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스승의 마음
레티시아의 어머니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엄마는 다 지겨워. 너를 이용하려는 형부도 다른 사람들도 지겹고 페루제 공작부인께 휘둘려야 하는 딸을 구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말이야.”
“여보…….”
“엄마…….”
레티시아의 아버지는 아내의 말에 더 단호하게 결심했다.
반드시 다 정리하고 출판사를 다시 연다고 말이다.
북부를 떠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마음먹은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다.
* * *
레티시아는 짧은 회상을 하고는 그녀의 스승인 실리 시녀장에게 말했다.
“귀족 사교계를 떠날 사람이 하기에는 과하다고 생각해요. 수도에서 데뷔탕트라니요.”
“다른 영애였다면 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수도에 데려와서 데뷔탕트를 치러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야.”
실리 시녀장이 창밖을 봤다.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사뭇 귀엽게 느껴졌다.
“오직 레티시아, 너라서 해주는 것이야. 너는 그런 가치가 있는 아이니까.”
“과찬이세요.”
레티시아가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저는 공작부인을 위해서, 스승님을 위해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수도에서 하는 데뷔탕트는 그 가문의 위상부터 다르게 해줬다.
일단 수도에서 데뷔탕트를 치른다는 것은 수도까지 오는 비용, 의상, 식비를 모두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용인들의 것도 포함이다.
수도에 여는 파티에서 데뷔탕트를 하기 위해 오는 것만으로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물며 수도에서 데뷔탕트를 직접 열어준다?
그것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최측근인 실리 남작이?
그 비용은 사치스러운 귀족들조차 상상하기 어려울 금액일 수 있었다.
얼마나 페루제 공작부인과 실리 시녀장이 레티시아를 아끼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북부를 떠날 생각인 레티시아에게는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수도에 직접 제 데뷔탕트를 열어 주실 정도의 가치를 해낼 자신이 없어요.”
그녀에게는 권력에 야심이 없었다.
권세가들이 발을 잘못 삐끗하면 죽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부유함도 적당히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되었다.
노후에 편히 살 정도만 있으면 되었다.
그녀는 그 이상의 것은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능력을 정확히 아는 태도였다.
“네가 가진 부담감을 안다. 그분께서는 대우를 해준 만큼 상대가 능력을 발휘하기를 원하시니까.”
“얼마나 많은 것을 원하시는지 모르기에 두려워요.”
“이해한다. 나도 젊은 시절에 그러했다. 그분의 높은 수준을 맞추기에 급급했지.”
실리 시녀장의 말투에는 너도 시간이 흐르면 적응이 될 거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레티시아는 아직 어려서 그 미묘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게다가 너의 마음이 그러하더라도 그분께서 원하신 일이다.”
그 말 뒤에는 “누가 감히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니?”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레티시아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떠나기로 결정했다.
과한 대우를 받고 떠나게 된 것은 난처했으나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일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떠난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레티시아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명령에 따라 실리 시녀장이 그녀의 데뷔탕트를 해준다고 생각했다.
“폐하조차 막지 못하시고 벨로나 공작 각하께서도 막지 못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런 분을 우리가 막는 것은 불가능하지.”
레티시아의 장난스러운 말에 실리도 장난스럽게 대답해 줬다.
서로가 웃으면서 마주보던 중에 레티시아의 손을 실리 시녀장이 따스하게 붙잡았다.
“레티시아, 공작부인께서는 너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 딱 하나만 바란단다.”
“스승님.”
“지금처럼 내 곁에서 말벗도 해주고 하는 것.”
“북부를 떠나도 자주 편지하고 찾아뵈도록 노력할게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스승님이 주는 애정을 레티시아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까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방해를 했지.”
“아니에요. 스승님과의 시간은 언제나 즐거운 것을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나는 이제 나갈 것이니 너도 어서 나가 보렴.”
“알겠습니다.”
실리 시녀장이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고는 방을 나갔다.
레티시아는 얼마간 방 안에 있다가 나갔다.
미뤄도 되는 약속이라고 스승님에게 말했는데 바로 나가는 것은 이상했기 때문이다.
* * *
그 외출이 있고 이틀 후였다.
레티시아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찾아왔다.
의외의 방문자였다.
요즘 저택은 살얼음판이었다.
소문을 들은 귀부인들은 아예 저택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짜증이 난 페루제 공작부인이 얼마나 매서운지 알았으니까.
원래라면 상대가 기다리거나 말거나 저택의 문조차 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레티시아라서,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방문을 허락하게 되었다.
레티시아는 저택문을 넘었으나 내리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 마차가 서고 마부가 문을 열자마자 타 버렸기 때문이다.
“저택에는 기분이 나빠서 더는 못 있겠구나.”
“그러면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이 좋죠.”
“추천할 만한 곳이 있니?”
레티시아는 수도 출신이 아니었다.
데뷔탕트 때문에 잠시 오게 된 수도였다.
그녀에게 갈 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관광객이 같은 관광객에게 맛집을 물어보는 꼴이었다.
그렇지만 레티시아는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수도에 유명한 디저트 가게가 있어요. 각자 있을 수 있는 방을 따로 제공해서 편히 있을 수 있고요.”
“좋구나. 거기로 가자.”
“알겠습니다.”
그들은 레티시아가 말한 디저트 가게에 왔다.
수도의 귀부인들, 영애들이 자주 가는 가게였다.
각자의 방에서 마음 편히 수다를 떨기 좋았으니까.
솔직히 가게의 방은 모두 손님들로 가득했다.
어떤 방에서 부인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그들 앞에 섰다.
“페루제 공작부인, 인사를 올립니다. 들어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장미회에 있는 부인이군. 나를 위해서 예약한 것인가? 내가 이날 올 줄 알고?”
서늘한 눈빛이었다.
레티시아와 짜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기회가 되면 모시고 싶어서 한 달을 예약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데?”
“네, 공작부인께서 언젠가는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레티시아와 짠 것은 맞았다.
한 달을 예약한 것도 맞았다.
단지 장미회의 부인이 한 달을 예약한 것은 수도에 있는 내내 이곳의 디저트를 먹기 위함이었다.
오직 수도에 와야 먹을 수 있는 디저트였기에 알차게 먹고 싶었던 것이다.
레티시아는 그것을 알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장미회 부인들이 그녀에게 의지하는 만큼 그녀도 부인들에 관해 잘 알았던 덕분이다.
“페루제 공작부인?”
“메디치 백작이기도 한 공작부인을 말하는 거야?”
“대단한 분이 이런 곳에 오시네.”
페루제 공작부인의 등장에 입장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 유명한 페루제 공작부인이 디저트 가게에 올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도에 오면서 한 번도 이런 곳에 온 적이 없었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방문 소식에 사장이 직접 나타났다.
헐레벌떡 온 것이 티가 났다.
보통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으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알아차렸다.
명색이 귀족을 상대하는 상인의 태도로 보기에는 우아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가 작게 눈을 찌푸리자 사장이 움찔했다.
더 이미지가 나빠지기 전에 사장은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공작부인, 인사를 드립니다. 이곳의 사장인 케세키도 돈르주며조아입니다.”
“꽤 잘되는 가게군.”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이곳을 찾아주고 계십니다.”
평생 볼 일이 있을까 싶은 거물이었다.
전 객실이 예약으로 차 있는 상태였지만 억지로라도 하나 빼서 자리에 앉도록 해야 했다.
사장은 머리를 굴렸다.
슬프게도 거물로 인해서 억지로 손님을 내보내면 가게의 평판과 단골을 잃게 된다.
그렇다고 저 거물을 그냥 내보낸다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겁이 났다.
“걱정말게. 다행히 북부의 부인이 양보해 준다고 하더군.”
“그러시군요!”
사장은 안도하며 최고급 디저트를 아끼지 않고 서비스로 풀기로 했다.
과거에 수도 최고의 의상실을 망하게 한 전력을 생각하면 전혀 과하지 않았다.
사장의 불안을 뒤로하고 레티시아와 페루제 공작부인은 객실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귀여움이 있는 방이었다.
우아함과 품격을 중요시하는 페루제 공작부인과 맞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곳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디저트와 차를 들이겠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디저트가 그들 앞에 놓였다.
사장이 다른 손님들보다 제일 먼저 디저트가 들어오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디저트를 한입 먹고는 말했다.
“데뷔탕트 준비 때문에 바쁠 것인데 용케 찾아왔구나.”
“심기가 불편하시다는 말을 듣고 오게 되었어요.”
“란델리노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데뷔탕트 준비는 쉽지 않다.
데뷔탕트를 어떻게 보내고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사교계의 영향력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야 함이다.
신경을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그런 시간을 쪼개서 여기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왜요?”
“응?”
“제가 란델리노 백작님을 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동그랗게 잠시 떠졌다.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레티시아가 자신의 벗인 란델리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공작부인께서 굳건히 지켜주고 계시잖아요. 그분을 걱정할 이유가 없죠.”
도대체 저 예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흥미로웠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진짜로 란델리노를 죽일지 말지 고민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니?”
그 물음에 레티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가 되었다.
능청스러우면서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자신의 기분을 풀어줄 재미를 줄 것이라 여겼다.
레티시아가 활짝 웃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논하는데 말이다.
“죽이신다면 죽이시는 것이지요.”
“죽이면 죽이는 것이다? 벗의 죽음이 바로 코앞인데 매정한 말이구나.”
“아무리 벗이라고 해도 제 목숨보다 소중할 수 없지요. 굳이 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죽음을 자초해야 할까요?”
레티시아는 친우를 버리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부인의 마음을 풀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직 자신이 살기 위해서 말이다.
상당히 이성적이며 냉혹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페루제 공작부인의 마음에 더 들었다.
날카로운 이성은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