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스트레이트 플러시
“당신의 결정이 정말 의외였어요.”
“무슨 결정을 말하는 것이지?”
“당신의 정부를 바로 데리고 나가지 않은 것이요.”
벨로나 공작이 코웃음 쳤다.
상대가 어찌 나올지 아는데,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신 성격에 엘리사를 그대로 뒀을 리가 없잖아. 마녀의혹자 명단에 넣었겠지.”
“역시 부부라서 그런지 저에 대해 잘 아네요.”
마녀의혹자란 마녀는 아니지만 마녀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마녀의혹자 명단에 이름이 적인 인물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마녀로 지정되어서 잡혀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녀라고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당하리라.
“이미 그것으로 여러 부인들 목숨을 쥐고 있잖아.”
“마녀로 의심이 되는 부인들이 그만큼 많았던 것뿐이에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가신 가문의 부인들을 마녀의혹자 명단에 집어넣은 전력이 있었다.
그들의 목숨줄을 쥐고 좌지우지하면서 사교계의 절대권력자가 될 기반을 마련했다.
엘리사는 그들의 대화를 들고 말했다.
“만약 제가 성이나 영지를 벗어났다면 어떻게 하시려고 했나요?”
“아? 아! 그래 당사자 일인데 궁금할 수 있지. 하도 입을 다물고 있길래 있는지도 몰랐네.”
“그대!”
“알았어요. 당신의 사랑은 그만 건들게요.”
남편의 짜증을 시원하게 넘겼다.
그녀는 카드 패를 보는데 집중하고 싶었다.
운에 좌우되는 게임일지라도 지기 싫었으니까.
“엘리사, 네가 성을 나가거나 벨로나 공작령을 나갔으면 나는 너를 마녀로 지정했을 거야.”
마녀의혹자에서 마녀로 확정이 되면 엘리사는 신관들에게 끌려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들인 헤레스는 마녀의 아들로 낙인이 찍혀서 신전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란델리노, 네가 참으로 큰일을 해냈어. 저들을 나에게 데려왔잖니?”
“제가 이 가문의 유일한 아들인 덕분이죠.”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의 말에 벨로나 공작이 혀를 찼다.
그도 엘리사와 헤레스를 기사들이 넘겨줄 수밖에 없던 상황을 잘 이해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유일한 법적 아들인 것을 이용하니까 좋았느냐?”
“네, 너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비꼼을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란델리노는 벨로나 가문의 유일한 적자다.
귀족 가문의 가주가 부재 혹은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태일 시에는 명령우선권을 가지는 순서는 가주의 부인과 그의 자식이다.
자식이 성인이면 자식이 1순위이고 자신이 어리면 가주의 부인이 1순위가 된다.
아무리 가주의 명령이 우선이라고 해도 가문의 적자를 해치면서 이루는 것은 무리였다.
그 적자가 반역 혹은 그에 준하는 죄를 진 것이 아닌 이상에 말이다.
그런데 고작 ‘사생아’와 ‘정부’를 지키는 과정에서 적자를 다치게 한다?
미래의 가주가 될지 모를 인물에게 칼을 댄다?
오직 그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적자에게?
그것도 기사들의 동행 하에 말이다.
란델리노가 그들 앞에 선 순간에 대세는 기울어진 것과 같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란델리노가 다쳤다면 페루제 공작부인은 적자를 해치려고 한 죄를 물으려고 했을 것이다.
‘사생아와 정부’의 안위와 ‘공작 가문의 적자’의 안위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 그거 하나인데 잘 써먹어야지요.”
“정말 잘 자랐죠?”
페루제 공작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는 아들을 향한 자부심이 있었다.
네가 외면하고 망가뜨렸던 아이를 이렇게 성장하도록 도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붓아들이랑 계모랑 참으로 잘 맞는군. 친모자지간도 아닌데 말이야.”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해서 가족인가요? 핏줄인 아들도 버리려는 아버지도 있는데 말이에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비아냥을 비아냥으로 응수했다.
벨로나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부모가 부모다워야 자식이 따르는 법이죠.”
“…….”
그는 잠시 침묵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해야 자식은 진심으로 부모를 따른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아이가 자랄 수 있도록 무엇이든 제공해야 한다.
그 성장이 신체적인 성장이든, 지적인 성장이든간에 말이다.
부모로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켜줘야 한다.
부모답게 사랑을 줘야 한다.
부모는 친구가 아니다.
부모로 아이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사랑을 줘야 한다.
부모로 자식을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알려 주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해야 진짜 부모인 것이다.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적인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진짜 부모가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벨로나 공작은 아버지의 자격이 없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솔직히 애매했지만 벨로나 공작보다는 나았다.
애매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녀의 애정과 교육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벨로나 공작이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란델리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란델리노의 카드 중 하나를 가져갔다.
오직 엘리사만이 그를 바라봤다.
“공작 각하의 어깨에 진 짐들을 모르시면서 그리 말씀을 하시나요?”
“하?”
엘리사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두려움을 참고 나섰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
지금 본부인을 앞에 두고 정부 따위가 부인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분도 아픔 마음을 참고 해야 할 일을 하신 것이에요.”
“아들을 학대 속에 둔 것이 무슨 거창한 목적이 있다고?”
“그건!”
“내 남편이 셀 수 없는 많은 책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책무에 너희 일을 슬쩍 끼워 넣으면 아니 될 일이지.”
“풋!”
란델리노가 자식도 모르게 웃음을 뱉어 냈다.
조카이자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가 낸 비웃음에 엘리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찌푸렸다.
“란델리노, 아무리 가족 간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죄송합니다. 품위가 없었지요. 조심하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엘리사는 비웃음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아들의 비웃음이 경박해 보여서 불만이었다.
귀족적인 태도는 언제 어디서든 유지가 되어야 한다.
설령 가족 앞이라고 하더라고 말이다.
다들 순서대로 옆 사람의 카드를 하나씩 뽑았다.
“제가 사랑의 방해물이었지 않습니까? 얼마나 제가 꺼지기를 원했겠어요.”
“헛꿈이었지.”
“이제 그만하지.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닌가.”
듣자 듣자 하니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공작이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살기 정도는 꺼내야 말을 들을 인물들이었으니까.
좋게 말해서 따른 적이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엘리사가 이곳을 나가는 순간에 마녀로 낙인이 찍힐 거예요. 아이도 신전에서 데려가겠죠.”
“가문도 잃은 불쌍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벨로나 공작에게 엘리사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불쌍한 여인이었다.
고귀한 가문의 여식이었다가 한순간에 평민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것이 얼마나 충격이고 상처였겠는가.
귀족이기에 그 절망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평민이 되어 버려서 적응하느라 몸도 마음도 고생했어.”
“공작님…….”
엘리사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벨로나 공작에게 감동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에 그녀는 본처 앞에서 더러운 모습을 잘도 보인다고 생각했다.
“꺄아!”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녀가 일어나더니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조몰락거리며 만졌다.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만졌다.
엘리사가 보던 카드들이 떨어졌다.
아내의 행동에 공작이 소리쳤다.
그런데도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
결국 공작이 억지로 손을 떼어 냈다.
그녀는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손이 곱구나.”
“예?”
“평민으로 강등되어서 고생했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것이 각하께서 ‘조금’ 도와주셨어요.”
조금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녀는 엘리사의 손을 보고 알아챘다.
그녀가 평민으로 떨어지자마자 벨로나 공작이 도왔음이다.
귀족의 입장에서 ‘조금’이지 평민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도움이었다.
“고생했다는 당신의 말이 거짓임을 잘 알았어요.”
“손이 곱다고 고생하지 않았다니, 무슨 논리야.”
“평민들의 손을 제대로 보기는 했나요?”
보통의 평민들은 일을 하느라 손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 일이 요리사라면 요리로, 옷 수선사라면 바느질로, 농부였다면 농사로, 짐꾼이었다면 짐을 나르느라 그리 되었을 것이다.
엘리사의 손은 귀족 영애의 손처럼 부드러웠다.
엘리사는 벨로나 공작 덕분에 그런 고생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불쌍하기로 따지면 남편과 바람난 동생 때문에 자결한 여인이 더 불쌍하죠.”
“선대 공작께서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제가 벨로나 공작부인이 되었을 것이에요.”
엘리사는 주장했다.
자신은 언니의 남편을 빼앗고 자리까지 탐한 여인이 아니다.
자신의 언니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언니는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으면서 혼인을 받아들였다.
엘리사는 자신의 언니가 롬제국의 재림을 목적으로 혼인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 비밀 조직에 관한 것도 말이다.
란델리노는 한심하게 자신의 이모를 봤다.
오죽하면 가족들이 저 여인에게만 그 비밀을 알려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자신의 이모는 무능해서 살아남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가 하면 진실한 사랑이고 남이 하면 간통이라 부르지. 원래 간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야.”
“그대가 인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지만 선을 지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하지 못하다니 서글프군요. 그러나 남편의 뜻을 존중해야겠죠.”
엘리사의 카드들이 다 보이면서 떨어졌기에 다시 포커게임을 시작해야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 한숨에는 내가 이딴 것들과 관련하여 입을 열어야 한다는 짜증이 있었다.
“마녀의혹자에게 그녀를 꺼내줄 수는 없어요. 대신에 당신 곁에 두고 있게 해줄게요. 그리고 헤레스의 배움도 방해하지 않을게요.”
“큰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리고 어린 아이의 교육을 방해할 생각이 드나? 양심은 어디에 있지?”
벨로나 공작이 그녀를 노려봤다.
이미 엘리사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언제든 끌고 가서 죽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크게 양보했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솔직히 아이나 저것이나 둘 다 죽이고 싶어요. 그렇지만 당신을 생각해서 살려 두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요.”
“진정으로 남편을 위하는 아내의 모습이에요. 어머니.”
그녀가 뿜어낸 살기는 진짜였다.
아까 당당하게 자신들의 사랑을 어필하던 엘리사는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벨로나 공작이 기세를 뿜어서 엘리사를 보호했다.
그제야 엘리사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란델리노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치켜세워 줬다.
그녀는 아들의 아부가 나쁘지 않았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번 건국제에 엘리사와 헤레스를 수도로 데려가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