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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4화 (174/221)

174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예상치 못한 아들의 말이었으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곧 정신을 차렸다.

“네가 미쳤구나. 나는 한순간도 나 자신을 추하다고 여긴 적이 없다.”

“진정 그리 여기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란델리노는 미소 없이 차가운 물음을 던졌다.

그녀가 헛웃음을 보였다.

아들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추하다고 여기려면 외모가 추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추해야 한다.”

“…….”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당당함을 바라봤다.

정말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함이었다.

귀족이라면 응당 저리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완벽한 귀족이었다.

“나는 라스타 왕국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이 말에는 아름다운 외모가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것에 도움이 되었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가문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어느 가문을 멸문하는 것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서 루비로즈 가문은 더 위로 올라가게 되었으니까.

“내가 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 사람들, 죽게 된 사람들을 향한 미약한 미안함도 없었다.

루비로즈 가문에 도전하고 저항한 대가였으니까.

“내가 왜 스스로 추하다고 여기겠느냐?”

란델리노가 빤히 페루제 공작부인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풋, 푸하하하.”

막 웃는 것이 아닌가?

아까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듯했던 것을 생각하면 생경했다.

란델리노는 한참을 웃고는 미소를 지었다.

계속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녀는 순간 몸이 굳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나는 어머니의 거울입니다.”

“거울?”

“네. 거울요.”

거울이 무엇인가?

사람이나 물체를 비추는 도구다.

거울은 그 앞에 있는 무엇이 있더라도 반드시 비췄다.

“나는 어머니가 가르침대로 배웠고 자라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여쭤보겠습니다.”

그는 우아하게 미소를 완성했다.

그리고는 아까 쳐냈음에도 다시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욕망을 감추지 말라고 가르치신 분이 누구십니까?”

“너…….”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던 세상이 순식간에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란델리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건국제 연회에서도 여기에서도 주도권을 란델리노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치신 분이 누구십니까?”

란델리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진정이 되었던 광기가 눈에 다시 깃들기 시작했다.

“과한 욕심을 가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욕심을 이룰 능력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그는 노력했다.

자신이 욕심을 채우고 이루기 위한 능력이 필요했다.

욕망을 채울수록 더 많은 권리가 생긴다는 것을 어머니를 보며 깨달았다.

피를 쏟는 듯한 노력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였다.

“세상에는 지배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뉜다고 말한 분은 누구십니까! 지배당하는 자는 이용만 당하는 것이고 추하다고 말한 분은 누구십니까!”

누군가의 즐거움으로 이용당하기 싫었다.

누군가의 화풀이로 이용당하기 싫었다.

그는 잘 알았다.

이용당하는 것은 추한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것을 그대로 배웠고 따랐습니다. 어머니!”

그는 어머니의 말씀이 모두 옳음을 잘 알았다.

직접 경험해 봤으니까.

직접 목도했으니까.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어긋난 적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리 살 것입니다!”

어머니처럼 완벽한 귀족으로, 완벽한 지배자로, 완벽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제가 어머니의 거울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규였다.

당신의 삶을 따라오기 위해 노력한 아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외침이었다.

“제가 추하다가 하셨습니까! 제가 추하다는 것은! 욕망을 감추지 않았던 어머니 자신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도 어머니처럼 솔직했고 당당했다는 말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뤘던 자신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이라는 항의였다.

“나는 어머니의 뒤를 이을 자격과 능력이 있기에 행동했을 뿐입니다!”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자식으로 그녀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후계자로 책무를 이행할 자질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 소양을 갈고 닦을 것이었다.

란델리노가 씩씩거리며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방안은 조용해졌다.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아들이 강하게 잡고 있던 양어깨가 고통스러웠다.

힘을 줘서 아들의 손에서 벗어난 뒤의 행동은 단순했다.

찰싹!

“아직도 네 잘못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반성하고 있거라.”

그녀는 아들의 뺨을 때리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언제나 우아해야 했으니까.

그녀밖에 없는 침실에서 에레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강하게 분노했다.

“어찌 그런 망언을 할 수 있지! 네가 얼마나 그 녀석을 정성껏 길렀는데 말이야!”

“그러게.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녀가 방안의 탁자에 있는 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전자에 든 차를 찻잔에 따랐다.

“페루제?”

그 행동은 주전자의 차가 비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에레보스는 계약자를 당황해하며 쳐다봤다.

그전까지 본 적이 없었고 볼 것이라고 여겼던 모습을 계약자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왜 내가 허락한 위치에서 만족하지 못할까?”

찻잔에 담긴 차는 어느새 찻잔을 넘쳐서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찻잔 안의 차에는 추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차에 비친 자신을 본 그녀는 그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상실감에 젖은 계약자의 모습에 에레보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내가 죽여 줄까? 증거도 없이 완벽하게 죽일 수 있어.”

“후우.”

그녀가 에레보스의 말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우아하게 웃었다.

“내가 말했지. 너는 그대로 이 세상을 즐기면서 있으면 된다고 말이야. 그대로 해줘.”

에레보스는 이런 때에도 자신을 우선시해 주는 계약자가 너무 사랑스러웠고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그도 그녀에게 제대로 도움을 주는 정령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싫지만 자신의 계약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은 더 싫었다.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것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기꺼이 죽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이 착하고 다정한 계약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하찮은 것들을 죽여서 더러워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그녀는 개의치 않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가문을 분열되게 하고 위협하게 되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지.”

찻잔에 차가 흘러넘치고 그 찻잔이 깨지기까지 참으로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 * *

그리고 그날 밤.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다.”

“네!”

“식사는 기사들이 직접 가져다가 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몸수색도 할 것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다섯 뱀>의 기사들이 란델리노의 문 앞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

명분은 아들을 해하려고 하는 무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미리 대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측근 시녀인 아그리피나를 심문할 것이다!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택 내부에서는 그 명분을 믿지 않았다.

아끼는 아들을 지킨다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흉흉했다.

마치 란델리노를 언제든 죽이려고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일반적인 가문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설사 일어난다고 가주가 가만두지 않을 일이었다.

감히 가문의 적자를 계모가 감금하고 죽이려고 간을 보고 있다니 말이다.

기사들 끌고 싸워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벨로나 공작 가문이 일반적인 가문이었다면 그리되었을 것이다.

벨로나 공작과 세베루스는 아들의 감금 소식을 집무실에서 듣게 되었다.

“공작부인께서 무슨 심통이 나서 이러는지 모르겠군요.”

“연회장에서 아주 흥미로운 일들이 있었거든.”

벨로나 공작은 자신의 최측근인 세베루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베루스는 건국제 연회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믿었던 아이에게 뒤통수를 맞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더군. 아니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어.”

“세상 아래 자신보다 높은 존재는 없다는 듯이 사시는 분이 그리 당하셨다니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눈가가 미세하게 굳은 것을 자네도 봤어야 해.”

벨로나 공작은 이 상황을 아주 좋게 바라봤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은 모양새에서 그 마음이 느껴졌다.

벨로나 공작이 호탕하게 웃다가 갑자기 진중해졌다.

그에게 유일한 법적 아들은 참으로 거슬리는 존재였다.

직접 죽일 수 없고 그렇다고 유회해서 죽일 수 없는 존재였다.

직접 죽이는 것은 아버지가 죄가 없는 아들을 억울하게 죽이는 꼴이었다.

엘리사와 헤레스의 정체가 사람들에게 까발려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사람을 써서 비밀리에 죽이기에는 그의 부인은 만만치 않았다.

아쉽게도 란델리노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다면 괜한 동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네는 알면서 왜 이러나?”

란델리노에게 무관심과 방치로 지옥을 준 이유는 단순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낳게 될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고민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서 사랑하지 않은 여인이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죽이는 것이 옳은가?

“작은 동정심에 아이의 무능함을 이유로 쫓아내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는 것을 말이야.”

“각하, 저는 당시에도 지금도 그 일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 그대는 강하게 반대했지.”

그 찰나의 흔들림으로 일이 란델리노를 처리하는 일이 힘들어질 줄 알았다면 그냥 어릴 때에 처리했을 것이다.

세베루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워낙 자신이 모시는 분이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그도 외면에 동조했다.

‘각하, 저는 너무도 후회하고 또 후회합니다.’

그는 후회가 되었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도록 중재자 역할을 해야 했다.

란델리노 영식에게 버팀목이 되어 줘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란델리노 영식이 아버지를 적대할 일도, 계모를 극단적으로 따를 일도 없었다.

변명하자면 벨로나 공작 각하의 고모인 칸나 백작 부인이 아이를 학대하고 조롱하고 괴롭히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방임과 방치가 전부일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란델리노는 벨로나 공작부인의 유일한 적자였으니까.

그리고 내정 업무는 그의 소관도 아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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