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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8화 (178/221)

178화 망해데쓰 남작

페루제 공작부인이 디저트를 한입 먹고 차의 향을 맡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 말했다면 믿었겠지.”

“저는 다르다는 말씀이신가요?”

“너는 생명은 소중하다는 마음을 지닌 아이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의문스럽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본인이 말하고도 이상했던 것이다.

선하고 따뜻한 완벽한 영애인 레티시아.

정말 선하고 따뜻한 영애가 어떻게 페루제 공작부인의 마음을 얻고, 실리 시녀장의 마음을 얻었겠는가.

또한 귀부인들이 어린 영애의 눈치를 보게 만들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생각이 들었다.

레티시아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착하고 ‘더’ 차가운 성정이 아닐까?

천하의 페루제 자신조차 속일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것은 아닐까?

레티시아가 들으면 억울해할 생각이었다.

“오해세요.”

“무엇이 오해지?”

“저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생명의 가치는 모두 소중하다.

그 가치가 같기 때문이다.

그 전제는 거짓이다.

“착한 너라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비아냥처럼 들릴 수 있었으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그 물음에 레티시아가 웃었다.

“제 평판이 확실이 좋기는 한가 봐요. 공작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니까요.”

올라가는 입꼬리와 눈매는 야심가였고 냉혈한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레티시아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표정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신기한 것을 다 본다는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봤다.

“성서에는 세상의 모든 생명은 신의 창조물로 그 가치가 모두 소중하다고 하지.”

“신께서 그리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레티시아는 억지로 입가를 올리고 눈매를 매섭게 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평소에 그런 표정을 지을 생각도 지을 일도 없었으니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이나 기어 다니는 개미나 다 자신의 창조물이자 자식이지 않겠습니까?”

레티시아의 말은 맞았다.

신이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마땅히 다른 자식들도 평등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맞았다.

비록 그것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성서에는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놓고 인간을 가장 사랑한다고 써져 있다.

또한 신은 인간을 가장 사랑해서 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다.

“성서에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만 그것은 온. 전. 히 인간의 입장에 쓴 것에 지나지 않죠.”

“오로지 인간의 입장이다라…….”

“지금 성서에 담긴 내용도 인간의 편의에 따라 단편적으로 전해진 것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서의 내용은 수많은 내용 중 일부를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다.

수많은 성서에서 사람들의 실익에 맞게 일부만 선택했다는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실한 신자인 그녀에게 성서를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준 가르침과 자신의 삶에서 중요시한 것을 뿌리째 뽑는 짓이었다.

그래서 이 대화는 그녀에게 충격을 줬다.

그녀는 떨리려는 손으로 애써 찻잔을 잡고 차를 마셨다.

“공작부인, 정말 모두의 가치가 같습니까?”

“아닌 것 같으냐?”

“네.”

레티시아의 눈빛은 단호했고 대답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 와중에는 악녀 컨셉을 유지하느라 눈이나 입은 아팠다.

“어찌 갓 태어난 아이와 수많은 이들을 죽인 살인마의 가치가 같겠습니까?”

“네 말이 맞지.”

“본 적도 없는 낯선 인물의 목숨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과 그 가치가 같겠습니까?”

“그렇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신나서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신자이기는 했으나 불만이었던 내용이었다.

사람마다 그 역할과 능력이 다르거늘 어찌 모두의 가치가 같느냐 말이다!

게다가 누구나 자기 목숨이 귀하다.

누구나 자신이 아끼는 이들의 생명이 소중하다.

낯선 타인보다 자신과 자신의 사람을 지키는 것이 우선시되는 이유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이렇게 단번에 외면할 관계는 아니지 않니? 너희의 관계는?”

“그 관계가 저와 제 가족보다 소중하지 않지요.”

“흐음.”

페루제 공작부인이 티스푼으로 차를 휘저었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쳇’거렸다.

잠시 정신을 빠뜨려 놓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너는 네가 가진 능력 안에서 선의를 베풀 줄 아는 아이니까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거든.”

“제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란델리노를 구하는 일은 도저히 레티시아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그리 말했다.

“그래서 저와 가족이라도 살기 위해서 공작부인의 기분을 풀어드리려고 왔지요.”

“네가 이미 내 기분을 풀어줬다.”

억지로 ‘악녀’인 척하는 레티시아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표정은 자연스러웠으나 땀이 날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리 티가 나서야 어찌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는가.

페루제 공작부인이나 되니까 눈치를 채는 것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나 실리 시녀장 급의 능력자가 아니면 전혀 몰랐을 것이 뻔했다.

“기분을 풀었다고 해서 란델리노의 처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그러시겠죠. 공작부인께서 하는 결정은 언제나 가문을 위한 결정이니까요.”

“알면 되었다.”

레티시아의 말에 만족스럽게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레티시아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기분이 좋아지셨다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 상황에서 란델리노의 구명이 아니라 다른 부탁이라니 궁금하구나. 말해 보렴.”

“부인의 기사들을 빌릴 수 있을까요?”

“응? 내 기사들을 말이냐?”

“네. 부인의 기사들을 3, 4명 정도 빌렸으면 해서요.”

“빌려주는 것은 해줄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이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반짝였다.

레티시아 덕분에 기분이 풀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짜증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흥미로운 일은 그녀의 마음을 안정하게 해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틀 전에 시비를 붙게 되었습니다.”

“나의 비호를 받는 너에게 시비를 걸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기분이 언짢음을 드러낸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비호하는 레티시아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것은 페루제 공작부인 자신에게 시비를 건 것과 같았으니까.

레티시아는 아차 싶었다.

이러다가 사람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제가 누군지도 부인의 비호를 받는지도 몰랐습니다.”

“몰랐어도 그놈이 잘못을 했겠지. 그놈의 이름은?”

“저에게 시비를 건 인물은 오마하다가 망해데쓰 남작입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처럼 레티시아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사람을 써서 어떤 일로 망해데쓰 남작과 대립하게 되었는지 알아봐도 그녀의 잘못은 없다고 나올 것이다.

“망해데쓰 남작가문? 그런 가문이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이냐?”

“영지가 없는 귀족입니다.”

“어디서 몰락 귀족 나부랭이가 너에게 시비를 걸어?!”

영지가 없어도 선조들이 남긴 토지에서 나오는 곡물을 팔아서 부유하게 살았다.

몰락이라는 표현은 망해데쓰 남작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영지가 없는 귀족이라 함은 군대가 없는 귀족이었고, 그것은 힘이 없는 귀족이었다.

힘이 없는 귀족은 권력을 가질 수 없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힘이 없는 귀족은 몰락 귀족이었다.

아무리 부유함을 갖고 있어도 권력의 손길 한 번에 잃을 수 있었으니까.

“저를 부유한 평민 집안의 딸로 착각했습니다.”

“평민? 너를 말이야?”

“핫! 하찮은 것이 짜증나게 구는구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레티시아를 보면서 더 화가 났다.

까다로운 자신이 보기에도 ‘레티시아’는 귀한 티가 났다.

어디를 내놔도 귀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우아함과 기품이 있었다.

그렇게 자라도록 실리 시녀장이 열심히 교육하기도 했고 말이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만들도록 명령한 완벽한 귀족 영애의 ‘완성작’이었다.

자신의 예술작을 모욕한 것과 같았다.

그 망해데쓰 남작이라는 놈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페루제 공작부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봤다.

본디 상대를 위한 걱정을 하고 난 뒤에 분노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상대를 향한 걱정보다 권위에 도전했다는 사실에 관한 분노가 먼저임을 알았다.

알았기에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실리 남작님이 보내주신 기사들 덕분에 위험한 일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뒤에 무슨 말을 할지 얼른 말해 보거라.”

레티시아는 감질나게 말을 흐렸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재촉했다.

사람을 써서 알아보면 될 일이지만 빨리 듣고 싶었으니까.

사실, 누구도 그녀 앞에서 레티시아처럼 말을 흐리면서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그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오직 레티시아에게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평소의 여유로움이 유독 레티시아에게는 사라지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너무 총애를 해서일 것이다.

“제가 사과를 요구했으나 망해데쓰 남작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잘못한 놈이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그 조건이 무엇이냐?”

“기사들 간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사과하겠다고 했습니다.”

“영지도 없는 놈이 무슨 기사냐?”

기사는 주군에게 충성하는 주군의 검이자 방패.

멋있게 포장하자면 기사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을 진두지휘하여 적들을 죽이거나, 강력한 공격력과 방어력으로 적을 직접 죽이는 존재였다.

기사는 ‘적’을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지킬 영지도, 지킬 백성도 없는 몰락 귀족이 그런 존재를 끌고 다닐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경호용병이었다.

경호용병은 고용주의 안위 혹은 고용주가 지정한 인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용병이었다.

“용병 나부랭이 고용해서 기사라고 칭하고 다니는 것이겠지. 영지도 없는 놈이 대련장이 있을 리는 없을 것이고. 어디서 대결을 하자고 하느냐?”

“수도에 귀족들이 가문을 쓰고 자기 가문의 기사들을 대결하도록 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어요.”

“수도에서?”

수도에서 귀족들이 자신의 기사들을 끌고 와서 대결을 시킨다.

기사란 가문의 전력이다.

그런 전력을 귀족 간의 유흥을 위해서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할 만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말이다.

답이 나왔다.

“그러면 내기 도박을 하겠군.”

“부인의 기사들을 데려가면 승리는 따놓은 것과 같죠. 저도 소소하게 돈을 걸어 보려고요.”

레티시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려는 곳은 귀족들이 기사라 주장하는 호위용병들을 끌고 하는 도박장이 맞았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빛이 빛났다.

기대감이었다.

자신이 키운 아들을 죽일지 말지 간을 보는 여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이 있었는데 이제껏 몰랐다니 아쉽구나.”

“아는 귀족들만 가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네가 가는 날에 나도 가 봐야겠구나. 언제 갈 예정이니?”

“오늘 밤에요.”

그들의 외출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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