

란델리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조카’를 몰아낼 유일한 대항마였으니까.

란델리노가 원하는 것이 착착 이뤄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훨훨 날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긴장이 풀려서 생긴 안일함이었다.

세상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 * *

신성모독죄로 감옥에 있는 돈 후안은 불안에 떨었다.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누군가가 감옥에 들어왔다.

그가 있는 감방 앞에 섰다.

“후작 각하, 오래는 못 계십니다.”

“알았다.”

간수와 간단한 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한손에 지팡이를 쥔 통통한 사내가 들어왔다.

살집 때문에서 순한 곰돌이처럼 보였으나 그 눈빛만큼은 맹수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

“못난 놈!”

후안 후작은 아들을 보자마자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넘어진 아들을 발로 마구잡이로 찼다.

“너 때문에 가문이 어떤 상황에 처한 줄 아느냐! 신성모독죄가 어떤 것인지 알고 그런 짓을 해?!”

“아,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이번에 구해 주시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돈 후안은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는 간절히 말했다.

“너는 매번 그런 식이었지!”

“아버지! 진짜입니다.”

“닥쳐! 매번 네가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믿은 내가 머저리였지!”

후안 후작은 분노에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눈앞에 있는 놈이 아들만 아니었다면 당장 죽여 버렸을 것이다.

“라보 공작가문과 동맹은 깨졌다.”

“잘 하셨습니다! 라보 공작이 저희를 외면하고는…….”

돈 후안은 자신의 편은 하나도 들지 않던 라보 공작을 떠올렸다.

이가 갈렸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면 이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퍽!

“윽!”

후안 후작이 지팡이로 아들의 다리를 강하게 때렸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여러 번 강하게 내리쳤다.

“네놈이 저지른 일은 라보 공작조차 편을 들 수 없는 일이었어!”

아들 놈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입을 열어서 후안 후작의 분노를 자극했다.

라보 공작이 돈 후안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후안 후작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괘씸했다.

슬쩍 발을 뺄지언정 조금이라도 죄가 경감될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

안면몰수하며 외면하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이 일로 라보 공작가문이 후안 후작가문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두 가문 간의 신뢰가 깨졌다.

“페루제 메디치 백작의 가신이 찾아왔다. 후안 후작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이야.”

“그러면 저는 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겠죠!”

돈 후안의 눈빛이 희망으로 물들었다.

가문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후안 후작은 이 상황에도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멍청이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너는 이 시간부로 후안 후작가문에서 제명이다. 평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 어떤 지원도 없을 것이야.”

“아,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또한 죗값으로 라스타 왕국의 신전에서 10년 간 무급 봉사를 하게 될 것이야.”

“아, 아버지,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제 진짜로 사고치지 않을게요.”

후안 후작은 그 신전이 절벽에 있어서 한 달에 한 번마다 운영하는 도르래가 아니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침묵을 하나의 수행으로 여기고 하루에 오직 10분만 말을 하는 것이 허용이 된다.

그것도 자기 방에서만 홀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채찍으로 맞았다.

후안 후작은 그 어떤 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들을 가문에서 제명한 시점에서 그는 돈 후안을 진짜로 버렸다.

“제가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가문은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후계자는 네 동생이 할 것이다.”

“아버지!”

“메디치 백작의 자비를 감사히 여기며 보내거라.”

그는 말을 끝내고 감방을 나왔다.

아들이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마치 그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후안 후작은 감옥을 나가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한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디치 백작에게 동맹을 위해 가신을 보내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라보 공작가문은 바로 근처에 적을 두게 되었다.

그것도 페루제 공작부인과 손을 잡은 적이었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밤마다 술을 마셨다.

뭔가를 고심하는 사람처럼 밤마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도 집무실에서 홀로 마시니 수군거림은 커졌다.

“도대체 무슨 결정을 내리려고 술까지 드시는 것일까?”

“그러게. 어떤 일을 얼마나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이지?”

고용인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의중에 자신들이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까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절로 두려움이 왔다.

그녀는 술이 담긴 잔을 들고는 창가에 기대서 밖을 보고 있었다.

똑, 똑, 똑!

“주군, 빅토르입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빅토르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피식하고 웃었다.

“어지간히 걱정이 되었나보군.”

“주군의 안위를 걱정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믿어야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을 잃은 후 본인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서 빅토르가 대표로 온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빅토르는 자신의 주군이 염려되어서 온 것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그가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섰다.

빅토르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을 주군으로 여겼고 그 거리를 멋대로 좁히지 않았다.

그 변치 않음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의 충성심은 믿지 않았으나 빅토르의 충성심은 믿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신데 이리도 술을 드십니까?”

“그냥 생각할 것이 많아.”

페루제 공작부인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도 감정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빅토르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건강을 해치실까 저어됩니다.”

“겨우 이 정도에 아플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녀가 한참을 밖만 바라봤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몽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뭔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당신의 거울입니다.”

“네?”

빅토르는 페루제가 침묵하다가 건넨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란델리노와의 격한 다툼을 몰랐으니까.

“란델리노가 나에게 한 말이야.”

“그분께서요?”

“자신을 추하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를 추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빛을 보면 과거를 돌이켜보는 듯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제대로 부정하지 못했어. 차마 아니라는 반박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

“란델리노님이 반항 한번 하신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놀라셔서 말하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빅토르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는 아들의 반항에 놀란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가문을 위해서 살았고 귀족답게 우아하게 살았다고 자부했어. 그런데 란델리노의 말에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주군…….”

“나는 귀족답게 살아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추하게 되었을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돌려서 빅토르를 마주봤다.

빅토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귀족은 우아하고 완벽해야 한다.

그녀는 귀족답게 살아왔다.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면서 자신의 격을 높이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추하다는 것은 그녀의 삶과 노력을 더럽히는 평가였다.

“내가 추해져 가는 동안에 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회한의 가득한 목소리로 조소했다.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아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고 알게 되었을 때도 인정하기 힘들었다.

빅토르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점점 잠잠해졌다.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표정이 굳더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즈.”

“뭐?”

페루제 공작부인이 빅토르의 말에 놀라서 잔을 떨어뜨렸다.

잔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에레보스가 보호해 줬기에 다행히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빅토르에게 불러 달라고 했던 그녀의 애칭이었다.

그가 불러 주기를 원했으나 불러 주지 않았던 애칭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빅토르와 마주섰다.

“로즈, 그만하자.”

페루제 공작부인은 살면서 이렇게 몸이 굳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몸이 굳어 버렸다.

빅토르가 그녀를 안은 것이었다.

처음이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렇게 안은 것도 말이다.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잡는 것을 빼면 그 어떤 신체적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 왜 지금에서야 일어나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네가 점점 변해 가는 것을 알았어.”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나는 네가 괜찮은 줄 알았어. 내가 변해도 행복할 줄 알았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었으니까.”

빅토르가 정말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마에서 빅토르의 눈물이 떨어졌다.

“네가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어.”

그녀는 너무 놀라서 차마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빅토르는 그녀가 언제나 그녀답게 살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만 그녀도 사람이다.

세월 앞에서 흔들리고 고뇌하며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알아줘야 했다.

모두가 그것을 외면할 때, 빅토르만은 그것을 알아주고 다독여 줘야 했다.

모두에게 편승하여 그녀는 언제나 완벽할 것이라는 아둔한 생각에 빠지지 말아야 했음이다.

“이제라도 말할게. 그만 돌아가자.”

“뭐?”

그녀가 이번에는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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