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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5화 (175/221)

175화 유일한 구명줄

세베루스의 후회와 달리 벨로나 공작은 산뜻하게 보였다.

기대감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욱해서 란델리노를 처리해 주면 좋겠군.”

“이렇게 대놓고 감금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혹시라도 영식께서 죽으면 자신이 죽였다고 광고하는 꼴인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여자도 사람이야. 욱할 수 있지. 지키겠다는 명목이 있지만 그거야 나중에 증거를 만들면 되는 것이니까.”

그녀가 아들을 죽였다는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된다는 말.

아무리 애정이 없는 아들이라고 해도 양심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찜찜합니다.”

“그대의 생각도 이해가 되기는 해. 이성을 잃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니까.”

“감정적으로 보인 행동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계획적이었죠.”

세베루스는 걱정이 되었다.

란델리노를 감금하고 위협하는 것도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심려였다.

충분히 할 만한 생각이었다.

여태껏 그녀는 모두가 경악할 일들을 많이 벌였으니까.

벨로나 공작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이가 들었고 무엇보다도 그녀도 사람이야. 언제나 이성적으로, 계획적으로 굴 수 없어.”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젊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를 무서워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변화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면서 이성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인다.

젊음이 사라지면 질수록 인내도 사라진다.

인내하면서 참을 위치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변한다는 뜻이었다.

벨로나 공작은 그녀도 사람이기에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베루스도 그의 말이 나름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페루제 공작부인도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대부분일지라도 말이다.

“아들을 죽인 여인을 아내로 둘 수 없다는 명목으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겠군요.”

“그래. 아무리 교황이라고 해도, 많은 조건이 붙은 혼인계약서가 있다고 해도 말이야.”

아들을 죽인 여인과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교황이 아무리 벨로나 공작을 증오해도 말이다.

그것은 기존에 한 혼인계약서를 파기할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어서 빨리 그 아이를 죽여 줬으면 좋겠군. 이제는 이 징글징글한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싶어.”

“가문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리할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몰랐다.

심지어 페루제 공작부인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찾아오기 전에 란델리노는 미리 자신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그의 측근 시녀인 아그리피나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저택에 당도하기 직전에 저택을 은밀히 빠져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 * *

아그리피나는 어느 고급 저택 앞에 당도했다.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낯선 이의 방문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거기, 누구인데 이리 오는 것이오.”

“정체를 밝히시오.”

그들의 반응은 자연스러웠다.

얼굴과 몸을 가리고 은밀하게 다가오는 인물을 환영하는 경비병은 없을 것이니까.

그것도 늦은 밤에 말이다.

그녀는 얼굴을 감추던 모자를 내렸다.

“란델리노 백작님의 시녀인 아그리피나라고 합니다.”

“란델리노 백작님?”

수도 출신에, 평민인 그들이 귀족 가문의 모든 인물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엄연히 이런 대저택을 지키는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중요 인물에 ‘란델리노 백작’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란델리노 백작님이 벨로나 공작 가문의 적자인 분을 말하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아그리피나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경비병들과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다급함과 관계없이 경비병들의 입장은 달랐다.

“어느 분을 만나러 온 것이오?”

“레티시아 영애입니다.”

신원 확인은 경비병들의 당연한 의무였다.

게다가 그녀의 수상한 방문은 그 정체를 의심하게 했다.

원칙상, 저택의 주인이나 그 주인에게 권리를 일임 받은 인물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아그리피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

“급한 일입니다. 이리 늦은 시간에 올 정도로요!”

“흠…….”

경비병들은 난처했다.

그들의 윗사람은 깐깐하기로는 보통 이상이고 차갑기로는 겨울의 찬바람보다도 더 차가운 사람이었다.

괜한 일로 확인을 요청했다가 어떤 일이 생길까 우려가 될 지경이었다.

그 윗사람의 집사도 주인을 닮아서 그러했다.

아그리피나는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눈치 챘다.

“레티시아 영애께 확인해 주십시오. 란델리노 백작님의 시녀인 아그리피나가 왔다고 하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 말에 경비병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레티시아 영애에게 확인받고 맞으면 바로 들이자.”

“그래도 괜찮겠어? 실리 남작님이 영애가 신경을 쓸 일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며?”

실리 남작.

페루제 공작부인의 최측근인 실리 시녀장은 라스타 왕국에서 남작 작위를 가진 정식 귀족이었다.

그녀는 수도에 ‘실리 시녀장’이 아닌 ‘실리 남작’으로 있었다.

그래서 벨로나 공작 저택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 사택에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신경을 쓸 일이야? 친구의 시녀가 온 것인데.”

“하긴 레티시아 영애께서 란델리노 백작은 자신의 친구라고 서신이나 시녀가 올 수 있다고 했지.”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급하게 구한 저택에, 급하게 구한 경비병들이었기에 허술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좋습니다. 시녀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병 중 하나가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그리피나에게는 영겁과 같은 시간이 흐르자 경비병이 돌아왔다.

그 곁에는 시녀 하나가 있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감사합니다.”

경비병이 문을 열자마자 아그리피나는 빠르게 들어갔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네.”

그녀는 시녀의 안내에 따라 달려갔다.

그들은 저택의 정문이 아닌 고용인들이 쓰는 쪽문으로 들어갔다.

시녀를 따라 들어간 방안에는 레티시아가 있었다.

창밖에서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창가 쪽에서 레티시아가 아그리피나에게로 다가왔다.

“피나! 란델리노에게 무슨 일이 있는데 이런 시각에 나를 찾아?”

그런 레티시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야?”

“제발 살려 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러는 것인지 알려 줘야지.”

그녀는 아그리피나의 갑작스러운 기행에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의 벗인 란델리노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후 사정을 알아야 무엇을 돕든가 하지 않겠는가.

“저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모른다니?”

“란델리노 백작님께서는 오늘 밤에 공작부인께서 찾아오면 바로 영애께 살려 달라고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레티시아는 눈을 찔끔 감았다.

그 연회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아는 것이 전무한 상황에서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란델리노는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무언가를 했고 그것이 페루제 공작부인의 심기를 아주 심하게 거슬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레티시아 자신은 친구를 구하기 위해 얼마든지 불구덩이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부모님이 다친다면?

스승님이 다친다면?

친한 이웃과 친구들이 다친다면?

그 위험을 계속 감수하다가 그들이 혹여 죽기라도 한다면?

그녀가 눈을 떴다.

아그리피나는 움찔했다.

언제나 우아하고 다정한 레티시아 영애였다.

이렇게 서늘하고 무감각한 표정을 보게 된 것은 놀랄 일이었다.

“피나, 나는 궁금해. 란델리노는 목숨을 걸면서도 이루고 싶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벗이 누구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뒤를 잇기를 원했다는 것을 잘 이해했다.

그녀는 란델리노가 자신을 부정하는 아비에게는 복수의 의미로, 란델리노가 자신이 사랑하는 어미에게는 그녀의 진정한 자식이 된다는 의미로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여겼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였을까?”

그녀는 란델리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레티시아의 부모님이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딸인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랑받았고 존중받는 가정에서 자라왔다.

매일 웃음이 번지는 식사 시간이었다.

선의는 반드시 돌아오는 행운도 있었다.

“미래에 생길 행복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죽음을 감수할 정도로 간절했을까?”

반대로 란델리노의 부모님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니?

서로 죽었으면 하고 기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부모와 함께하는 식사는 살벌함이 가득했다.

서로가 상대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날카롭게 관찰하는 시간이다.

그는 선의라는 가식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상대를 지옥으로 밀치고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네, 물론입니다.”

아그리피나가 떳떳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레티시아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어도 결코 얻지 못하는 것을 얻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도전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머저리나 할 짓이지요.”

누구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후계자라는 자리에 도전할 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 위대한 여인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 허락을 받지 않고도 도전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법적인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 페루제 공작부인이 가진 모든 것을 승계 받을 기회를 포기하고 겨우 일국의 ‘공작’ 따위에 만족하라니?

호구나 할 짓이었다.

“낮은 자리에서 자리만 지키는 자는 외면당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증명하고 싶으면 그만한 위치에 올라가야지요.”

위치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진 권리와 권한도 달라진다.

자신의 권리를 지금보다 더 주장하고 싶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로 가야 한다.

자신이 지금보다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싶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

높아질수록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도 높아지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에 기대기보다는 현재의 가능성에 믿고 도전하는 것이 더 뜻깊지 않겠습니까.”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는 공정하지 않다.

누구에겐 꽃길을 주지만, 누구에게는 가시밭길을 선사한다.

누군가에게는 끝을 행복으로 맞이하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끝을 비극으로 맞이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행복만 주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행만 준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야심을 참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것은 아그리피나의 생각이자 란델리노의 생각이었다.

그 야심에 불타는 눈동자에 레티시아가 한숨을 뱉어냈다.

“지금은 도울 수 없어”

“영애! 당신을 누구보다 믿는 친우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아그리피나가 소리를 질렀다.

란델리노가 유일한 구명줄이라고 믿고 그녀에게 자신을 보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도 란델리노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다면 구해 줄 인물은 레티시아밖에 없었다.

“돕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야. 내일이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니까 그때 생각하고 움직이겠는 것이지. 그리고 란델리노가 위험하다면 너도 위험한 상황이지. 은밀하게 거처를 마련해 줄게.”

“귀한 마음에 감사합니다.”

건국제 연회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난 뒤에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일의 해가 뜨면 알 일이었다.

수도의 수많은 언론사에서 기사로 써낼 것이 뻔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분노하게 할 만한 사건이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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