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증명할 수 없는 알량한 감정
노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다가 못해서 시체처럼 변하기 직전이었다.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라 압도적인 패배를 당할 줄이야!
첫번째 대결을 제외하고 연속으로 졌다.
네번째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노라는 눈을 질끔 감았다.
<다섯 뱀>의 기사들을 이긴 자들은 검을 잡는 것부터, 상대에게 달려가는 것까지 그 기량이 느껴졌다.
그 기세가 남달랐다.
저들은 일개 몰락 귀족이 고용할 용병이 아니었다.
노라는 그 사실을 말해야 했다.
“주군, 그것이…….”
“입 다물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노라가 뭐라고 말하든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굳은 얼굴을 풀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레티시아에게 말했다.
“레티시아, 미안하구나. 내가 나의 기사들 실력을 잘못 알았어.”
“아니에요. 저 때문에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 죄송한 걸요.”
“아니야. 나 때문에 괜한 사과를 하게 되었는데 어찌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어. 그치?”
노라를 바라보며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했다.
노라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레티시아 영애, 아랫사람의 부족함은 저의 부족함.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망해데쓰 남작이 얄미운 얼굴을 지었다.
“아이고! 지인의 기사들까지 빌렸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지다니 안쓰럽습니다.”
“…….”
노라는 저 입을 한 대 쳐서 다물게 하고 싶었다.
레티시아는 어차피 페루제 공작부인이 나설 것이기에 가만히 침묵했다.
“그러게 말이야. 내 기사들이 부족하여 이 아이가 사과를 하게 생겼어.”
“마지막 대결까지 보고 사과를 받도록 하지요.”
“그러지. 물론 그 전에 내 기사들에게 말을 좀 하고 난 뒤에…….”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드리지요.”
망해데쓰 남작은 자신의 콧수염을 자랑스럽게 만졌다.
승리감에 도취된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사람이 본인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또 졌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망신스럽게 질 수 있군.”
마지막 대결도 다른 대결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기 금액을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으니까.”
“행동이 빨라서 좋습니다.”
망해데쓰 남작은 만족스러웠다.
저 건방진 어린 영애의 콧대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내기로 얻게 될 엄청난 이익이 상상만 해도 그의 심금을 울렸다.
한편, 이곳의 정문에서 경비병들은 난감한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당장 열어라.”
“그, 그것이…….”
“죽고 싶은가?”
“아닙니다.”
살기가 가득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온 것이 아닌가.
그들은 진짜 기사였다.
기사인 척하는 용병이 아니라 전장에서 살육을 하는 기사인 것이다.
당장이라도 비켜주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경비병들은 이곳의 관리자에게 보고도 못하고 바로 정문을 열었다.
기사들은 대련장으로 그들은 빠르게 걸었다.
노라를 따라온 선임기사가 그들을 안내했다.
이곳의 관리자는 힐끔거리며 페루제 공작부인을 관찰했다.
검은 가면을 쓴 귀부인의 기사들이 너무 허접하게 졌다.
대단한 인물처럼 느낀 것이 착각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 망해데쓰 남작의 기사들이 평소보다 월등하게 잘 싸웠다.
아니 확실하다.
평소에 데리고 있던 기사들이 아니었다.
승리를 거머쥔 4명의 기사들은 말이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관리자는 내기를 중재한 수수료를 뜯어 내면 되니 손해볼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저편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야?! 저들은 뭐지?!”
“꺄아악!”
급작스러운 기사들의 등장에 대련장은 엉망이 되었다.
정복에 검까지 완벽한 기사들였다.
마치 열병식을 하는 것처럼 그들이 페루제 앞에 섰다.
노라도 계단에서 내려와서 그들과 함께했다.
“주군, 부름을 받들고 왔습니다.”
“그래, 왔니?”
그녀의 시선은 로빈이 아니라 자신의 손톱에 향해 있었다.
그곳에 있던 귀족 손님들은 손을 떨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이 페루제 공작부인인 것을 몰랐던 귀족들도 모두 알게 되었다.
“메디치 백작가문!”
“페루제 공작부인이라고요?!”
기사들이 들고 있는 가문의 깃발은 메디치 백작가문의 상징이었다.
장미와 뱀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공작부인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정체를 함구시켰던 귀족들도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일어났다.
“그대들은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을까?”
“네?”
“내가 망해데쓰 남작과 해야 할 일이 있어여 말이야.”
그녀가 손톱을 보면서 말했다.
그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였다.
그럴 만한 귀족들도 없었고 말이다.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이제 집으로 귀가해. 늦었잖아.”
“네? 네!”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눈빛의 서늘함이 몸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귀족들은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저, 저도 이만.”
“아니야. 우리 사이에는 정산할 것이 있잖아. 그대는 남아야지.”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게.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지키는 것이 도리지.”
망해데쓰 남작은 망했음을 직감하고 튀려고 했으나 잡히고 말았다.
그 악명이 높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상대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감히 그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들과 자신의 용병들이 싸운 것이다.
호위기사로 위장한 용병들과 말이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장난으로 한 내기가 아닙니까?”
“남작.”
“네.”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웃었다.
입가는 웃고 있었다.
눈가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차가웠다.
“내가 괜찮지 않아. 그러니까 기다려.”
“네.”
망해데쓰 남작은 돈내기를 한 것을 후회했다.
돈을 잃은 것이 억울해서 그런가 싶어서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굳이 주겠다고 기다리라고 한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 것인가?
졌다는 사실이 그리 분했던 것인가?
왜 하필 용병들은 오늘 완전히 잘해서 자신을 난처하게 한단 말인가!
망해데쓰 남작의 머리는 혼돈 그 자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훈련장은 정적만 남게 되었다.
기시단에게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피부를 저릿하게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가면을 벗었다.
아름다운 눈, 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피부와 피처럼 붉은 입술이 완전히 드러났다.
“레티시아, 너도 가면을 벗거라.”
“네, 알겠습니다.”
레티시아는 명령에 따라서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나 때문에 괜한 사과를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제가 괜히 신입 기사 분들이 대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바람에…….”
“네 탓이 아니다.”
레티시아가 자신이 <다섯 뱀>의 수준을 과대평가했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하자,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언짢아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단이 지금은 그녀에게 수치심을 줬다.
“로빈 단장.”
“네, 주군!”
로빈이 기사들 맨 앞에 섰다.
레티시아는 페루제 공작부인 옆에서 조용히 음료를 마셨다.
“여기에 있는 망해데쓰 남작의 기사들과 나의 기사들이 대련을 했다. 1:1이었지.”
“네, 들었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턱을 한쪽 손으로 괴고는 나른하게 물었다.
“그러면 아주 구질구질하게 졌다는 것도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망해데쓰 남작가문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나도 이 일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가문이야.”
로빈 단장이 등에 난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정말 최악이었다.
헬리오 왕국 최고라는 헬리오 대공의 기사들이나, 알펜 왕국 최고라는 벨로나 공작의 기사들과의 대련이었어도 패배했다면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정말로 무명 중 무명이었다.
주군의 분노를 불타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로빈, 자네만 대답하지 말고 다른 놈들도 다 같이 말해 봐.”
그녀가 우아함을 무장한 상태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다섯 뱀> 기사단은 수많은 전장을 다녔지?”
“맞습니다!”
기사들이 동시에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대련장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영지도 없는 귀족의 기사들이 <다섯 뱀>보다 실전 경험이 풍부할까?”
“아닙니다!”
“저들이 고용된 용병이라고 할지라도 <다섯 뱀>보다 많이 사람을 죽여 봤을까?”
“아닙니다!”
“그런데 졌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던 잔을 로빈 곁으로 던져 버렸다.
“그것도 그냥 지지 않았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졌어!”
“제 부족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로빈이 참회하듯이 말하며 용서를 구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기사들이 주군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을 했다.
“용서? 이게 용서와 관련이 있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지.”
로빈이 주먹을 쥐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신입기사들이었다고 해도 이름도 없는 귀족 나부랭이의 용병들에게 질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나중에 확인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로빈의 복잡한 머리와 별개로 페루제 공작부인은 소리쳤다.
좌우를 적당하게 걸으면서 말이다.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언제나 최고라고, 최강이라고 말하던 기사단이 이렇게 황망한 패배를 당하다니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과한 것을 원한 것인가?”
그녀가 잠시 혼잣말하는 것처럼 굴고는 다시 기사들에게 향해서 물었다.
“내가 너희에게 충성심을 원했느냐?”
“아닙니다!”
그 대답에 그들을 보던 관리자, 망해데쓰 남작 등의 사람들이 경악했다.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심이다.
충성하지 않는 기사는 배신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기사들에게 충성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아랫사람의 충성심을 믿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인가?
“그래! 충성심 그딴 것을 믿지 않아! 나는 증명할 수 없는 알량한 감정에 기대는 나약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억지로 충성심을 강요하지 않았다.
말로 하는 충성심도, 진심으로 하는 충성심도 증명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충성심이란 상황과 자신의 처우에 따라 바뀌는 ‘주관적인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했을까? 나는 너희가 부를 원하면 부를 줬다. 아니냐?”
“맞습니다!”
“나는 너희가 힘을 원하면 힘을 줬다. 아니냐?”
“맞습니다!”
“나는 너희가 복수를 원하면 복수를 해줬다. 아니냐?”
“맞습니다!”
“나는 너희가 원하는 욕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줬다.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부족하여 이딴 놈의 기사들에게 지는 것인데?!”
거의 절규와 같은 물음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질책은 엄중했고 무서웠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 하나가 무엇이냐?”
“승리입니다!”
기사들의 대답이 주변을 울렸다.
곧 정적만이 남았다.
바람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줬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의 기사들에게 신념, 신의 그런 거창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있어도 패배한다면 패배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