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불청객
란델리노는 란셀의 다짐을 받고는 즐겁게 방으로 돌아왔다.
피나가 그런 그에게 다가왔다.
“란셀 영식에게 갔다가 오시는 것입니까?”
“그래.”
콧노래까지 부르며 말했다.
그녀는 란델리노가 사생아를 만나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나가 계속 궁금해 하던 것을 물어봤다.
“왜 그런 사생아에게 신경을 쓰십니까?”
“사생아에게 호의적이라서 신기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관계니까요.”
천박한 사생아를 곁에 두기에는 란델리노의 위치는 높았다.
란델리노는 가문의 유일한 적통이다.
벨로나 공작이 정식으로 후계자 임명을 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그를 후계자로 여기는 이유였다.
게다가 그는 공작 가문의 후계자에게 어울리는 능력과 자질을 지녔다.
후계자에서 밀려날 흠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비호를 받았다.
그녀의 권력이 굳건하거늘, 란델리노를 반대할 이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란셀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사생아에 불과했다.
펠리시아는 몰락 귀족 출신이었고 의절한 가족들은 그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작자들이었다.
형제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란델리노가 란셀에게서 얻어 낼 것은 없었다.
“왜 얻어 낼 것이 없어?”
“얻어 낼 것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사생아 따위와 상대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니까.”
“맞는 말씀이군요. 사생아는 사생아를 상대하는 것이 맞죠.”
란델리노가 란셀에게 잘해준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고 허무했다.
단지 자신이 사생아를 상대하기 싫어서였으니까.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와 벨로나 가문의 후계자 양쪽을 모두 가지기 위해서 바빴다.
하찮은 사생아 하나에게 신경을 써 줄 틈이 없었다.
가문의 적자인 그가 사생아 따위를 상대하는 것은 품위가 없었다.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사생아와 란델리노가 동등한 선상에서 이야기꺼리가 되는 것은 란델리노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 끼리끼리 놀아야지.”
“한 수 앞을 바라보시는 선택이셨습니다.”
피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반응했다.
벨로나 공작의 총애를 받는 아이라고 해도 사생아다.
란델리노와 입장이 전혀 달랐다.
법적으로 남인 아이와 유일한 법적 아들이 같을 수 없었다.
계승권과 상속권을 가진 란델리노와 아무런 권리도 없는 헤레스.
누가 보아도 우위에 있는 인물은 란델리노다.
그러니 괜히 헤레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견제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견제를 한다는 것은 상대를 위협적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만약 란델리노가 나선다면 손해를 보는 것은 헤레스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란델리노 백작’의 위치가 위태롭거나 헤레스가 란델리노를 위협할 인물이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었다.
란델리노의 지지 세력이 동요하는 계기를 알아서 제공할 필요는 없었다.
“아예 무시하기에는 공작 각하의 총애가 거슬리고요”
“그래. 직접 견제를 하기에는 너무 하찮지.”
“란셀 영식이 알아서 백작님께 사생아에 관해 보고를 하겠지요.”
란셀은 자신이 헤레스에 관해 형님에게 ‘보고’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란델리노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란델리노가 란셀이 의지하는 좋은 형님으로 남아주는 한, 란셀은 거짓 없이 그의 형님을 대할 것이다.
“사이가 좋으니까 자주 찾아가도 이상할 일도 없어서 좋아.”
“엄한 의심을 사지 않아서 좋군요.”
“그렇지.”
란셀이 알아서 헤레스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공격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란델리노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 관한 보고는 동생과 놀려고 오는 형님 행세를 할 때 들으면 되었다.
* * *
저녁 시간이 되었다.
란델리노는 식사를 위한 테이블에서 언제나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
문을 열고 평소처럼 자기 자리에 앉으려던 란델리노가 멈췄다.
눈웃음이 짓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저것들이 왜 여기에 있지?”
“그것이…….”
란델리노가 언짢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좋았던 기분을 짜증나게 만드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저것들’은 엘리사와 헤레스였다.
그들은 란델리노의 살기에 움찔거렸다.
그는 난감해하는 집사는 보지도 않고 그것들을 봤다.
“집사, 저것들 치워.”
“란델리노님.”
“치우라는 말이 들리지 않아?”
짜증을 넘어서 분노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의 것들을 치워 버리지 않으면 집사를 죽이겠다는 듯이 바라봤다.
다리가 떨리는 기분에도 집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됩니다.”
“그대가 죽고 싶은가 보군. 좋아. 죽고 싶다면 그 소원을 들어줘야지.”
“란델리노님!”
란델리노가 장식용 검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벨로나 공작가문은 명문 무가였다.
장식용이라고 해도 진검이었다.
란델리노의 검술 실력은 뛰어나기로 소문났다.
집사 정도는 손쉽게 죽일 능력은 되었다.
집사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갔다.
그가 검집을 잡은 순간이었다.
“멈춰라. 집사는 나의 명령을 따른 것이니까.”
“저것들을 부른 것이 아버지라고요?”
“그래. 내가 불렀다.”
“아버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으신 것입니까?”
페루제 공작부인과 벨로나 공작이 같이 식사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부부 사이가 개판인데 식사하다가 체할 기회를 늘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 간에 합의를 봤는지 일주일에 한 번은 온 가족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온 가족이라고 해봤자 페루제 공작부인, 벨로나 공작, 란델리노였다.
오늘은 다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이었고 그런 시간에 사생아와 정부가 있었다.
“온 가족이 식사하는 날이지.”
“언제부터 정부와 사생아가 가족으로 인정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란델리노가 비아냥거렸다.
세상 어디에 본부인과 정부, 적장자와 사생아가 함께 식사를 한단 말인가!
남들이 알았다가는 비웃을 일이었다.
“말조심하거라. 네가 함부로 할 여인이 아니다.”
“왜요? 저 여인이 내 어머니의 동생이라서요?”
벨로나 공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엘리사는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 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것은 준거물급 혹은 거물급 인물들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벨로나 공작이 정보 공작을 한 덕분이었다.
“너 어떻게?”
“내가 바보입니까? 알아보면 쉽게 알 일이지요.”
그가 엘리사를 째려봤다.
기억조차 나지 않은 친모였으나 얼마나 애통했을지 어렴풋이 상상이 되었다.
친모의 유품에는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와 그 배경이 써져 있었다.
벨로나 공작은 친모와 혼인하고 난 뒤에 엘리사와 눈이 맞았다.
그는 친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만 혼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친모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총애하셔서 다행이었어요. 저런 여인이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 될 뻔했다니 끔찍하군요.”
“너!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냐!”
전대 벨로나 공작이 그의 친모를 아주 총애했고 아꼈다.
친모도 지금의 벨로나 공작도 감히 이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친모의 외가는 반역죄로 망하고 엘리사는 평민으로 강등 당했다.
반역죄로 평민이 된 여인과 그 자식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귀족이 될 수 없었다.
이혼은 물건너갔다.
이혼한다고 해서 엘리사와 맺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묘수를 생각해 냈다.
“저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저리 자기 분수를 모르는 여인이 있다니요.”
“당장 사과하지 못해?!”
“자기 언니의 남자를 빼앗고 뻐꾸기 부인하려고 했던 여자에게요? 왜요?”
“너! 어디서 그딴 망언을 하는 것이야!”
그 묘수는 친모와 엘리사를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자매라고 해도 친모와 엘리사는 유독 서로를 닮았다.
란델리노의 출산 후 병을 핑계로 멀리 요양을 보내고 몇 년 후에 엘리사가 언니인 척해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되어서 엘리사가 아들을 낳게 되면 란델리노의 운명은 하나였다.
엘리사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란델리노는 쫓겨나리라.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친모는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자신이 죽으면 적어도 엘리사가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없었으니까.
내정을 장악한 칸나 백작부인이 제대로 된 가문의 여인을 벨로나 공작의 아내로 맞이하도록 둘 리가 없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 결정에 실책이 있다면 아이를 학대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를 낳으신 분이 돌아가셔서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그분인 척하고 공작부인 행세를 해야 했을 것인데!”
“아니야! 그런 적 없어!”
엘리사가 부정했으나 란델리노는 듣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는 여인의 말을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여기서 제대로 전부 말해 볼까요? 그것을 원하세요?”
“감히 그딴 말을 하고 살아남을 줄 아느냐!”
엘리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였다.
엘리사의 언니는 란델리노를 낳아 준 어머니였다.
언니의 남편과 몸을 섞고 아이까지 낳다니 대단하다 싶었다.
가문의 반역으로 평민이 되었는데도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것을 보면 일반적인 여인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배제된 하나가 있었다.
헤레스였다.
아이는 자신이 들은 말들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이는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뻐꾸기 부인? 죽은 공작부인이 엄마의 언니? 언니의 남자를 빼앗아?’
자신이 뭔가 더러운 것이 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가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엘리사가 흠칫했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놀라서 헤레스를 봤다.
아이를 다정하게 안았다.
“아니야. 헤레스. 저 말 듣지 마. 알았지? 엄마랑 아빠는 순수하게 사랑했고 그래서 너를 낳은 거야.”
“순수한 사랑?”
란델리노가 비웃었다.
순수한 사랑이든 뭐든 간에 진실은 간통이었다.
간통을 포장해 봤자 간통이었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간통을 간통이라 말하지 못하는 그들이 웃겼다.
더러운 아이가 더럽다고 인정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네 이놈!”
“각하! 고정하십시오!”
집사가 벨로나 공작을 다급하게 불렀다.
소용이 없었다.
벨로나 공작은 소드마스터였다.
란델리노가 쥐고 있던 검을 빼앗아서 곧바로 뽑았다.
그 검은 곧 란델리노의 목을 향했다.
언제라도 친아들의 목을 벨 기세였다.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어머니!”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녀가 식사 시간에 정확하게 나타났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빠르게 훑어봤다.
그리고 엘리사와 헤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니 어찌된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이 되었다.
그녀는 시큰둥한 눈빛으로 남편을 봤다.
별 시답지 않은 것으로 싸운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