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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9화 (179/221)

179화 승리를 확신한 내기

페루제 공작부인과 레티시아는 수도 외곽의 어느 저택에 갔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망해데쓰 남작님과 대결을 할 상대라고 하면 알까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레티시아가 말하자 경비병이 혀를 찼다.

“아이구! 하필 망해데쓰 남작님의 기사들과 싸우다니 운이 나쁩니다.”

“실력이 좋나 보지요?”

“이곳에서 기사 대결을 하는 귀족 중에서 승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것만 기대가 되네요. 저도 제가 아는 최고의 기사단에서 기사님들을 모셔왔거든요.”

경비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인이 기사라고 말을 했지만 그래 봤자 용병이었다.

“여기 기사들을 대결에 보내지 않아도 즐기려고 오는 ‘진짜’ 귀족들은 많으니 조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유념할게요”

경비병이 말하는 ‘진짜’ 귀족은 영지와 군대를 제대로 지닌 귀족임을 레티시아는 알았다.

어린 영애를 걱정해 주는 호의가 고마웠다.

레티시아는 좋게 경비병과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

처음 방문이니 확인할 것도 많았을 것이며 걱정이 되었을 것이니까.

“선을 넘지 말게.”

경비병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돋는 듯한 착각도 함께였다.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여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네 역할은 여기를 지키는 것이지 같잖은 조언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흐물흐물하면서 서 있던 경비병이 경직된 차렷 자세를 하며 대답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자기 본분도 모르고 나대는 것들은 싫었다.

“얼마나 수준이 낮은 곳인지 경비병만 봐도 알겠구나.”

“오늘 별로이면 다시는 오지 않으면 그뿐이죠.”

“그렇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까 경비병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

‘타나토스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군.’

서로 즐기러온 처지에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즐기지 못하던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마차가 멈추고 그들의 발이 땅에 닿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상징하는 검은 머리카락이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타나토스가 자신의 힘을 머리카락에 넣어서 색을 바꾼 것이다.

레티시아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성물에 그런 기능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기능이지.”

지금 상황에서 뻔뻔한 거짓말은 필수였다.

악마의 사역마라고 일컬어지는 어둠의 정령에 관해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 * *

그곳의 시종은 그들은 어떤 공터로 안내했다.

귀족들은 대련장 밖에 자리를 치고 앉아서 여유롭게 술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컨셉인 듯싶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저 상석은 뭐지?”

마치 왕이 앉는 자리처럼 계단 위에 있는 자리들이 있었다.

“상위권 기사들이 있는 귀족 분들이나 돈을 많이 내주신 분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시종의 말은 너희는 대결 기사를 내보내기 위해서 온 것이니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리고는 시종에게 던졌다.

“당장 이 반지를 담당자에게 보여라. 그리고 그에 맞는 자리를 주라고 해.”

너무 당당하여 시종은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관리자에게 갔다.

곧 관리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후다닥 달려왔다.

실눈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는 삐질삐질 나오는 땀을 애써 무시했다.

“저희 쪽에서 자리를 잘못 안내한 듯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그는 도대체 이 여성이 누군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시종에게 던져 준 반지 하나만으로 딱 상석에 앉기 적당했다.

그것도 상석 자리에서 가장 비싼 중앙자리를 말이다.

관리자는 순간적으로 눈이 크게 떠졌다.

동공이 짧지만 엄청나게 흔들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다른 반지 때문이었다.

‘저거 가짜겠지? 진짜일 리 없겠지?’

반지에 있는 보석은 마나 핑크다이아몬드로 주변 마나의 상태에 따라 다이아몬드의 핑크색 농도가 달라졌다.

매일 변화하는 마나 다이아몬드는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귀했다.

산전수전 다 경험하고 뒷세계와도 연이 좀 있는 담당자조차 본 적이 없는 보석이었다.

부자라고 소문이 난 귀족들도 하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정도 거물이 이곳에 왔다면 다른 귀족들이 알아서 기었을 것인데 그런 모습도 없지 않은가.

‘그래 가짜야. 마나에 따라 색이 변해야 하는데 그대로잖아.’

그는 마나 핑크다이아몬드를 가짜라고 여겼다.

성물이 페루제 공작부인 주변의 마나 농도를 맞춰 주고 있어서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여기에 악명이 높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있다는 것도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딱 여기 상석 가장자리에 맞는 가격의 반지와 마나 핑크다이아몬드라니 너무 수준 차이가 크잖아.’

생각을 마친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허세를 좋아하는 졸부 부인이라고 판단했다.

그녀의 우아함과 카리스마는 졸부 부인이 가질 수 없는 품격임에도 말이다.

그들은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배불뚝이에다가 잘 관리된 콧수염을 가진 중년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나에게 건방을 떨었던 북부 촌뜨기가 아닌가?”

“아직도 무례하시군요. 사과할 준비는 하셨나요?”

망해데쓰 남작의 도발에 레티시아가 응수했다.

“사과는 그대가 준비를 해야지.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가?”

“저에게 기사를 흔쾌히 빌려주신 분이랍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망해데쓰 남작을 힐끔쳐보다고는 다시 대련장에 시선을 뒀다.

수준도 낮은 놈이니 그 휘하의 용병의 수준도 알 만했다.

속으로 생각만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귀부인에게 빌린 기사라니 보지 않아도 그 수준을 알 만하군.”

망해데쓰 남작의 주둥아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자신’이 선택한 기사들을 모욕한 것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를 씹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판돈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저야 손해 볼 것이 없지만 부인의 남편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망해데쓰 남작이 약을 올리는 말투로 비웃었다.

기껏해야 용병 나부랭이를 끌고 온 것에 지나지 않고, 그들을 고용한 자금은 남편의 돈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왜 그 사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단은 벨로나 공작가문의 기사단이 아니라 메디치 백작가문의 기사단이었다.

그녀를 주군으로 삼는 기사들이니 벨로나 공작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망해데쓰 남작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망해데쓰 남작이 입가를 실룩거렸다.

마음이 들지 않는 태도였다.

도도함을 넘어서 오만한 여인의 콧대를 누르고 싶었다.

“나중에 물러달라고 애원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야 좋지.”

그들은 내기 금액을 합의하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망해데쓰 남작은 처음에 그 금액을 보고 움찔했다.

저 여인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써놓은 금액은 망해데쓰 남작의 집안 기둥 하나를 뽑을 금액이었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의 기사들이 승률이 상위권이라고 해도 패배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혹시나 지기라도 한다면 집안의 가세가 기울 수 있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질 것 같으면 물리게. 지금 그대가 애원하면 취소해 주지.”

“끼리끼리 논다고 저 영애와 같이 겸손이라는 없군.”

망해데쓰 남작은 그 비아냥에 울컥했다.

대결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눈치 채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끊임없이 그를 하대했음에도 불쾌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번에 겸손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나의 기사들은 최강임을 기억하고 덤비게.”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단인 <다섯뱀>은 라스타 왕국의 최강 기사단이다.

<다섯뱀>은 무패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직 승리만 했으니까.

그 명성답게 그곳에 입단하는 것은 극소수의 일류만이 가능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만했다.

솔직히 진짜 전쟁을 경험한 그녀의 기사들과 이런 작은 곳에서 대결하면서 먹고 나는 것들은 그 격차가 명확했다.

망해데쓰 남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들 간의 대결은 마지막 순서였다.

페루제 공작부인들은 대련장에서 싸우는 가짜 기사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여기가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부인께서는 수준이 높은 대련만 보셨죠? 원래 이 정도도 잘한 것이라고 한답니다.”

“정말 하찮아.”

최고의 인재들이 겨루는 대련만 봤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눈앞에서 일어나는 대련은 하찮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하품까지 하면서 자신의 기사들이 가져올 ‘압도적인 승리’를 기다렸다.

“여러분, 망해데쓰 남작님이 벼르고 벼렸던 대결이 시작됩니다!”

“와아!”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양측의 기사들이 나왔다.

망해데쓰 측의 기사들은 모두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 수 없었다.

“과연 가면을 쓴 미지의 영애가 망해데쓰 남작을 이기고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까?! 기대해 주십시오.”

하도 망해데쓰 남작이 제대로 밟아 버리겠다며 말을 하고 다녀서 모두가 기대했다.

과연 얼마나 상대를 박살낼지, 저 어린 소녀가 얼마나 일그러진 목소리로 사과할지 등을 말이다.

“그러면 5 : 5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3승을 따내도 남은 대결도 그대로 진행이 됩니다!”

망해데쓰 남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 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첫판은 압도적이었다.

상대를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망해데쓰 남작이 망신당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운영자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망해데쓰 남작님의 기사께서 많이 긴장을 한 모양입니다.”

MC가 이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녀는 나머지도 그렇게 이길 줄 알았다.

“아! 아까와 반대의 상황이군요! 이번에는 망해데쓰 남작의 기사가 영애의 기사를 농락하는군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뒤에 있던 <노란뱀>의 단장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딴 용병들이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기사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망해데쓰 남작 측의 기사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실력으로 보면 자신이나 로빈 단장이 나서야 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그런 실력자를 상대로 여기까지 버티는 것을 칭찬해야 마땅했다.

도대체 어떻게 영지도 없는 일개 귀족 따위가 저런 실력자들을 곁에 둘 수 있을까?

“세 번째 승부도 망해데쓰 남작이 가져갑니다! 첫 번째 승리는 요행이었다는 듯이 이번에도 엄청난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군요.”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주군의 분노가 피부가 저리게 만들었으니까.

그녀가 손을 까닥거렸다.

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절로 침이 삼켜졌다.

“당장 로빈 단장과 나머지 기사들을 전부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오라고 해.”

“네.”

그녀가 박수치며 일어났다.

<노란뱀>의 단장은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나 망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보도 알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잠시 휴식할 시간을 주게.”

“패배가 코앞이라 마음이 조마조마 하신가 봅니다.”

망해데쓰 남작이 비아냥거렸다.

어쩌면 망해데쓰 남작 가문은 망하게 될지 몰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조마조마해서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참으로 차가운 눈빛과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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