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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81화 (181/221)

181화 자만심

망해데쓰 남작이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거렸다.

“차라리 기사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정도로 억울하네요.”

“기사재판?! 그거 좋지!”

망해데쓰 남작은 자신이 기사들을 통해서 하는 대결 내기가 생각났다.

그곳에서 승률이 쏠쏠하여 돈 버는 재미를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저 어린 영애에게 제대로 된 기사가 없으리라고 여겼다.

정말 대단한 가문 출신이라면 호위기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레티시아에게 다가가기 전에 밖에 있는 마차를 슬쩍 봤다.

그녀가 탄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에는 가문의 상징이 있기는 했으나, 어느 가문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이었다.

아마 어중간한 귀족 가문 출신에 지나지 않으리라.

아니면 상인 집안의 딸이라던가.

“저랑 직접 1:1로 싸우시겠다는 건가요?”

“어찌 영애랑 내가 싸우겠나? 당연히 각자의 기사들을 데리고 싸우는 것이지.”

“저는 기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용병이나 구해 오게.”

“지인의 사람도 괜찮은 것이지요?”

“물론이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느라 레티시아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찰나였으나 그녀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해 주세요.”

“빨리 결정해서 좋군.”

“제가 이기면 사과해 주셔야 해요.”

“반대로 내가 이기면 그대가 나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야.”

망해데쓰 남작의 심기를 자꾸 건드린 것은 레티시아였다.

그렇지만 조사를 해봤자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보석가게 상인과 점원은 레티시아는 가련한 피해자로 망해데쓰 남작은 어린 영애에게 시비를 건 불한당으로 잘 꾸며줄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니까.

레티시아가 계획대로 되었다.

* * *

<노란뱀>의 단장인 노라를 이용한 것도 말이다.

‘젠장,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지?’

노라는 생각도 못한 상황에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녀도 이름도 없는 귀족 따위의 기사들에게 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갑옷을 입고 짧은 노란머리를 한 그녀는 근육을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남자들도 엄지를 척하고 들 멋있는 근육질의 몸을 지녔다.

그녀가 남성처럼 근육을 키울 수 있는 체질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노라는 근육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신념을 지녔다.

그 신년에 맞게 힘도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오러를 쓰지 않은 순수한 힘으로 평가하자면 <다섯뱀> 기사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기사단 내에서 한 팔씨름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전력도 있었다.

몇 명은 호승심에 팔뼈가 부러져서 더는 팔씨름 대회는 하지 않았다.

“근육질 괴물이 지나간다.”

“야! 괜히 놀렸다가 뼈 부러지지 말고 피해!”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못한 그녀는 배척을 당했다.

매일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 운동하는 그녀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녀의 주먹에 맞으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딸아, 그만 그 쇠뭉둥이들을 치우지 않으렴?”

“제발 부탁이다. 이 부모의 평생소원이야.”

“남자고 여자고 네가 무서워서 곁에도 오지 않잖니?”

부모조차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근육을 키우기에 그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후회는 없었으나 외로웠다.

아무도 노라를 이해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그녀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로빈 단장이었다.

여러 인재를 모으던 페루제 공작부인의 명령에 따라 로빈도 여러 마을을 방문하고 있었다.

“멋있는 근육이로군.”

“안목이 뛰어나네요. 이 근육들은 제 자부심입니다.”

“혼자 이렇게까지 근육을 만들다니 감탄이 나와. 자부심이 될 만해.”

모두가 조롱하던 근육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원래 자신을 인정해 주는 주군이 가장 좋은 주군이 아니겠는가.

“나와 함께 더 좋은 근육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전문가들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말이야.”

“좋습니다!”

노라는 그때에 로빈 단장을 따라간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했다.

백 번을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노라는 로빈 단장을 따라갈 것이다.

<노란뱀>은 단장인 노라의 영향인지 부하들도 근육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단장님, 오늘은 근육이 불끈불끈하십니다.”

“너도 어제 좀 쇠질 좀 했나봐? 티가 나네.”

“역시 단장님은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다섯뱀> 단장님 중에서 노라 단장님이 제일 섬세하시다니까요.”

<다섯뱀> 기사단 중에서 섬세함을 버렸다고 소문이 난 기사단이 <노란뱀>이었다.

정작 <노란뱀>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섬세하다고 자신했다.

“다른 기사단 놈들은 그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요.”

“걔네가 좀 둔하지.”

그들에게 섬세함이란 근육질의 변화를 밀리미터까지 파악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그 외의 것은 섬세하든 말든 간에 상관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근육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이따가 닭가슴살을 갈아서 넣은 우유를 마시며 설명해 주지.”

“알겠습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오늘은 어떤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요.”

“음료는 닭가슴살 우유죠!”

자신의 근육 사랑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기사들로 인해 그녀는 더는 외롭지 않았다.

게다가 더 체계적으로 근육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노라에게 주군은 로빈 단장이었다.

노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아무리 단순하고 직설적이라고 해도 엄연히 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무력만 있다고 단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병사를 지휘하고 통솔할 머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방문부터 뭔가 이상했다.

뜬금없이 훈련장에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받았으니까.

계획된 일정도 아니었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군, 오셨습니까? 레티시아 영애 오랜만입니다.”

“그래.”

“노라 단장님, 오랜만이에요.”

노라는 레티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저 다정하고 선량한 미소로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고 해야 할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도권이 상대에게 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근육이라고는 볼 수 없는 영애에게 지는 기분이 들어서 언짢았다.

무엇보다도 근육이 없으면서도 아름답다고 여긴 영애는 레티시아 영애가 처음이었다.

노라는 그것이 ‘지적인 미’로 인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노라 단장, 기사들은 잘 훈련을 받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그녀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노라 자신이 생각해도 <다섯뱀> 기사단은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특히 노라 자신이 단장으로 있는 <노란뱀>이 최고였다.

신입조차 신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레티시아에게 기사들을 다섯 정도 빌려줘야 하니까 데려와 봐.”

“어떤 일로 데려가는 것인지요?”

노라는 떨떠름한 마음을 감추며 물었다.

주군도 아니고 주군의 가족도 아닌 생판 남을 위해서 부하들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주군의 명령이니까 복종해야 하지만 말이다.

“어떤 귀족분의 기사들과 대결을 하기로 했어요. 1:1로요.”

“상대가 어떤 귀족인지 알 수 있습니까?”

어떤 귀족 가문의 기사인지에 따라 데려갈 기사들을 정할 수 있었다.

각 가문마다 기사들의 성향이 달랐으니까.

“망해데쓰 남작님의 기사들과 하기로 했어요.”

“망해데쓰 남작이요?”

망해데쓰 남작가문.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가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귀족 가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제가 알펜 왕국의 주요 귀족 명단을 아직 다 외우지 못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영지도 없는 귀족이시고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걸요.”

라스타 왕국 최강의 기사단이 이름도 모르는 쓰레기의 기사들과 대결을 해야 하다니!

굴욕적이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기사단 정도면 싸울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그딴 놈이 상대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 굴욕적인 일을 벌이게 만든 레티시아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대결할 기사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제가 선택해도 될까요?”

“네?”

“공작부인의 기사단이라면 누구를 선택해도 승리할 수 있지 않겠어요?”

노라는 개소리에 당혹스러웠다.

<다섯뱀>이 최고인 것은 각자의 무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방심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하나하나 적에 관해서 파악하고 승리를 위해 준비하고 움직였으니까.

그리고 상대가 하찮기에 지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었다.

차라리 정말로 승리를 확정할 만한 이들을 보내는 것이 나았다.

그 노력을 단지 ‘개개인의 실력’으로 치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

“그러면 제가 골라도 될까요?”

“그렇게 하렴. <다섯뱀>은 나의 자부심. 그런 하찮은 놈들에게 패배할 리가 없으니까.”

노라는 한숨을 쉬었다.

로빈 단장에게 말해야 하나?

하필 로빈 단장이 없을 때에 주군이 올 줄은 몰랐다.

레티시아가 노리고 온 것임을 당시에는 눈치 채지 못했다.

“음…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분들로 해도 되나요?”

“신입 기사들을 말이냐?”

“네. 다른 분들은 기존의 업무가 있으니까 방해가 될 것 같고 신입 기사들은 기사단에 적응하는 단계이니까 잠시 빠져도 될 것 같아서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녀의 말에 좋아하며 말했다.

“네가 생각이 깊구나. 그래 다른 이들은 각자의 책무가 있으니 갑자기 빠지기 좀 그렇지.”

“주군, 괜찮습니다.”

노라가 자신이 지정한 기사들을 보내려고 했다.

그것은 레티시아의 뜻대로 하게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묘하게 주도권을 가져가는 모습이 싫었다.

슬프게도 그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언짢게 만들었다.

“신입 기사들이 가면 안 될 이유가 있느냐?”

“공작부인, 설마 자신이 없어서 그러시겠어요?”.

레티시아의 말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순간적으로 불쾌해했다.

자신의 기사단은 누구라도 최고여야 했으니까.

설령 신입 기사라고 할지라도 <다섯뱀> 소속이 된 순간부터는 최고여야 한다.

그녀는 그리 생각했다.

“<다섯뱀> 기사단의 실력은 유명하잖아요. 신입 기사조차 뛰어나기로요.”

그 마음을 다시 인지시키듯이 레티시아가 입을 열었다.

노라는 저 영애의 주둥아리를 한 대 치고 싶어서 주먹을 쥐었다.

저런 입만 산 영애는 주먹 한 방이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줄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네 말이 맞지. 노라 단장은 오늘밤에 데려갈 기사들에게 미리 말해 두게.”

“알겠습니다.”

때리고 싶은 것은 때리고 싶은 것이었으나 그것과 별개로 노라는 확신했다.

바로 <다섯뱀> 기사단의 승리였다.

망해데쓰 남작인가 하는 놈은 하찮은 몰락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기껏 고용해 봤자 용병나부랭이일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런 용병 따위에게 <다섯뱀>의 기사들이 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수도 밖으로 나간 로빈 단장에게 따로 이 일에 관해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냥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큰 사단을 만들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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