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처참한 패배의 원인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전했다.
“나는 충성스러운 패배자보다 간사한 승자를 원한다!”
너무 소리를 질렀는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헉헉거렸다.
평소의 우아한 페루제 공작부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력이 빠졌는지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때를 맞춰서 레티시아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부인, 진정하세요. 건강을 해치실까 걱정됩니다.”
“겨우 이런 일에 흔들렸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온도가 딱 적당하게 되었다.
기분도 나쁜데 차 맛까지 싫었으면 더 짜증이 났을 것이다.
“로빈.”
“네, 주군.”
주군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귀족 따위의 기사들에게 졌다.
기사라고 칭하지만 용병일 것이 분명한 것들에게 말이다.
비록 신입 기사들이라고 해도 <다섯 뱀>에 소속이 된 이상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다.
“요즘 네가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송합니다.”
“단장의 책무로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귀에 들렸다.
로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위험한 징조였다.
‘로빈의 행보’를 거슬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단장의 업무만 제대로 한다면 페루제 공작부인은 로빈이 뒤에서 어떤 일을 꾸미는지에 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뒤에서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겠지?”
“네.”
로빈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간에 그녀가 반응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 모든 행동은 로빈의 아들이자 그녀의 조카인 알렉산드로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후계자로 생각해 놓았던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안위를 일부 포기했다.
아이의 권력 승계를 편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 조금의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가령 로빈이 비밀리에 사병을 키우고 있는 것이 있다.
“<다섯 뱀>을 이렇게 약화하는 것도 그 의도와 맞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글쎄, 참담한 패배를 눈앞에서 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
조카를 위해 로빈의 반역에 가까운 행위를 묵인했다.
지배자에게는 비상의 수는 하나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목을 찌를 칼이 될 위협이 있더라도 말이다.
루비로즈 백작 가문의 미래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일로 생각을 바꿨다.
자기 사람을 만드느라 페루제의 기사단을 소홀히 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다섯 뱀>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검이다.
그 검을 얕고 약하게 만드는 저의야 말로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뱀>이 최고라는 확신 속에서 로빈의 행동을 모른 척 넘긴 것이었으니까.
“그대가 양성하고 있는 이들은 이번 달 안에 정규군에 편입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로빈의 안색이 흙처럼 변했다.
설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한 모양이다.
동시에 지금 상황이 아주 나쁘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동안 반역으로 해석될 일을 묵인해 왔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것은 알렉산드로를 향한 지지를 거둘 여지를 심어 주는 것이었다.
“로빈, 지금 이 시간부로 <다섯 뱀> 단장 자리는 공석으로 둘 것이다.”
노라가 한발자국 앞으로 갔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과한 처우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눈치 챈 로빈이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눈짓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단장 자리에는 전 단장과 동등한 실력과 공적이 있는 인물이어야겠지.”
“주군! 벌이라면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 말에 로빈이 고개를 들었다.
단장의 자리는 반드시 지켜야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불신을 가진 시점에 이 자리마저 잃으면 위험했다.
“저는 제 책무를 다 하지 못한 것을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빈과 동등한 실력과 공적이 있는 인물이라면 소드마스터였다.
라스타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공식적으로 3명이 있다.
그 3명 중 하나는 로빈이었다.
남은 2명 중 하나는 로빈에게 호의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문제는 비공식적인 소드마스터인 노엘이었다.
만약 노엘을 <다섯 뱀>의 단장으로 세우게 된다면 그의 아들이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멀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제발 저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다섯 뱀>은 루비로즈 백작 가문의 기사단이자 메디치 백작가문의 기사단.
페루제 공작부인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훗날 이 기사단의 최고명령권자가 된다는 의미다.
그런 기사단의 단장에 후계자를 적대하는 인물을 앉힌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망해데쓰 남작을 바라봤다.
몸이 굳어 버린 그는 뱀 앞의 생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망해데쓰 남작, 많이 기다렸지?”
“아, 아닙니다!”
“레티시아, 사과하렴.”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망해데쓰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사과였다.
여기서 사과를 받았다가는 귀족 사교계에서 매장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치가 보여서 그에게 말이나 걸겠는가!
자신도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숨을 쉬지 못할 것이다.
“아니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을 까닥거리자 레티시아가 일어나서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망해데쓰 남작님, 제가 제 위치를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아, 아니네! 내가 어린 영애를 상대로 점잖지 못하게 굴었어! 내가 미안하네.”
망해데쓰 남작이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수습을 잘하지 못하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도 쉬기 어려운데 페루제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망해데쓰 남작, 내가 그대에게 주기로 한 금액은 기사들에게 자택으로 호송하라고 말해 놓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남작, 나는 같은 말을 두 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알, 알겠습니다.”
“가 봐.”
망해데쓰 남작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
“네! 네!”
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던 관리자가 다급하게 곁에 다가왔다.
굽신거리는 태도는 기본이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앞으로는 관리 잘하게.”
“불쾌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관리자는 손해를 봤다.
한껏 술도 시키고 음식도 시키고 내기도 걸면서 돈을 써야 하는데 손님들이 다 달아나 버렸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녀에게 손해를 보상하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불쾌함으로 기분이 더러움을 감추지 않는 권력자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계단을 내려갔다.
로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지나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뒤를 레티시아가 따랐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이 마차 안에서 레티시아에게 말했다.
“레티시아, 나 때문에 굴욕을 당하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서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아니야. 네가 아니었다면 기사단의 수준이 그따위인 것을 몰랐을 것이야.”
페루제 공작부인은 레티시아를 저택에 데려다주고 저택에 돌아왔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명령했다.
“더는 란델리노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전해라.”
“네.”
이번 일로 란델리노는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란델리노를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다.
로빈으로 인해서 자신의 조카인 ‘알렉산드로’가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로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로 란델리노를 둔 것이었다.
“안전을 위해서 외부 활동은 자제하라고 전하고.”
“네.”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다른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음에도 그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루비로즈 가문을 지킬 <다섯 뱀> 기사단의 약체화는 가문을 위협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에게는 의혹이 생겼다.
로빈은 루비로즈 가문보다 카엘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로빈의 아들인 알렉산드로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로빈에게 카엘족을 지키라고 배우며 컸다면?
이 작은 의심으로 인해서 로빈과 알렉산드로의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다.
“대비는 하는 것이 좋겠지.”
그녀는 방에 들어와서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종이를 꺼내서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펜을 내려놓고 페루제 공작부인이 홀로 있는 공간에서 한숨을 쉬었다.
* * *
레티시아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영애, 옷을 건네주시지요.”
“그래. 옷만 정리하고 이만 나가 봐.”
“네.”
시녀가 벗은 옷을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레티시아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너무 힘들다.”
정말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은 일이었다.
스스로 유도했다고 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누군가를 깔아뭉개는 것이 좋을 리 없었으니까.
레티시아는 잠시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편지를 써야겠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손을 멈췄다.
펜을 내려놓고 홀로 있는 방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서신을 보내라고 말해야지.”
마음 같아서는 만나고 싶었으나, 보는 눈들이 있을 것이기에 위험하다.
서신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 서신은 이번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아저씨께.
아저씨, 바쁘신 와중에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카를로스 아저씨와 잭, 론, 샨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압도적으로 대결을 주도할 수 없었을 것이에요.
아저씨들 덕분에 제 오랜 친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직접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말하도록 할게요.
추가로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도 사 드릴게요.
다음에 만나면 어떤 모험을 하셨는지 자세히 알려 주세요.
용병왕 아저씨와 다른 아저씨들의 모험담을 좋아하는 레티시아 올림.
추신— 다른 아저씨들에게도 제가 정말 감사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망해데쓰 남작 측에 있던 기사들은 바로 용병왕과 그 최측근들이었다.
많은 인맥을 가진 레티시아는 왕국 최강의 용병인 용병왕 카를로스와도 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망해데쓰 남작의 진짜 용병들을 기절시키고 대신 대결에 참여하여 대결을 주도했다.
그녀는 망해데쓰 남작이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망해데쓰 남작이 나름대로 실력이 있다는 용병들을 돌아가면서 고용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섯 뱀> 기사단의 수준이 높더라도 대결에 나온 기사들은 신입 기사. 신입 기사가 산전수전 다 경험한 그분들을 이길 리가 없지.”
다시 말해서 아그리피나가 도움을 요청한 날의 다음날, 레티시아가 만나러 간 사람들이 바로 용병왕과 그 측근들이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