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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3화 (173/221)

173화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기분

응당 부모라면 자식의 미래와 가문의 미래를 외면하지 않는 법이다.

평소에 없던 용기도 생긴다.

여러 귀족이 거침이 없는 파도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다가갔다.

아까의 고요함이 거짓이라는 듯이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다.

“공작부인,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부인, 어떤 과목을 어떤 방식으로 보는지 귀띔이라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미약하게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다가오는 인파에 그 미지의 인물을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잠시 휴게실에서 쉬다가 오지요.”

“어머, 저희도 따라갈까요?”

“아니요. 저 혼. 자. 갔다가 올게요.”

자신을 따르는 무리도 연회장에 두고는 그녀는 휴게실로 갔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눈빛은 사람 하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

이번 건국제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대비와 왕비가 자신만을 위해 마련해 준 개인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조용했다.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함이었다.

한 시녀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누가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걸음이었다.

시녀는 그녀 앞에 차를 대령했다.

“목이 마르실 듯하여 차를 가져왔습니다.”

“눈치가 좋은 아이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녀가 시녀가 준 차를 받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놈은?”

“놓쳤습니다.”

입가에 닿을 뻔했던 찻잔은 닿지 못했다.

시녀의 말에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놓쳐?”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서 잡았다.

잠깐 생각에 잠긴 듯싶었다.

그 눈빛은 진지하고도 엄중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본인을 향한 자부심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사람’을 향한 자신감이었다.

그녀가 키우거나 영입한 인재들은 뛰어났다.

그 인재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설령 사람 죽이는 일도, 고문해서 정보를 모으는 일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건국제 연회장 안에 있었다는 것은 왕실의 초대를 받은 누군가를 뜻이겠지.”

“명단을 확보해서 추리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놈이 누군지 알아내라.”

건국제 연회는 왕실에서 주최하는 것이다.

이는 대비와 왕비가 건국제 연회를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명단 확보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건국제 연회는 신분이 확실하고 제대로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귀족들만 온다.

직계 혈족이 아닌 이상에는 대리인도 내세울 수 없는 연회이기도 했다.

그 ‘미지의 인물’이 누군지 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배후와 목적을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배후와 목적을 알 필요는 없어.”

“예?”

시녀는 당혹스러웠다.

참석 명단까지 얻어 낸 이유는 계획에 없던 일을 꾸민 무리와 배후를 찾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근본을 빼서 원천을 막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이 일의 배후와 목적은 너무 명확하니까. 너희는 그와 동조한 무리의 정체를 캐오거라.”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미 이 일의 배후를 알고 있었다.

그 목적도 말이다.

배후가 바로 란델리노였으니까.

여기서 그녀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은 란델리노를 돕는 무리의 정체였다.

란델리노와 루비카 남작과의 만남을 도운 것들이 분명하다.

무려 페루제 공작부인의 정보조직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는 무리였다.

연회장에서 오늘과 같은 판을 만드는 일은 일개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만드는 정보조직과는 수준이 달랐다.

진중한 주인의 모습에 시녀는 자신이 속에 담아 뒀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돈 후안의 접근도 누군가의 계획 아래에 생긴 일인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지?”

“사실, 귀족들이 자주 다니는 술집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는 했습니다.”

“어떤 소문이지?”

“돈 후안이 내기를 했는데 전부 이기고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듣지 않아도 알겠군. 지명한 여인을 유혹하면 돈 후안의 승리이고, 유혹하지 못하면 상대의 승리였겠지.”

정보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보고를 올리기에는 하찮고 천박한 소문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한 사람답게 천박한 것을 혐오했다.

그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네, 맞습니다.”

“감히 나를 내기 대상으로 삼아?”

“돈 후안과 내기를 한 상대도 잡겠습니다.”

‘신성모독죄’와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귀족들이 꽂혀서 갑자기 등장한 미지의 인물은 관심 밖으로 멀어졌으리라.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향할 때가 가장 도망가기 좋은 적기였음이다.

“나는 급한 일이 생겨서 왕궁을 나가야겠구나.”

“벨로나 공작 각하와 국왕 폐하, 그 외 왕족들께 전하겠습니다.”

시녀가 언급한 ‘그 외 왕족들’은 대비와 왕비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그들은 왕족들이었다.

국왕처럼 따로 불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국왕은 패로 쓰일 수 없는 존재였으나 그들은 언제라도 상황에 따라서 버릴 수 있는 패였다.

그녀는 휴게실을 나와서는 혼잣말했다.

“네놈이 무슨 말을 짖어댈지 한번 들어보마.”

아들이라는 놈이 자신을 더러운 내기의 대상으로 삼도록 만들었다.

최고의 교육과 대우를 해주면서 기른 아들이 어미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린 것이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살벌한 기세는 그녀의 분노가 얼마나 되는지 어렴풋이 가늠하게 해줬다.

그녀를 스친 바람이 괜히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 * *

수도의 벨로나 공작 가문의 저택을 담당하던 집사는 문 앞을 어슬렁거렸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이 저택에 소리도 소문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고용인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보낸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작이 보낸 사람들도 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부부가 저택 내부에서 세력 싸움을 하듯이 말이다.

“부부 싸움을 이렇게 무섭게 하는 부부가 어디에 있어. 이렇게 사람들이 죽게 하는 싸움을 할 것이면 수도 말고 벨로나 공작령에서 하거나!”

수상한 행적에 조사해야 마땅했으나 그러다가 집사는 자신도 ‘사라지는 고용인’ 중 하나가 될까 두려워서 입을 다물었다.

집사가 추측하기로는 사라진 고용인들은 벨로나 공작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각자가 생각하는 서로의 세작이었을 것이다.

공작 부부의 사람들로 인해서 저택의 분위기는 살벌함을 넘어서 살인 한번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런 알짜 자리가 없었는데 이렇게 바뀌다니. 사직서를 낼까?”

“그딴 고민을 할 시간에 그만 두게.”

“예?”

집사는 갑자기 열리는 문에 당혹스러워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 다리를 떨었다.

주변에 있던 시종과 시녀도 허리를 얼른 숙였다.

집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공작부인, 어찌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자네 사직은 내가 잘 받아들이지. 짐 챙겨서 내일 안에 나가게.”

페루제 공작부인은 기분이 언짢았다.

집사 따위의 불만을 끌어안고 있을 여유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우아한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닙니다.”

“그래? 앞으로 집사로 여기에 계속 있으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

“무, 무엇입니까?”

집사는 움찔거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웃으면서 죽이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사는 하필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다시 한 번 알짜 자리이니 하면서 벨로나 가문의 집사 자리를 하찮게 만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래. 알아들었다면 되었다.”

냉랭한 말투에 집사는 심장이 얼어붙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집사를 지나쳤다.

* * *

그녀가 가는 곳은 명확했다.

아들의 방이었다.

란델리노의 방 앞에서 대기 중이던 아그리피나가 그녀를 봤다.

“공작부인!”

“문 열어.”

“네.”

집사도 그렇고 아그리피나도 예상하지 못한 등장이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란델리노에게 갔기에 아그리피나의 사람이 그녀의 귀가를 알리지 못했다.

안주인을 앞장서서 목적지에 가는 고용인이라니!

얼마나 수상한가!

벌컥 열리는 문에 공부하던 란델리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이른 시간에 무슨 일…….”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짝!

“어, 어머니…….”

짝!

그녀는 아들이 다가오자마자 뺨을 세게 때렸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온 힘을 다해서 때렸는지 뺨 한쪽이 엄청 붉었다.

에레보스가 란델리노의 방 주변에 방음이 되도록 보이지 않는 막을 펼쳤다.

우아한 자신의 계약자에게 허튼 말이 들리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란델리노는 당혹스러워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 어머니!”

짝!

“어머니? 어머니! 네가 나를 어미로 생각은 했던 것이냐!”

짝!

“나를 왜 속인 것이냐!”

짝!

“나는 너에게 기회를 줬다!”

짝!

“네가 진실을 말하고 자기 위치를 지킬 기회를!”

짝!

“벨로나 공작 가문으로 부족했느냐!”

짝!

“왜 네 자리가 될 수 없는 루비로즈를 탐내는 것이냐!”

짝!

“왜 그리 추하게 굴어!”

묵묵하게 어머니에게 뺨을 막고 있던 란델리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어머니의 양어깨를 잡았다.

“어머니!”

“……?!”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커졌다.

한 번도 큰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그녀에게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순종적이던 아들이었다.

란델리노의 눈빛이 광기로 물들었다.

“내가 루비로즈를 가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너는 가질 수 없다! 너는 자격이 없으니까!”

자신의 양어깨를 잡던 아들의 손들을 내쳤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느냐는 듯이 말이다.

“아들이 부모의 것을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네가 루비로즈의 핏줄이 아닌데 어찌 그게 당연해!”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봤다.

란델리노가 뜬금없이 웃었다.

방안에 한참 그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당신의 조카는 루비로즈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남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조카는 루비로즈 핏줄과 혼인하여 가문을 가져도 되고 나는 안 되는 것입니까? 꿈속의 내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아십니까?’

란델리노는 가슴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것을 이용해야 하니까.

웃음소리가 멈추고 란델리노가 어머니를 마주했다.

우아한 ‘만들어진 미소’였다.

“제가 추하다고 하셨지요?”

“그래. 추하다.”

“나는 어머니가 기른 아들이지요?”

“그래. 그렇지만 내가 기른 아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추하구나.”

그의 만들어진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인형처럼 표정이 사라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맞을까 싶을 차가움이 얼굴에 감돌았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자신을 추하다고 여기시나 보군요.”

“뭐?”

페루제 공작부인은 인생을 살면서 추하다는 말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들어보리라 생각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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