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돈 후안 (3)
후안 후작부인은 급한 마음에 라보 공작을 불렀다.
동쪽에 있는 후안 후작령은 라보 공작령 인근에 있어서 서로 교류 및 협력이 많았다.
그 관계를 생각한다면 후안 후작 가문 일가가 숨을 돌리고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라도 줘야 마땅했다.
“라보 공작님, 저희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하신다면 제발 도와주십시오.”
“으흠.”
라보 공작은 신음을 삼키며 그들을 외면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라보 공작 가문의 인장을 훔쳐서 찍어낸 ‘거짓 증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거짓 증거는 언제라도 가문을 몰락시킬 위력을 가졌다.
그때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르는 루비로즈파의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성모를 희롱한 죄는 신성모독죄입니다.”
“감히 신께서 인정한 성모를 희롱하다니요!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할 일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본보기를 보이십시오.”
“당장 감옥으로 끌고 가고 형벌을 집행할 날짜를 잡아야 합니다!”
바람둥이 난봉꾼 하나로 인해서 건국제 연회는 소란이 일어났다.
국왕이 살벌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돈 후안은 고개를 바닥에 떨궜다.
그 모습에 국왕이 한숨을 쉬었다.
라보 공작이 나설 수 없다고 해서 국왕인 자신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젊은 치기에 그런 것이오. 성모답게 자애로운 마음으로…….”
국왕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어찌 그딴 말을 하십니까!”
그녀가 목청을 높였다.
당장에라도 숨을 거둬야 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공작부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큰 죄인데 하물며 성모입니다. 성모의 권위와 명예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후작부인은 말해 보세요! 돈 후안이 용서를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아직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갑작스러운 발언 기회에 후안 후작부인은 떨면서 대답했다.
여인을 배려했던 것을 오해했던 것뿐이라던 아까의 말은 개도 믿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더는 그 주장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국왕처럼 후안 후작부인도 말을 끝내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을 끊어 버리며 화를 냈으니까.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혼인까지 하여 아내가 있는 놈입니다! 젊은 치기보다 가정을 지키는 책임감이 우선시되어야 마땅한 위치입니다! 설마 후안 후작 가문은 그런 책임감조차 없는 놈을 후계자로 정했다는 것입니까?”
“아직 부족하여 교육 중입니다.”
후안 후작부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해야 했다.
말하면서 아들을 향한 걱정을 넘어서 수치심까지 느껴졌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돈 후안 하나 때문에 욕을 먹고 있었다.
제대로 된 후계자를 두지 못한 못난 가문으로 말이다.
동시에 돈 후안을 후계자로 삼을 정도로 후계자다운 자식이 없음을 욕하고 있었다.
“후안 후작 가문은 자격도 없는 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던져 놓는군요.”
“가문은 장남이 이어 받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장남이 가문을 말아먹을 것 같으면 치워야지요!”
가문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은 치워야 한다.
가문을 위해서 살아온, 앞으로도 가문을 위해 살 페루제 루비로즈의 원칙 중 하나였다.
설령 핏줄이라고 할지라도 가문에 피해를 줄 인물이라면 처리해야 했다.
그녀는 왜 그것을 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있더라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결정은 이해를 하든, 못하든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저놈은 내가 남편이 있음을 알면서, 내가 성모임을 알면서도 치근덕거렸습니다. 살 기회를 줬음에도 찬 것은 저놈입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돈 후안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노기를 드러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연회장에 그 울림이 끝나자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이 막힐 정도로 집중하며 그들을 봤음이다.
그녀가 후안 후작부인에게 맹렬하게 다가갔다.
후작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으나 페루제 공작부인의 걸음이 더 빨랐다.
그녀는 후안 후작부인의 양어깨를 잡았다.
“내가 저것을 살려 두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말해 보세요!”
“그, 그것이 공작부인…….”
그녀의 눈에는 광기가 섞인 듯해 무서웠다.
그 광기조차 아름다워서 더 무서웠다.
후안 후작부인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저것을 살려 두면 나의 떨어진 권위와 명예는 어찌 되겠습니까? 죽이면 그나마 떨어진 권위라도 세울 수 있지만 살리면요?!”
“공작부인, 아니 성모님! 제발 제 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성모로 보일 수 있는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비를 베풀 여인이었다면 이리 큰 사단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비릿한 비웃음을 얼굴에 머금었다.
라보 공작은 약점이 잡혀서 후안 후작 가문을 도울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엮어서 라보 공작 가문을 공격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침묵을 지키던 이가 나섰다.
“폐하, 제가 말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그는 바로 벨로나 공작이었다.
아내가 희롱을 당했다고 하는데도 방관하던 그가 갑자기 나선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봤다.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라고 해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 자신을 위해서 나설 작자가 아님을 알았으니 당연했다.
“제 아내의 권위와 명예가 떨어진 것은 벨로나 공작 가문의 명예가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제까지 침묵하며 방관하시던 분이 할 말은 아니군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비아냥거렸다.
그 비아냥에도 벨로나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를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낭비라는 것을 잘 알지.”
“뭐라고요?”
“그대라면 능히 상대를 반쯤 죽이거나 죽일 것이니까 말이야.”
“풋.”
다정하게 웃으면서 벨로나 공작이 말하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걱정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의 화를 받아야 하는 상대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녀가 짜증이 나서 웃음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시선을 피했다.
“그게 아내에게 할 소리입니까?”
“남편이라고 지금이라도 나선 것이 아닌가. 이해하게.”
벨로나 공작이 어깨를 위로 올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닌가.
다정하게, 감동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네요. 제가 거의 다 처리하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난입하셨네요.”
“아내를 위한 남편에게 난입이라니 섭섭하군.”
“다음부터는 저를 위해서 좀 일찍 나서주세요.”
웃는 낯짝으로 두 사람은 살기를 뿜어냈다.
마치 전장에 있는 착각을 주는 살벌함이었다.
귀족들은 정략혼으로 전부 맺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혼은 인생의 큰 치부가 될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사이가 나쁜 부부도 이혼은 하지 않았다.
서로가 각자의 정부를 두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런 귀족들이 벨로나 공작 부부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로 파국이면 그냥 이혼하는 것이 낫지.’
‘이혼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대단하다.’
벨로나 공작은 웃음을 지우고 차가운 눈빛이 되었다.
그는 국왕을 올려다봤다.
“폐하, 돈 후안은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죄인 신성모독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죽이자는 것인가?”
국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돈 후안은 친왕파에 속한 귀족가문의 후계자다.
라보 공작이 나서기 어려운 지금, 벨로나 공작이 나서줘야 했다.
비록 언제부터인가 국왕이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었을지라도 말이다.
뛰어난 벨로나 공작이 페루제 공작부인과 대등하거나 혹은 밀리는 듯할수록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 싶었다.
벨로나 공작이 국왕의 의심을 알면 억울해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국왕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고 섭섭해 했으며 이해했다.
그리고 나름의 대비를 해야 함도 알았다.
“그러나 후안 후작부인의 말처럼 한순간의 치기로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요.”
“지금 부인을 희롱한 놈을 살려 주자고 말하는 것입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듣자 하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내가 수치를 당한 뻔했으면 그에 맞는 분노를 보여 주며 단죄해야 정당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죄인을 살려 주자고 하고 있었다.
“물론 그대가 반대하면 그는 신성모독죄에 따라 사형당해야지.”
“나의 의사에 따르겠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머리가 돌아갔다.
자신의 남편이 무언가 변해 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으나 그녀에게 호재임은 분명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는 보죠.”
“그 벌을 대신하여 대가를 받아내는 것이 어떤가 싶어서 말이야.”
“나쁘지 않군요. 폐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 난봉꾼이 후안 후작가를 말아먹는 것도 이익이었고, 후안 후작가문의 재산을 갈취하는 것도 이익이었으니까.
벨로나 공작은 돈 후안의 목숨을 살렸다.
그것은 국왕과 친왕파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죄에 맞는 대가를 받자니?
무려 신성모독죄다.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후안 후작 가문에서 내해야 한다면 가문의 기둥뿌리가 뽑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
친왕파의 힘을 약화하는 것이었으나 달리 돈 후안을 살릴 방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대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네. 그러니 왕실의 중재 아래에서 합의를 보는 것은 어떠한가?”
“기준이 명확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기준을 세우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성모독죄는 신전에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신전에서 처리하겠다는 말은 제대로 후작 가문의 재산을 거덜내겠다는 말이었다.
신전과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편이라는 사실은 워낙 유명했다.
게다가 교황은 성도를 공격한 일로 알펜 왕실에 원한이 있었다.
성도를 버리고 도망친 교황이라는 오명은 그가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따라다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관련해서는 돈 후안의 가문인 후안 후작가문과 논의를 하는 편이 맞다고 보네.”
“후안 후작 가문의 의견이 중요한 일입니까?”
죄를 저지른 이는 벌을 내릴 이의 결정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죄인의 가문이 가진 생각도 물어야 한다는 웃기는 말이었다.
국왕도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왕실에 선심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국왕의 빚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좋았다.
“뭐, 폐하의 권위를 생각하여 후안 후작과 만나고 결정을 내리죠.”
“내가 날을 잡지.”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봉합되는 듯싶었다.
예상하지 못한 등장인물만 없었다면 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가문 내부에서 하는 교육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처음 보는 인물이 벨로나 공작부부와 돈 후안, 후안 후작부인을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