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72화 (172/221)

172화 루비카 남작의 조건을 모두 이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능글능글한 미소와 눈빛으로 말했다.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그 가정교육이 어떻게 항상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폐하의 허락도 없이 말을 하는가.”

벨로나 공작이 경계하며 으르렁거렸다.

벨로나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 국왕까지 있는 상황에서 난입했다.

보통 배포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 이름을 들었을 것 같건만, 보았을 것만 같건만 처음이었다.

이 연회에 왔다는 것은 나름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인데도 말이다.

자신을 낮추고 숨을 죽이고 있던 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은 페루제 공작부인도 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대의 발언을 허락한 적이 없다.”

“메디치 백작께서도 폐하의 허락 없이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결 같은 웃음이 사람을 거슬리게 했다.

“나는 자격이 있고 그대는 없으니까.”

“그렇기는 하죠.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제가 벨로나 공작각하와 페루제 공작부인께 말을 걸 수 있겠습니까?”

건국제 연회는 알펜 왕국에서 힘을 쓴다는 가문들만 초대되는 연회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 사이에도 급이 있었다.

그 급은 그들 간의 교류를 막는 벽이 되기도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나 벨로나 공작, 라보 공작 등 그 격이 남다른 귀족들에게 다가갈 자격이 되는 자는 소수였다.

다수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물의 선택을 이해한 것이다.

벨로나 공작부부가 국왕을 바라봤다.

“그대의 발언을 허한다.”

“감사합니다.”

국왕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돈 후안에게서 벗어났다.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돈 후안보다 더한 관심을 받게 될 일이 벌어날지도 몰랐다.

사건을 축소하고 절충안을 만들기 유리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돈 후안은 가정교육의 부재가 만든 비극이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페루제 공작부인은 심기가 불편했다.

알펜 왕국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녀를 ‘페루제 공작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유독 이 작자는 그녀를 ‘메디치 백작’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에서도 뭔가 꺼림직하게 느껴졌다.

“메디치 백작각하, 저는 살아생전에 각하처럼 뛰어난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

“그런 각하께서 이런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것도 말이죠.”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찌푸려졌다.

과한 아부였다.

그녀는 가치가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돈 후안 같은 인간들이 그랬고 남의 집안 가정교육도 그러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메디치 백작령에 메디치아 아카데미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까?”

“뭐?”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북부의 부인들이 웅성거렸다.

동요하는 것은 당연했다.

장미회에 있는 부인들은 단 한 번도 그 아카데미에 관해 언질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당혹스러움에 잠시 멍해졌다.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라스타 왕국의 최고 인재들이 모일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알펜 왕국의 자제들이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겠지요.”

“…….”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난감한 상황이다.

메디치 백작령은 엄연히 알펜 왕국 소속이었다.

그녀가 라스타 왕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든 간에 말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 영지의 아카데미는 라스타 왕국 사람들만 받는다?

자국의 사람들은 자격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비밀리에, 조용히 아카데미 설립을 추진했다.

이제 곧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터져 버린 것이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여기서 할 말이 아니라니요?”

그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는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곳의 귀족들이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겠지만 지금은 피해야 했다.

그 순간이었다.

“나도 궁금하군. 메디치아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말이야. 그대가 상세히 말해 보게.”

“폐하, 영지 내의 일입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할 만한 일도 아니고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이 주제를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공개적으로 말할 만한 가치도 없는 일이라면 굳이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겠지.”

연회장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떤 아카데미인지 궁금했고 왜 그곳에 관해 알리지 않았는지도 의아했다.

지원자가 많을수록 그 아카데미의 가치가 올라가니까.

“그대는 계속 말해 보게.”

“감사합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조용하게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라스타 왕국이 아니라 알펜 왕국이었다.

“교사진들부터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곳의 교사가 되길래?”

“일단 단테, 바이든, 니체의 수업 커리큘럼을 다 짰다고 들었습니다.”

“단테뿐 아니라 바이든, 니체의 수업이라고!”

국왕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도 쑥덕거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단테, 바이든, 니체는 문학부터 철학까지 그 영향력이 끝이 없다고 하는 대가들이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주도하는 최고의 문학가, 철학자, 시인이었다.

그들에게 배움을 청하기 위해서는 억만금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뿐이 아닙니다. 체사레, 잔다르크도 있습니다.”

“최고의 전쟁 전략가이자 무장들이 아닌가!”

“은퇴하셨지만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분들이죠.”

페루제 공작부인의 쥔 주먹이 떨렸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 일을 밝혔는지 반드시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

메디치 백작령이 아카데미에 관심을 가져서 무슨 이익을 얻겠다고 말이다!

그녀에게 엿을 먹이겠다는 의도였다면 성공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글쎄요.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앞서 언급된 인물들이 교사진이라면 이것만으로 알펜 왕실 아카데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른 척을 하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감추기 위함이다.

“왜 그리 겸손을 떠십니까? 란델리노 백작님도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면서요?”

“……?!”

“부인께서 아끼시며 기르신 아드님이니 합격은 확정이나 다름이 없겠지요.”

그녀는 빠르게 인지했다.

루비카 남작이 란델리노에게 아카데미에 관한 정보를 넘겼음을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잘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일개 영지 내의 아카데미에 그리 관심을 쏟겠는가!

왕실 아카데미도 아닌데 말이다.

‘란델리노 네가 감히!’

감히 란델리노가 자신을 속였다.

석궁으로 위협하며 진실을 말할 기회를 줬음에도 거짓을 내뱉었다.

수치스럽게 머리를 땅에 대고 진실을 말했기에 믿었는데 말이다!

누구 덕분에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 잊은 모양이다.

심한 배신감이 가슴에 몰려왔다.

“제 아들도 입학시키고 싶은데 아직 아카데미 입학시험 공지가 나오지 않았더군요. 언제부터 시험인지 어떤 과목인지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알펜 왕국의 주요 귀족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할 말은 정해져 있는 것과 같았다.

라스타 왕국의 아이들만을 위해서 만든 아카데미라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정확한 날짜나 기준이 정해진 것은 아니라서 말하지 못했답니다.”

“역시 그랬군요. 제가 성급하게 물었습니다. 다 때가 되면 부인께서 알려 주실 것인데 말입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아니, 민망해하는 척이었다.

그는 그녀가 그들에게 메디치 백작령의 아카데미에 관해 말해 줄 생각이 없음을 잘 알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가 가식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카데미 설립과 운영은 처음이라서 일단 16세 아이들만 모집해서 시범적으로 교육을 받게 할 계획이랍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아카데미로 성과가 좋지 못하면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원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교사진부터 망하라고 저주를 퍼부어도 망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말을 흐렸으나 귀족들은 그 교사진이 진짜라고 믿었다.)

북부 귀족들이 빠르게 메디치아 아카데미의 시험 공고에 관심을 가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를 입학시험에 보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저희 아이가 마침 내년에 16살이에요.”

“어머! 저희 아이도 그래요.”

“시험 공고가 나오면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시험인지는 몰라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겠네요.”

북부의 귀족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어떤 여인인지 알았다.

얼마나 눈이 높으며 까다로운지 말이다.

그녀의 곁에 있는 부인들만 봐도 그들의 교양과 외모 등 그 수준이 보였다.

자기 사람들을 들이는 것에 깐깐한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기 영지 내의 인재 양성을 소홀히 한다?

사교계 부인들을 곁에 두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수준을 요구할 것이었다.

물론 부모에게는 최고의 아카데미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표방하는 ‘초엘리트주의’에 맞는 인재가 되기 위해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는 소식이다.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서늘해졌다.

자신이 루비로즈 가문을 위해서 만든 아카데미였다.

알펜 왕국을 위해서 만든 곳이 아니었다.

“왕실 아카데미가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그곳으로 아이들을 보내야지요. 제 아들도 왕실 아카데미로…….”

“어머어머,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그 유명한 단테, 바이든, 니체라고요!”

“체사레, 잔다르크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니요!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북부가 아닌 다른 지역의 귀족들이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감히 그녀의 말을 끊어 버리는 인간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말이다.

황당하여 그녀는 말을 잠시 잃었다.

“돌아가면 공부를 바짝 하도록 해야겠어요.”

“언제 시험 공고가 나와도 괜찮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해야지.”

벌써 어떤 귀족 부부는 아들을 반드시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입학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러한데 자신이 아끼는 아들인 란델리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벨로나 공작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귓속말했다.

“아까 전의 신성모독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군.”

“설마요.”

“저 모습들 어디에 돈 후안을 기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그의 말처럼 귀족들은 돈 후안이 저지른 일에 관해서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무려 ‘신성모독죄’라고 할 수 있는 죄인데도 말이다.

그들의 태도가 이해는 되었다.

돈 후안은 남에 불과했지만 메디치아 아카데미는 자식과 가문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이 건국제 연회에 참석한 모두의 인식에 메디치아 아카데미가 새겨졌다.

그리고 란델리노의 입학시험 도전도 말이다.

미지의 인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란델리노 백작님이 시험 공고를 받게 되면 저희도 받을 수 있겠군요.”

“같이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공부 모임을 만들도록 저희가 힘을 써보는 것도 좋지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허락한 적도 없는 입학시험을 란델리노가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로써 란델리노는 루비카 남작이 제시한 2가지를 모두 이뤘다.

라스타 왕국의 숨겨진 소드마스터의 지지를 얻은 것에 이어서 메디치아 아카데미의 입학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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