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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68화 (168/221)

168화 왕비의 의존증

벨로나 공작이 잠시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을 줬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렇게 부부 간에 신뢰가 없어서야… 섭섭하군요.”

“그 동안 그대가 저지른 일들을 떠올려 봐.”

“흐음, 뭐 어쩔 수 없죠.”

그녀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옅은 웃음을 지었다.

상대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벨로나 공작은 엘리사와 페루제 공작부인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판이다.

수도에 함께 가는 것을 엘리사와 페루제 공작부인이 함께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아니 된다.

벨로나 공작이 곁에서 엘리사를 지켜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했다.

물론 엘리사가 페루제 공작부인 없는 틈에 성안에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놓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부인을 못 믿어서 벨로나 공작이 따로 고용한 시종들과 시녀들도 있었고 말이다.

일반적인 부부 사정이었다면 좋은 결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인 부부가 아니지 않는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들이 하찮은 정부 따위의 사람이 될 리가 없었다.

또한 공작의 사람들에 속하는 고용인들만으로 다수의 공작부인을 따르는 고용인들의 위협에서 엘리사를 지켜 주기 어려웠다.

특히 페루제 공작부인의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그 능력과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인물들인 것이다.

“이제 할 말도 다 했으니 끝내야겠군요. 스트레이트 플러시(Straight Flush).”

그녀가 패를 드러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숫자가 이어지고 무늬가 같은 카드 5장이 모인 경우였다.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이뤄질 확률이 0.1% 이하인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요. 그 어떤 경쟁도요. 그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적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 버렸다.

“정말 즐겁게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정부이신 이모님.”

란델리노는 아버지와 엘리사에게 인사하며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라 나갔다.

둘만 남은 방은 정적만 가득했다.

* * *

다시 건국제가 다가왔다.

그들은 준비를 했고 알펜 왕국의 수도로 향했으며 도착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궁으로 갔다.

대비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고 그녀를 안았다.

“어서 오게. 내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렸는지 아는가?”

“대비마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그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 그대는 잘 지냈는가?”

“저는 잘 지냈습니다. 못 지낼 이유도 없었고요.”

“천한 소문이 나돌고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천한 소문이란 벨로나 공작이 2명의 정부를 성안에 들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 하나를 개 취급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답니다. 흥미진진한 광경을 봤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대비는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정치 파트너가 심기불편해하면 대비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 대비의 힘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지원이 없다면 어려울 일이었다.

그녀의 자금력과 지지 세력이 밀어 줬기에 중앙 정치에 쉽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고 있나요?”

“그럼! 내가 그 즐거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대비는 매일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직접 국왕을 찾아갔다.

‘어머니’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국왕을 한껏 낮추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그것을 정책이라고 하려는 것입니까? 여인에 지나지 않는 나도 그것은 아님을 압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어미로 드리는 말입니다.”

“아무리 천한 피가 있다고 해도 선왕의 자식인데 어찌 이러십니까? 이 어미의 마음이 아픕니다.”

“이 어미가 직접 아들을 만나러 가야겠습니까?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다니 누구에게 뭘 배웠는지 모르겠군요. 이제부터라도 하나하나 알려드리지요.”

아들을 걱정하는 척,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척하면서 국왕을 깎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대비 덕분에 국왕이 매일 엄청 찬물을 입에 들이붓고 있다고 한다.

대비는 가슴 안이 시원하니 예전보다 젊어진 느낌이 들었다.

* * *

대비와의 만남을 끝내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비궁으로 향했다.

왕비도 대비처럼 그녀를 환대했다.

그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을 왕비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얼마나 그대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몰라.”

“저도 왕비마마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괜찮나?”

“정말 큰일이었다면 이리 오지 못했을 것이에요.”

“그러면 다행이야.”

대비와 왕비의 반응이 판박이었다.

모녀지간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대비나 왕비가 공작이 정부와 사생아들을 성안에 들인 것을 엄청난 일이라는 듯이 굴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당신들이 그래서 큰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찮은 일 하나에 일일이 안절부절못하면 어찌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티가 나지 않게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그런 일은 없으신가요?”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런 증상들도 점점 사라졌지.”

왕비의 말은 진실이었다.

국왕은 전보다 정부를 덜 궁에 들였고 아내를 대하는 것도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존중을 받는다는 느낌은 언제 느껴도 좋았다.

그렇지만 대비와 달리 왕비의 표정은 어둠이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가 이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역시 그대를 속이지는 못하겠군.”

왕비가 씁쓸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궁 안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만 알았으니까.

가족조차 모를 마음을 타인이 안다는 것은 참으로 슬펐다.

“요즘 태자가 자꾸 나를 적대시해.”

“자식으로 어찌 어미를 적대한단 말입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의아해했다.

그녀 자신은 어머니를 적대한 적이 없었고, 그녀의 아들인 란델리노도 그녀를 적대한 적이 없었다.

왕궁 내정을 잘 이끄는 왕비를 태자가 싫어하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태자는 의붓아들도 아니고 왕비의 친자식이기도 했고 말이다.

알펜 왕국의 왕자들은 3명으로 모두 왕비의 자식이었다.

“태자의 어미이며 아바마마의 부인으로 어찌 아바마마가 아니라 간악한 여인의 편을 드냐며…….”

“태자께는 제가 간악한 여인인 모양이군요.”

“내가 괜한 말을 했군. 설마 진심이겠는가?”

왕비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페루제 공작부인을 마음 편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과한 말이었다.

태자가 ‘간악한 여인’이라고 자신을 칭했음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닙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유독 폐하를 닮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폐하를 닮아?”

“쏙 빼어 닮았지요.”

“분명히 폐하 같은 분이 되실 것입니다.”

웃긴 대화였다.

왕비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을 태자가 폐하와 같은 왕이 될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페루제의 말 어디에도 태자가 왕이 된다는 말은 없었음에도 말이다.

“태자가 그대를 싫어하는데 괜찮은가?”

“오해는 풀면 되어서 걱정이 되지 않아요. 단지 걱정되는 것은 하나 있을 뿐이지요.”

“그 걱정이 무엇인데?”

“왕비마마입니다.”

“내가?”

“그것이…….”

페루제 공작부인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왕비는 조바심이 났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허튼 말을 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진짜로 왕비인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기에 꺼낸 말인 것이다.

도대체 자신과 관련된 어떤 걱정을 하는지 듣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태자 전하께서 훗날 왕위를 잇고 폐하처럼 왕비마마를 대할까 싶어서요.”

“설, 설마 그럴 리가…….”

왕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태자는 아들이니 남편인 국왕이 자신에게 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믿었다.

“역시 그렇겠지요? 아내와 어머니는 다르니까요.”

“그럼. 이번에는 자네가 과했어.”

“제가 괜한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 건국제 날에 뵙지요.”

“그날을 기대하겠네.”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비궁을 벗어났다.

그 왕비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집무실 안을 돌아다녔다.

손톱 하나를 깨물면서 말이다.

어렸을 때 있었던 과거의 버릇이 과하게 불안하면 다시 나왔다.

“공작부인의 말처럼 되면 어쩌지? 아들이라는 놈이 제 아비를 닮아서 나를 홀대하면? 왕도 아닌 태자인 지금도 그러잖아.”

“아무리 폐하를 닮으셨다 한들 태자 전하께서 그러시겠습니까? 진정하시지요.”

측근 시녀 하나가 왕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다정한 손짓으로 왕비를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시녀의 손길에 순순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럴까? 그렇겠지. 태자는 아들이고 나는 어미잖아.”

“그럼요. 폐하를 닮은 태자께서 얼마나 왕비마마께 잘하시겠습니까.”

“폐하를 닮았으니까?”

왕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알펜 왕국의 국왕은 정부가 낳은 사생아가 왕실에 입적이 되어서 왕이 된 경우였다.

못된 인성으로 손가락질을 당하던 정부가 갑자기 죽자, 자신의 방해가 되는 어미를 국왕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금방 사그라든 소문이지만 왕비는 기억하고 있었다.

측근 시녀가 당혹스러워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아니야. 괘념치 말게.”

국왕의 친모가 죽은 사건은 오래 전의 일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굳건히 마마를 지켜주시니 걱정하실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마음이 덜 불편해.”

측근 시녀의 말에 왕비는 자신의 곁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있었기에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게.”

“알겠습니다.”

왕비는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시녀를 밖으로 보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 * *

왕비의 측근 시녀가 왕비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일부러 시종들과 시녀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향했다.

많은 이들이 지나가던 중 한 시종이 지나가자 그녀가 입을 작게 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께 왕비가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과거에 왕궁의 시종, 시녀들을 물갈이할 때에 왕비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추천한 인물들로 궁 안을 채워 넣었다.

고로 왕궁에서 일하는 상당수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왕비의 측근 시녀조차 그러한 형국이었으니 말은 다한 것이다.

국왕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싫어할 이유는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 * *

드디어 건국제가 도래했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이,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건국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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