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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6화 (176/221)

176화 떠나고 싶은 레티시아

다음날, 레티시아의 예상처럼 되었다.

수도의 모든 언론사가 건국제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서특필했다.

돈 후안의 신성모독부터 메디치 백작령의 메디치아 아카데미까지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

그녀는 신문을 접고는 손등으로 머리를 기댔다.

“공작부인께서 위기감을 가지실 일을 벌였어.”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입학이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뜻인가?

페루제 공작부인이 란델리노를 감금하고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 될 것을 예감해도 강행할 만큼?

아그리피나는 새벽에 급하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실리 시녀장이 알면 안 되었으니까.

“공작부인의 후계자가 되려면 라스타 왕국 귀족들의 지지는 필수니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입학해야 했을 것이다.

그곳의 입학이 아니라면 란델리노가 라스타 왕국의 귀족들과 연을 맺을 계기가 없었다.

타국 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라스타 왕국으로 직접 가기에도, 그들이 란델리노에게 가기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치가 보였다.

“그분께서 만드신 아카데미가 일반 아카데미일 리가 없기도 하고…….”

유능한 사람들만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분이다.

그 아카데미도 그런 성향에 맞춰져 있어서 그런지 그곳의 교사로 내정된 이들도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인물들이었다.

언론사들도 그것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그 위대한 인물들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관해 특별편을 편성할 정도다.

신성모독죄라는 큰 죄목보다 메디치아 아카데미의 등장이 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과거보다 신앙심이 옅어졌어.”

과거에는 마법사들을 이단 혹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마법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각국에서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시작이 신실한 페루제 공작부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신앙심이 살아가는데 1순위 조건이던 시대였다면 그쪽으로 관심을 몰아서 란델리노를 살렸을 것이다.

원칙적으로도 그것이 맞았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 원칙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무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방법으로 구해야겠지.”

레티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들을 간략하게 머리에서 정리했다.

그렇다면 이제 실행에 옮겨야할 때다.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란다.”

“스승님!”

레티시아가 활짝 웃었다.

레티시아가 성장했다는 것은 시간도 그렇게 지났다는 의미다.

그것은 실리 시녀장과 레티시아가 사제관계로 있는 시간도 짧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아침부터 왜 왔냐고 축객이라니 섭섭하구나.”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을 아시면서 또 그러시네요.”

두 사람은 나름대로 농담을 하며 웃었다.

사실, 남들은 실리 시녀장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 특유의 상대를 압박하는 분위기와 가면이 그렇게 만들었다.

레티시아 옆의 시녀가 조마조마해하며 그들을 보는 것만 해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레티시아 말고는 누구와도 이런 농담을 하지 않았다.

실리 시녀장이 겉옷을 챙겨서 들고 있는 레티시아를 힐끔거렸다.

“어디 나가니?”

“네,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구나. 하긴 데뷔탕트 준비도 얼추 끝났는데 너도 너의 시간을 보내야지.”

실리 시녀장이 실리 남작으로 따로 저택을 구해서 머무는 이유였다.

레티시아의 데뷔탕트를 위함이었다.

데뷔탕트는 상류 사회에 귀족 가문의 여식을 소개하는 공식 데뷔 행사다.

실리로서는 후견인으로 레티시아를 지원해 주기 위해서는 시녀장의 위치보다 남작의 위치가 더 나았다.

“아니에요. 약속은 미루면 돼요. 여기 앉으세요.”

“그러면 잠시 이야기 좀 나누고 갈까?”

“물론이죠.”

레티시아는 약속은 없었다.

단지 란델리노를 구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무 대놓고 중요한 일임을 드러내면 자신의 스승님은 눈치챌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로 여유로운 척했다.

레티시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너무 과한 대우인 것 같아요. 스승님.”

“너는 너무 겸손해서 탈이란다.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렴.”

레티시아는 데뷔탕트를 할 생각이 없었다.

벨로나 공작부인으로 인해서 북부 사교계의 여러 귀부인과 연이 닿아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녀의 집안은 몰락 귀족 가문으로 귀족사회와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게다가 그들 성향도 귀족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귀족들이 보기에는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지만 스승님, 스승님께 말한 것처럼 저는 곧 북부를 떠나고 귀족사회도 떠날 것인 걸요.”

* * *

레티시아는 수도로 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레티시아는 우편함에 든 서신 하나를 받고 집안을 폴짝거렸다.

“엄마, 이거 봐요!”

“응? 그게 뭐니? 무엇인데 그리 웃음꽃이 피었을까?”

“우리딸, 뭐가 그리 좋을까?”

딸의 기뻐하는 모습에 부모님도 좋아하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부모님이 앉아 있는 소파로 후다닥 앉았다.

부모님 사이에 앉은 그녀는 누구보다 마음이 든든하고 행복했다.

“저번에 가명으로 책을 냈잖아요.”

“그랬지.”

“벌써 정산서가 나왔구나!”

“네! 여기요!”

그녀는 정산서를 당당하게 보여줬다.

레티시아의 부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나! 첫 작품에 이렇게 벌다니 대단하네!”

“그러게! 우리 딸이 문학 천재였어!”

레티시아는 대박은 아니더라도 첫 작품에서 중박을 쳤다.

처음부터 대박을 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이것도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의 책이 무관심이 외면당할까 걱정했다.

수익이 걱정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딸의 마음이 걱정되어서였다.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아줬다.

“이런 식으로 몇 작품을 써내면 다시 출판사를 낼 수 있어요!”

레티시아의 말에 부부가 움찔했다.

부부의 꿈은 출판사로 수많은 책을 내고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비록 레티시아의 아버지가 아파서 그 꿈을 접게 되었지만 말이다.

“제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그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딸이 그들의 꿈을 기억하고 있는 줄은 말이다.

그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는지도 꿈에도 몰랐다.

레티시아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본 그녀의 아버지는 주먹을 쥐었다.

뭔가를 결정한 눈빛이었다.

“그래. 이번에 정리하고 수도로 가자.”

“정말로요?”

“괜찮겠어요?”

레티시아도, 그녀의 어머니도 토끼처럼 눈을 뜨고는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고용한 상단에서는 그를 붙잡아 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사람의 선의를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잘해 주며 착하게 굴면서 말이다.

그의 딸이 ‘레티시아 영애’라는 사실만으로 그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암.”

레티시아 영애가 나서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내쳐질 뻔한 부인들을 구한 횟수만 해도 얼마인지 모른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에 들고 싶어서, 그녀에게 버려지기 싫어서 레티시아를 얼마나 찾아댈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레티시아의 조언은 페루제 공작부인과 관련이 없는 일에도 유효했다.

얼마나 필요한 조언만 하는지 귀부인들 사이에는 레티시아의 조언은 천만금과 같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더는 딸 아이를 등쳐먹는 아비가 되고 싶지 않다.”

“아빠! 내가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보! 당신은 누구보다 훌륭한 가장이에요!”

그런 레티시아의 영애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레티시아의 아버지가 있는 상단에 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레티시아의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페루제 공작부인이 직접 그 상단과 라스타 왕국 상단을 연결해 줬다.

중급 상단에 불과했던 그 상단이 오직 레티시아의 아버지로 인해서 북부 최상위 상단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가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상단주는 그의 바지를 잡으며 애원했다.

“이보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가! 자네 아픈 몸을 생각해서 처음에 내가 얼마나 배려를 해줬나!”

“맞습니다. 상단주님과 저희가 지내온 세월과 추억을 생각해 주세요!”

매번 그런 식으로 나오니 순한 그는 사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마음이 착한 것이 죄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상단주가 바지를 붙잡아도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야.”

“그래요. 우리 그때처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요.”

아내의 적극적인 찬성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떠나면 이노무세키 백작 가문과 한동안 절연할 수 있는데 괜찮겠어?”

“그러네? 엄마랑 이모랑 사이가 좋으시잖아요.”

“어쩔 수 없지. 다 형부가 자초하고 언니가 방관한 탓이니까.”

레티시아의 부모에게는 북부에서 살면서 큰 고충이 있었다.

형부인 이노무세키 백작 때문이었다.

“아니, 레티시아에게 말을 좀 해달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이러나?”

“그 아이를 이용해서 이미 많이 해드셨잖아요!”

“해먹었다니! 여기 저기서 나를 찾는 것을 어찌하란 말이야!”

“레티시아의 이모부라는 이유로 대우받으면 좋으세요?!”

이노무세키 백작은 북부 사교계에서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

그가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가문이 대단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레티시아 영애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총애하는 영애인 레티시아 영애.

실리 시녀장이 총애하는 영애인 레티시아 영애.

수많은 귀부인이 총애하고 혹은 인맥을 맺기를 원하는 레티시아 영애.

북부 최고의 지성과 미 그리고 예법을 숙지한 숙녀인 레티시아 영애.

북부 사교계에서 레티시아 영애가 가진 타이틀들은 어마어마했다.

그녀와 친분을 쌓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고 싶어서 사람들은 이노무세키 백작에게 갔다.

레티시아의 부모는 딸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물들이 아니었으니까.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가장 부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레티시아 영애! 제발 도와주세요!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연회를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의 안목을 만족하도록 해야 하는데!”

“레티시아 영애, 공작부인께서 심기가 불편하세요. 한번 찾아가서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영애는 그분의 마음을 잘 알잖아요.”

“레티시아 영애, 저희 딸 아이가 곧 데뷔탕트를 할 예정이거든요. 미리 또래 영애들과 친분을 쌓도록 하고 싶은데 영애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레티시아 영애, 저희 아이가 예법이 부족해요.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영애를 편히 생각해서 그런데 예법을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레티시아는 성인이 아닌 소녀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레티시아는 어른들 사이에는 어른 대우를 받았다.

어른들이 그녀를 어른처럼 대우해 주니 또래들도 그녀를 어른처럼 윗사람으로 대했다.

뛰어난 능력에 책임은 늘어났으나 의지할 곳은 없었다.

그들의 딸은 외로웠다.

의지해야 할 어른들이 도리어 아이에게 의지했으며 부모는 그 상황을 타개해 주지 못했다.

몰락가문 출신의 부모는 뛰어난 딸을 품을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의 뛰어남을 흐뭇해했다.

“제가 가르친 아이라서가 아니라 워낙 뛰어난 아이지요.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실리 시녀장은 레티시아의 어깨에 있는 짐을 가벼운 깃털인 것처럼 굴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레티시아의 고독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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