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69화 (169/221)

169화 돈 후안 (1)

왕실이 주최하는 건국제 파티에 초대된 귀족들은 알펜 왕국 내에서 영향력이 센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문의 힘, 자금력까지 모두 갖춘 가문의 사람들이니 얼마나 자존심이 셀까?

그곳에서는 서로가 최고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도 했다.

이곳에서 눈에 띄어서 사교계의 꽃이라도 되어 볼까 하는 영애들이 있었을 수 있다.

또는 사교계의 지지 세력을 높이려고 하는 부인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이곳의 분위기를 주도하여 귀족 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고 싶은 영식 혹은 가주가 있었을 수 있다.

‘있었을 수 있다’는 가정의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올해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어떤 의상으로 오실까요?”

“저도 너무 궁금해요.”

“그분이 입으시는 것은 정말 하나같이 아름답고 완벽해요.”

“작년에 사자를 형상화한 팔찌와 붉은 갈퀴를 떠올리게 하는 드레스는 최고였죠.”

영애 중에는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보다 눈에 띄어서 ‘사교계의 꽃’이 될 인물이 말이다.

부인 중에도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처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지지 세력을 넓힐 만한 인물이 말이다.

오히려 자신을 밀어주는 부인들을 빼앗기지 않으면 다행이다.

귀족 가문의 가주 혹은 그 가문의 영식 중에도 없었다.

누구도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할 만한 배짱과 추진력 그리고 오만함을 지니지 않았다.

몇 년 전 국왕의 정부를 쫓아낸 사건은 지금도 회자가 되는 사건이었다.

파격적인 의상부터 건국제의 주도권까지 한 여인이 쥐고 흔들었다.

그때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으며 만약 벌어진다면 그것은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 벌어질 것이다.

그 누구도 페루제 공작부인을 대적하거나 대체할 수 없었다.

“아니, 저 부인을 왜 어깨랑 가슴을 다 감췄대요?”

“그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매독요?!”

“성병이기는 하지만 찜찜하게 여기에 왜 왔대요.”

“그러니까요. 알아서 불참한다고 했어야지. 쯧.”

페루제 공작부인의 첫 건국제 참석은 많은 것을 바꿨다.

매독이라는 전염병이 성병이라는 것과 그로 인한 증상들은 잘 알려지게 했다.

모두가 정숙을 최고라 여기며 온몸을 가리던 풍조를 한순간에 바꿔 버렸다.

귀부인들뿐 아니라 영애들도 어깨를 드러내는 것을 당연시했다.

귀족들은 대화하던 중에 멈췄다.

“벨로나 공작 각하와 벨로나 공작부인이기도 한 메디치 백작 각하가 도착하였습니다.”

시종이 말하고는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부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모습을 하나는 확신했다.

“역시 페루제 공작부인이에요.”

“어떻게 저런 드레스를 생각했을까요?”

“너무 예뻐요.”

올해의 건국제도 주인공은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건국제에 참석한 미혼, 기혼 여성들은 전부 그리 생각했다.

그녀의 상체 부분은 그 어떤 장식도 없이 깔끔했다.

너무 깔끔해서 밋밋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레스의 하체 부분은 겹겹이 쌓은 밀푀유 케이크를 떠올리게 했는데 굉장한 볼륨감이 있었다.

하체의 볼륨감을 부각하기 위해서 상체는 일부러 장식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원하는 드레스였다.

게다가 드레스의 상체 부분에 장식이 없으나, 아름다운 목걸이와 귀걸이로 시선을 그 위로 향하게 해줬다.

이 건국제 이후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드레스가 유행할 것은 자명했다.

이미 알펜 왕국에서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신은 하이힐은 귀족 여인들의 필수가 되었다.

10대 중반의 아들이 있는 부인으로 보기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몸매는 아름다웠다.

웬만한 영애들보다도 좋았다.

그 정도로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노력도 없이 얻어질 수 있는 몸매가 아니었으니까.

벨로나 공작 부부는 국왕과 왕비 앞에 섰다.

“폐하와 왕비마마께 인사드립니다.”

“메디치 백작이자 벨로나 공작의 아내인 페루제가 인사드립니다.”

벨로나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이 인사를 마치자 국왕과 왕비가 인사에 답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그래요. 편히 이 건국제를 즐기도록 해요.”

왕비는 누구보다 호의적인 웃음으로 폐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국왕은 겉으로는 친근한 척했으나 속으로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머리를 휘어잡고 던지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벨로나 공작 부부도 건국제를 즐길 시간이었다.

보통 부부 사이에 춤 한 번은 추는 것이 도리였으나 그들은 달랐다.

바로 양쪽으로 갈라져서 걸어갔다.

부부간의 사이가 나빠도 건국제에서는 좋은 척을 할만도 하건만 그들은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좋은 척한다고 해도 누가 믿어 줄까?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벨로나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이 갈라지자 그들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각자를 따르는 무리였다.

“부인,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맞습니다. 할 일도, 드릴 말도 많은데 너무 벨로나 영지에만 계십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르는 이들이 그녀 앞으로 가서 조잘거렸다.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새끼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가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지요. 안주인이 밖으로 나돌아다니면 손가락질 받지 않겠습니까?”

“어허! 나랏일을 하는데 공작 각하께서 이해해 주셔야지요.”

“맞습니다. 공작부인께서는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한 영지의 주인이 아닙니까.”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자기 부인들이 자신처럼 굴면 목소리 높이며 반대할 것들이 자신이 그러는 것은 괜찮다는 하는 것이 웃겼다.

그녀는 굳이 그들을 비웃거나 비꼬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과 편리를 위해 움직였으니까.

알펜 왕국의 정치적 파벌은 넷이었다.

하나는 라보 공작과 벨로나 공작이 함께하는 친왕파, 파필리오 공작을 중심으로 뭉친 반왕파, 반왕파와 친왕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중도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르는 루비로즈파가 있었다.

자신이 속했던 파벌에서 나온 귀족들이 루비로즈파를 이뤘다.

반왕파에서도, 중도파에서도, 심지어 친왕파에서도 귀족들의 이탈이 있었다.

루비로즈파는 다른 파벌들에서 보면 박쥐같은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루비로즈파를 바라보던 다른 파벌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말했다.

“저 뻔뻔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기서 저러고 싶나 싶어요.”

“저라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조용히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언제든 자신이 속한 곳을 배신할 수 있는 이들이 루비로즈파의 귀족들이었다.

다른 파벌의 귀족들이 그들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원래 각자가 다른 파벌의 귀족들을 욕했다.

루비로즈파만 아니라 다른 파벌도 욕했으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하게 건국제가 지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루비로즈파의 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이제 북부 부인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이런 드레스는 어떻게 생각을 하셨나요? 정말 대단하세요.”

“이번 건국제의 주인공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니겠어요.”

“그리 과하게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날아가는 것을 넘어서 민망하네.”

그녀는 겸손이 아닌 겸손을 하며 좋은 기분을 드러냈다.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주세요.”

“그럼요. 누구라도 이 건국제 연회의 주인공은 부인이라고 생각할 것이에요. 그죠?”

“맞아요. 부인이 아니면 누가 주인공이 되겠어요.”

이에 북부의 부인들이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려고 신나게 노력했다.

북부로 돌아가면 얻어질 사교계의 권력을 위해서 분발하는 것이다.

“부인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계십니까?”

허락받지 않은 누군가의 난입이었다.

북부의 부인들은 그 상대를 쳐다봤다.

준수하게 생긴 사내가 하나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모습은 괜찮았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가치도 없는 것 같은 놈에게는 자신에게 올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그대는 누구지?”

“제 이름은 돈 후안입니다. 아름다운 부인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돈 후안 자작. 아버지 대신에 온 모양이군요.”

그의 이름은 돈 후안.

후안 후작 가문의 후계자였다.

가주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함께 건국제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예우 경칭에 따라 돈 후안을 자작으로 불렀다.

예우 경칭이란 부모의 작위보다 낮은 작위를 예우 상 붙여 주는 것이었다.

“나보다 늦게 온 것 같지 않은데, 나를 모른다니 놀라워.”

“남에게 듣는 것보다 직접 이름을 듣는 것이 더 가치가 있겠죠.”

“뭐, 그렇다면야… 페루제 공작부인이라고 부르게.”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을 잡아서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행동에 미처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다른 부인들이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돈 후안 자작님. 저기 아리따운 여인들에게 가 보시지요.”

“맞아요. 저희는 부인과 해야 할 말들이 있어서요.”

돈 후안은 능력이 좋고 준수하며 사교성이 좋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다.

그런 것을 뒤로하고 가장 유명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소문난 바람둥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과 하룻밤을 자기 위해서 얼마나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지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귀족 영애만 아니라 다른 계급의 여인들까지 하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 악명에도 자신만은 다를 것이라며 당하는 여인들이 속출했지만 말이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부인들에게 그만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미소로 돈 후안을 마주했다.

“그대는 내가 유부녀인 것을 알고 다가온 건가?”

“남편이 있다고 해서 마음속의 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허함이 있었군.”

“자신을 속이고 계시군요. 제가 그 허함을 깨우쳐드리고 채워드리지요.”

그리고 슬프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함을 좋아하고 천박함을 혐오했다.

그녀에게 돈 후안은 천박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도 쓰레기였으니 틀린 평가는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내가 유부녀인지 알면서도 이러다니… 신선해. 성모인 것도 알고 있겠지?”

“성모도 사람이고 여인이지요.”

느끼한 눈빛과 말투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심기가 좋지 못하다는 징조였다.

“아이고 부인, 철이 없는 영식이지요.”

“네, 어른이신 부인께서 이해해 주세요.”

북부의 부인들이 사람 하나를 살리겠다며 나섰다.

꼴을 보니까 곧 죽기 직전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성격에 오늘을 넘기기까지 참지 않을 듯싶었다.

그녀의 시선이 부인들에게 향했다.

“부인들, 나는 같은 명령을 2번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알잖아.”

“죄송합니다.”

북부의 부인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솔직히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가락을 들었을 때부터 그들은 계속 침묵해야 했었다.

급한 마음에 명령을 어긴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귀해도 자기 안위나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았다.

괜히 여기서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북부로 돌아갈 때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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