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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70화 (170/221)

170화 돈 후안 (2)

입을 얌전히 다물고 있는 부인들에게서 페루제 공작부인은 시선을 뗐다.

그리고는 돈 후안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입가도 웃고 눈빛도 따스하기가 그지없었다.

돈 후안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착각할 만했다.

사실, 그녀는 돈 후안을 응징한다는 기대감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근처에 있는지 확인했다.

운이 좋게도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벨로나 공작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벨로나 공작이 이 상황을 알았다면 돈 후안의 뺨을 쳐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봐. 이제는 기대가 되니까.”

“그러면 깊은 이야기를 위해서 테라스로 가 볼까요?”

“테라스? 좋지.”

돈 후안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뤄서 만족스러워했다.

아니, 곧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테라스에서 남녀 간의 합의가 되면 정원으로 가서 육체적 대화를 나누는 것이 순서였다.

테라스에서 서로가 영 아니다 싶으면 연회장에 있고 아니면 정원으로 나가는 것이다.

즉, 돈 후안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성적 관계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과 같았다.

상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북부의 부인들은 서로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곧 죽겠죠?’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가겠지요.’

‘그동안 한 짓들이 있어서 지옥에 가겠지만 명복을 빌어줘야죠.’

그들은 돈 후안이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오직 당사자만 모르는 비극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은근슬쩍 페루제 공작부인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가 댔다.

마치 옆에서 에스코트하는 것처럼 말이다.

겉으로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허락도 없이 몸에 손을 댄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명성이 알려졌음에도 북부의 귀족들만큼 그녀에 관해 알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억은 미화가 되거나 퇴색이 된다.

그들은 몇 년 전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건국제 연회에서 저지른 일을 새기지 못했다.

그들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젊고 새로운 인물들이 건국제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말이다.

젊고 새롭다는 것은 과거를 잘 모른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 모습에 북부를 제외한 지역의 귀족들은 속닥였다.

“정숙한 척을 하더니 아니었나 보네요.”

“저 난봉꾼의 유혹에 넘어간 모양이에요.”

“듣기로는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드레스를 고르는 안목은 뛰어나지만요.”

그러니까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돈 후안과 페루제 공작부인은 테라스로 나왔다.

“그래, 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이것, 저것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요.”

그 이것, 저것에 99%는 육체적인 대화인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서로를 알고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천박한 제안을 거리낌도 없이 했다.

그녀는 돈 후안이 그동안 이런 식으로 하룻밤의 불장난을 많이 했음을 눈치 챘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랑 굳이? 그대에게는 부인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버지를 대신하여 온 것인지라 부인은 저택에 있고 여기에는 어머니가 있으시죠.”

돈 후안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까는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안아 보려는 심보로 보였다.

“외로운 저를 달래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연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인께서 제 마음의 허전함을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유혹적인 말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영애는 넘어갈 것 같은 우수에 젖은 눈빛이었다.

그의 얼굴이 그녀와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접근하면 입맞춤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녀가 자신의 부채로 입가를 막았다.

도대체 이런 놈에게 넘어가는 여인들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후작 가문의 후계자 나부랭이의 외로움을 달래 줘야 할 처지로 떨어지다니 충격이야.”

“네?”

그들 사이를 막았던 부채를 치웠다.

누구보다 호의적이었던 눈빛은 차가운 얼음처럼 얼어 있었다.

입가의 웃음도 사라져서 굳어졌다.

그녀의 심기가 아주 불편하다 못해서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개자식을 끌고 나와라.”

“알겠습니다.”

“뭐?”

돈 후안은 낯선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는 언제부터 테라스에 있었는지도 모를 누군가가 있었다.

왕실 기사가 아니지만 기사의 정복을 입은 누군가였다.

“감히 무장을 한 기사가 여기에 있다니!”

“닥치거라.”

“으악!”

그 기사는 돈 후안의 다리를 오러를 담아서 찼다.

미약하게 담긴 오러였으나 돈 후안의 한쪽 다리는 부러졌다.

그는 무참하게 머리를 잡혀서는 연회장에 들어갔다.

“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귀족들이 당황스러웠다.

그 중 일부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첫 건국제 참석 때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잊고 있던 충격이 다시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돈 후안은 국왕의 앞에 던져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국왕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국왕이 인정한 공식 정부를 무자비하게 쫓아내며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린 사건은 가슴 속의 분노로 남아 있었다.

왕궁은 왕의 거하는 곳이다.

왕실 소속이 아닌 기사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정 수 이상은 들어올 수 없다.

왕을 해할 반역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제 연회는 더욱 그러했다.

모든 영향력 있는 귀족이 모이는 자리다.

군사 한 번 일으켜서 이 연회장을 장악하면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건국제 연회에는 왕실에 그 어떤 가문의 기사들도 들어올 수 없다.

“그대의 입장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이곳에 있는 것을 허락했거늘! 감히 이런 짓을 해?!”

“그들이 이곳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법적으로나, 선례로 보나 말입니다.”

“이렇게 귀족을 괴롭히라고 법이 허락하고 선례가 있는 줄 아는가!”

“성기사단은 성모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검을 소지하고 건국제 연회에 올 수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성기사단이다.

성기사단은 신전에서 양성한 기사단이었다.

성녀나 성모를 보필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은 건국제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교황이 임명하는 일반적인 성모나 성녀와 달랐다.

성물의 선택.

즉, 신의 선택을 받은 성모였다.

그 권위가 교황에 동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쩐지 조용히 넘어간다 싶었다.’

벨로나 공작은 믿어지지 않는 모습에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누가 남의 가문 후계자를 저따위로 수치를 줄 것이라 상상했겠는가.

그렇다고 나서자니 찜찜했다.

그의 아내는 명목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았으니까.

괜히 나섰다가 낭패를 볼 확률이 높았다.

“그가 그대를 해치려고 했다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서 일어날 수 없는 돈 후안은 상체라도 들었다.

그리고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아니지! 그대는 나를 해치려고 했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당당했다.

돈 후안의 말에 잠시의 틈도 주지 않았다.

“폐하, 성모이자,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자, 메디치 백작인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했습니다. 나아가서 나의 가문인 루비로즈 가문의 품격을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감히 혼인을 한 자가 나와 몸을 섞고 싶다고 하더군요.”

“헉!”

“감히 저따위 녀석이 나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달라고 했습니다. 나의 허락도 없이 나의 몸에 손을 댄 것으로 부족해서 말입니다.”

귀족들이 깜짝 놀랐다.

유부녀와 놀아나는 영식이나 가주가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상대는 ‘성모’였다.

성모를 상대로 그런 천박한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고 성물의 선택을 받은 성모에게 말이다.

이는 신을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신성모욕죄로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었다.

돈 후안이 살 길은 하나였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뭔가 저희 아들이 오해할 만한 언행을 한 듯합니다. 오해를 풀고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들이 친 사고에 후안 후작부인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러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성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성기사는 빠르게 검을 뽑았다.

곧 연회장에 비명이 울렸다.

“으아아아!”

“공작부인!”

돈 후안의 손 하나에 검을 찔린 것이다.

후안 후작부인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사소한 오해로 생긴 일에 이리 나오시다니요!”

“사소한 오해?”

“제 아들은 여인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여 있는데 그 배려의 결과가 이것이라니요! 어찌 그리 매정하고 차가우십니까!”

후작부인은 아들을 두둔하며 페루제 공작부인을 몰아세웠다.

그것은 실책이었다.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잘 알았다.

돈 후안는 바람둥이라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그가 여인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룻밤 잠자리 상대로 접근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대가 생각하는 배려는 여인과 잠자리를 하는데 적극적인 것인가 보지?”

“오해라지 않습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비아냥거렸다.

후작부인은 아들의 편이 되는데 적극적이었다.

예상하건대 후작부인이 아니라 후작이 있었어도 반응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잠시’ 밖에 나돌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부모의 잘못된 가치관이 아들을 망치게 된 것이다.

“그대들은 오라.”

“네!”

아까 돈 후안이 접근하는 것을 지켜본 북부의 부인들이 앞에 나섰다.

“그대들은 폐하 앞에서 거짓 없이 본 것을 말하라!”

그 외침은 그 어떤 이도 끼어들 수 없게 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오죽하면 국왕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지켜만 보았겠는가.

물론 돈 후안이 평소에 천박하게 군 것도 한몫했다.

그의 편을 들어봤자 그녀에게 밀릴 것이 뻔했음이다.

명령에 따라 북부의 부인들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허락도 없이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습니다.”

“남녀 단둘이서 테라스로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솔직히 여기에 그 의미를 모르는 귀족은 없을 것입니다.”

“돈 후안의 행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강경한 증언들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국왕에게 말했다.

“폐하, 제 명예와 권위를 더럽히려고 한 죄인입니다. 그냥 둘 것은 아니시지요?”

“그녀는 성모다. 그런 그녀를 희롱한 것은 크나큰 죄지.”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아들을 이 부당함에서 구해주십시오.”

돈 후안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뻔히 보인다.

같은 편이라고 돈 후안을 옹호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성모’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다.

이를 그대로 둔다면 민심이 흔들릴 것이다.

그녀는 귀족들에게는 과하게 엄격했으나 평민들에게는 이상하게 이미지가 좋았다.

후안 후작부인은 자신과 아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챘다.

돈 후안도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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