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버림받은 여인과 사생아
페루제 공작부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생각해서 당신의 여인을 살려 둔 것을 명심하세요.”
“그들은 마음대로 해.”
벨로나 공작은 잘 알았다.
자신의 아내는 엄청난 양보를 한 것이었다.
엘리사를 옥죄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으니까.
공작부인 독살 미수 사건으로 엘리사를 확실하게 죽여 버릴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감히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다.
그 배후를 살려 두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남편의 여인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남편이 준 장난감인 펠리시아가 마음에 들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공작님, 구해 주세요!”
“뻔뻔하군. 공작가문의 안주인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말이야.”
“저는 억울해요! 누명이라고요!”
“명백한 증좌와 증인들이 있는데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펠리시아가 애원하며 소리쳤다.
그 애원은 벨로나 공작에게 닿지 않았다.
모든 정황과 범행동기, 증거까지 완벽하게 펠리시아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누명일 수 있다.
그렇지만 누명이라면 잘 짜인 각본이었다.
아쉽게도 펠리시아와 란셀은 이 완벽한 각본을 깰 노력을 할 가치가 없었다.
벨로나 공작은 매정하게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펠리시아는 절망에 비참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아들만이라도 살리려고 했는데 벨로나 공작에게는 란셀은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란셀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뼈저리게 깨달아 버렸다.
자신과 어머니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깊게 각인되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런 모자를 지루해하며 내려다봤다.
이들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 죽여야겠군.”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펠리시아가 무릎으로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이 막으려고 하다가 멈췄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치마를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들만은 살려 주십시오.”
“엄마!”
란셀은 기사들의 검에 몸이 굳었다.
펠리시아를 부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가 차갑게 펠리시아를 내려다봤다.
배은망덕한 것들을 보는 눈빛이었다.
펠리시아가 흠칫했다.
두려움에 몸이 굳어 버렸다.
“왜 모르니?”
“네?”
“나는 너희 모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음을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너희가 불쌍해서 별채에 데려가지 않고 지금 죽이려고 하잖아.”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란셀도, 펠리시아도 바라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들어갈 성만 봤다.
그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니까 고통 없이 죽거라.”
“제, 제발! 꺄아아악!”
“엄마!”
그 말에 기사들이 펠리시아를 그녀에게 떨어뜨려 놓았다.
머리를 잡힌 여인은 아이 곁으로 던져졌다.
기사 하나가 검을 들었다.
이제 그들을 벨 일만 남았다.
펠리시아는 아이를 감싸 안았다.
“멈춰라!”
검이 그들을 향해 내려오던 순간, 누군가의 일갈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펠리시아와 란셀에게 향하던 검이 멈췄다.
그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눈을 찌푸렸다.
“란델리노, 이게 무슨 짓이냐?”
“어머니, 제발 분노를 거둬 주십시오!”
란델리노가 그녀 앞에 섰다.
그것도 감히 페루제 공작부인의 결정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핏줄은 아니더라도 란델리노는 자신들의 주군이 사랑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잠시 검을 내려놓아라.”
“네.”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들을 차분히 관찰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는지 옷은 땀에 절어 있었다.
마치 갑작스러운 일에 최대한 빨리 온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것 봐라?’
자신이 무엇을 할 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그렇게 왔다.
저 머리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히 궁금했다.
그래서 일. 단. 은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감히 이 가문의 안주인이자 메디치 백작인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을 살리라고?”
“네, 살려 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지?”
그녀가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냈다.
란델리노는 그녀의 반응에 맞춰서 진중하게 말했다.
“란셀은 제 아우입니다! 저 여인은 란셀의 어머니입니다.”
“사생아에 지나지 않다.”
“저처럼! 아비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아이입니다.”
“너는 그이의 적법한 아들이고 저것은 아니다.”
“적통이었으나 외면당했던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되었습니다.”
란델리노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어머니가 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처지도 란셀과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말했다.
동시에 란델리노의 어머니를 높였다.
‘어머니’가 있느냐와 없느냐,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졌음을 말한 것과 같았으니까.
“지금 저 정부와 사생아 따위 때문에 나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것은 알고 있겠지.”
“어머니, 저는 정부와 사생아 따위 때문에 어머니를 막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냐? 동정심이냐?”
“동정심이라 대답하여 살릴 수 있다면 그리 대답할 것입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몸을 돌려서 살짝 펠리시아와 란셀을 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감동과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찮고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대가로 살아남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나를 죽이려고 한 것과 그 자식을 살리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느냐.”
“자애롭다고 칭송할 것입니다.”
“뭐?”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정부의 계략에서 버림받은 여인과 아이를 구해 냈다고 말입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그녀는 씨익 웃었다.
무언가 즐거운 놀이가 떠오른 아이의 표정이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서 펠리시아과 란셀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앉아서 서로를 안고 있는 그들을 서늘하게 내려다봤다.
“너희는 운이 좋아. 그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펠리시아는 그들이 살았음을 알아차렸다.
펠리시아는 일어설 생각조차 못하고 무릎으로 걸으며 그녀 앞에 섰다.
그렁그렁 거리는 눈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나? 란델리노가 그대와 아이를 구한 것이지.”
“영식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란셀은 아버지는 자신을 버렸을지라도 형님은 자신을 지켜줬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선택한 여인과 배다른 형제를 향한 증오도 확실하게 새겨졌다.
그런 아이를 무관심하게 보던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형으로 해야 할 행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란델리노가 펠리시아와 란셀을 일으켜 세워 줬다.
란셀의 옷을 털어 주기까지 했다.
시녀를 시켜도 될 일이었음에도 직접해 준 것이다.
마치 자신이 얼마나 란셀을 아끼는지 보여주려고 하듯이 말이다.
“나는 펠리시아와 할 말이 있으니까 너는 아이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라.”
“알겠습니다. 가자. 란셀.”
“엄마랑 같이 가면…….”
란셀은 형님과 둘만 가기 싫었다.
무섭고 아름다운 공작부인이 어머니를 해칠 것 같았다.
바로 죽이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자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어머니를 죽여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런 란셀의 손을 란델리노가 다정하게 잡아줬다.
“너의 어머니를 난처하게 하면 안 돼.”
“그래, 란셀. 엄마는 부인의 말씀을 듣고 따라갈 거니까. 기다리렴.”
“네.”
펠리시아도 공작부인과 둘만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렇지만 거부할 권리 따위가 그녀에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이를 안심시키고 얼른 대화하는 것이 나았다.
란셀과 란델리노가 사라지고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펠리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기 서서 들어.”
“네.”
어느새 아까 사라졌던 시녀가 다가와서 찻잔에 차를 따라줬다.
그녀가 찻잔에 입을 대고는 말했다.
“내가 화가 많이 났어.”
“…….”
“괜히 그것을 그냥 보냈나 싶기도 해.”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하는 ‘그것’이 엘리사를 뜻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너까지 살려 주게 되었잖아.”
“제, 제발.”
“너와 아이를 죽여서 짜증을 풀려고 했는데 말이야.”
펠리시아는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이까지 죽이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걱정마. 죽이지 않기로 했잖아.”
“그, 그러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들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어. 그치?”
죽이지 않겠다는데 왜 이렇게 무서울까?
펠리시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 두려웠다.
어떤 말을 할지 모른다는 것만으로 몸이 떨렸다.
“대신에 내 화풀이 대상이 되어 줘야겠어.”
“화풀이요?”
“그래. 평생은 아니고… 내 화가 풀릴 때까지 잠시?”
그녀가 윙크하며 미소를 지었다.
펠리시아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도대체 그 화라는 것은 언제 풀릴까?
화풀이는 하루에 얼마나, 몇 번을 하는 것일까?
화풀이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 것일까?
과연 자신이 그녀가 하는 화풀이를 견뎌 낼 수 있을까?
그 화풀이 대상에 란셀도 있으면 어쩌지?
수많은 생각이 고민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대신에 란셀 그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줄게. 좋은 가정교사, 상등급의 의상들 등 말이야.”
“알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최고의’, ‘최상급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란델리노와 란셀이 다름을 제대로 경험하게 해줄 요량인 듯싶었다.
“순순히 대답하니 좋네. 란셀에게 화풀이하지는 않을게.”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펠리시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었으니까.
“좋아.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들어.”
그녀가 일어나며 어깨를 두들기고는 다정하게 펠리시아의 귓가에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잘 버텨줘.”
기대하고 있다는 말투였다.
* * *
화려하게 치장한 부인들이 무리를 지어서 어딘가로 향했다.
그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하는 장미회 모임이었다.
장미회 부인들은 이 모임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관한 궁금함에 전날 잠을 자지 못했다.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정부가 독살을 사주했다면서요.”
“그 소식을 듣고 역시나 싶었어요.”
“저도요. 정부에게 양심을 바라는 것이 욕심이었어요.”
그들은 펠리시아를 욕했다.
정부 따위가 정실의 자리를 탐한 것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그들도 법적 부인의 자리에 있었기에 제대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거기에는 그 안에는 그녀가 죽으면 더는 ‘정부 때리기’를 할 수 없다는 걱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편들이 ‘정부 때리기’를 막지 못하는 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니까.
“공작부인께서 정부도 사람인데 은혜를 베풀면 감사하지 않을까 하셨잖아요.”
“자비로우신 분이에요. 사람 취급하면 아니 되는 것인 정부인데 그런 것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으니까요.”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칭송했다.
그녀는 자비와 거리가 멀었고 잔혹과 가까운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준 자극에 익숙해져 있었다.
웬만한 일은 놀랄 일도 아니게 되었고 일상에 불과해져 버렸다.
그래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바닥에 던져 주는 작은 친절도 그들에게는 자애로운 모습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