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61화 (161/221)

161화 란델리노가 준 선물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여인과 아이가 있었다.

아주 밝게 빛나는 금발의 여인과 란셀 또래의 아이였다.

그 여인과 아이는 서로의 손을 떼지 않았다.

아이는 여인의 몸에 붙어서 울먹였다.

“꿇려.”

“윽!”

“엄마!”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기사들에게 여인과 아이는 억지로 꿇려졌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웃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겠으니 소개는 넘어가고 너와 아이의 이름은 뭐니?”

“저는 엘리사이고 이 아이는 제 아들인 헤레스입니다.”

일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이 아들을 안으며 말했다.

언짢아하듯이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썹 하나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나의 남편인 벨로나 공작이 지어 준 것이니?”

“네…….”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다정한 아버지네. 처음 알았어.”

그녀는 비아냥거렸다.

란델리노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이름도 죽은 친모가 짓게 만들었으니까.

란셀도 펠리시아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벨로나 공작이 이름을 준 아들은 헤레스가 유일했다.

펠리시아는 그 의미가 무겁게 느껴졌다.

“헤레스는 고대어지. 그 뜻을 아니?”

“…….”

“말을 못하는 것을 보니 아는구나. 하긴 감히 내 앞에서 그 뜻을 말할 수 없겠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주먹을 쥐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뜻이었으니까.

그 이름을 지은 의지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눈앞의 것들을 죽이고 싶었다.

“펠리시아, 너는 그 뜻을 아니?”

“모, 모릅니다.”

“고대어로 헤레스는 계승자를 뜻하지.”

펠리시아는 절망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벨로나 공작은 자신과 아들에게 일말의 애정조차 없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다시 깨달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었어도 공작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감히 내가 안주인으로 있고 란델리노가 단단히 버티고 있는데 이딴 이름을 계속 유지하게 해?”

기어코 자신과 싸워서 승리하고 눈앞의 꼬맹이를 후계자에 앉히려고 한 의도가 읽어졌다.

그녀가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엘리사와 헤레스의 목에 검이 다가왔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들의 목을 베어 버릴 거리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분노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펠리시아와 란셀에게 시선을 옮겼다.

“펠리시아, 내가 너를 살릴 이야기를 만들었단다. 들어보렴.”

“네, 네.”

펠리시아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나를 죽이려고 한 배후는 네가 아니다. 너는 누명을 당한 것이다. 누구에게 누명을 당했다고 할까?”

“모르겠습니다.”

“너는 생각이 없니? 왜 모른다고만 하니?”

페루제 공작부인이 정말 실망스럽다는 듯이 푸념했다.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봤다.

“공작부인을 독살할 만한 인물 혹은 그런 인물의 비호를 받는 인물이 누명을 씌었다고 해야 사람들도 수긍하겠지. 여기 그 인물이 있네?”

그 말에 엘리사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공작부인을 독살해도 수습해 줄 만한 인물.

벨로나 공작뿐이었고, 엘리사는 그런 그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었다.

지금 엘리사 자신을 독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겠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벨로나 공작을 통해서 페루제 공작부인에 관한 정보를 꾸준히 접하던 엘리사는 그녀가 한다면 하는 사람임을 잘 알았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홀로 남을 아이는 어쩌라고요!”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제발 저와 아이를 살려 주세요!”

어린 자식을 안고 있는 어미들이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살기 위해서는 한 아이와 어미를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했다.

서로가 죽이려고 하는 모습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실소했다.

“엘리사, 왜 그런 걱정을 하니?”

“예?”

“너를 죽이면서 너의 아이를 살려 둘 리가 없잖니? 펠리시아처럼 눈치를 키우렴. 자기와 아이를 둘 다 살려 달라고 하잖아.”

엘리사는 아름답게 웃는 공작부인을 보며 몸을 떨었다.

아름다운 표정과 우아한 자태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을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버릴 장난감 취급했다.

잠시의 지루함을 해소하게 해줄 장난감에 불과했다.

엘리사는 그리 느껴졌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것은 그이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지.”

“페루제!”

분노에 얼룩진 외침이 정원에 울렸다.

그 외침의 주인공은 바로 벨로나 공작이었다.

펠리시아가 별채에 갇혀 있던 동안에 볼 수 없었던 인물이 지금에야 나타난 것이다.

“왔구나. 너희 목숨을 쥐고 있는 인물이 말이야.”

페루제 공작부인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광기와 기대감이 뒤섞인 웃음은 소름이 돋게 했다.

그의 뒤에는 벨로나 가문의 기사들이 있었다.

벨로나 공작에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엄청났다.

기사들이 몸을 굳게 만들 정도였다.

과연 소드마스터라고 찬사가 나올 모습이었다.

“어헉!”

“으윽!”

기사들도 겨우 버티는 살기였다.

펠리시아, 란셀과 엘리사와 헤레스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벨로나 공작은 알아서 살기를 조절했다.

그 와중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녀가 한 손을 들며 말했다.

“거기서 더 다가오면 모두 죽여 버릴 거예요.”

“감히! 이딴 짓을?!”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이 거리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을 내렸다.

곧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이고는 손등에 머리를 댔다.

나른해 보였다.

살기등등한 남편과 대치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태도였다.

다르게 보자면 그것은 승자가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벨로나 공작은 당장이라도 악독한 자신의 부인이라는 여인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성물이 지키고 있는 한 아무리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설사 죽일 수 있더라도 성모를 죽인 죄인으로 모두의 공격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에클레시아의 모든 신도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천천히 내쉬었다.

잠시 날아갔던 이성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대 성격에 그들을 살려 놓고 있을 리가 없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 있지 않은 한에 말이야.”

“역시 내 마음을 잘 아는군요. 부부는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겠죠.”

그녀가 감동했다는 듯이 좋아했다.

머리를 손에 괸 것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2명의 아이와 2명의 여인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말해.”

“직설적인 것이 당신의 매력이죠.”

페루제 공작부인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벨로나 공작은 그런 그녀를 증오스럽게 바라봤다.

증오와 순수함이 대치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장난치지 말고 말하지.”

“진심인데 그리 말하니 섭섭하네요.”

“…….”

“뭘 그리 살벌하게 노려봐요. 알았어요. 바로 말하면 되잖아요.”

당장이라도 자신을 베어 버릴 것만 같은 눈빛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졌다는 듯이 말했다.

머리를 괸 손을 풀었다.

꼬고 있던 다리 한 쪽의 발을 까닥거렸다.

“저것들과 이것들 중에서 하나 고르세요.”

“뭐?”

그녀는 손으로 가리키기도, 시선을 주기도 귀찮았는지 발로 그들을 가리켰다.

그녀에게 하찮은 정부들과 사생아들은 딱 그 정도 가치였다.

벨로나 공작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당신이 선택한 여인과 자식을 살려 주겠다고요.”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말한 이들을 죽일 수 있잖아.”

벨로나 공작은 자신의 아내를 믿지 않았다.

신뢰를 하기에는 결혼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적의만 가득한 관계였으니까.

그녀는 그런 남편의 생각을 이해했고 신뢰할 근거를 제공했다.

“그렇게 되면 당신과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제가 설마 그렇게 하겠어요?”

“당신에게 그 정도의 개념이 있는지 처음 알았군.”

페루제 공작부인은 남편이 엘리사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다.

엘리사를 죽이면 지금 남편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걸고 페루제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임도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성물의 힘을 뚫고 자신을 죽일 방도를 찾을 수 있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을 지키는 과정에서 인재들을 잃을 수 있었다.

“여인은 신비로워야 매력적이니까요. 때에 맞게 숨겨 둔 매력을 하나씩 보여줘야죠.”

벨로나 공작은 아내의 개소리를 무시했다.

그는 엘리사와 헤레스를 걱정스럽게 보고는 다시 페루제 공작부인을 내려다봤다.

그가 초조한 것에 반대 그녀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선택만 하면 된다고 했지? 다른 것은 없고 말이야.”

“그럼요. 선택하면 지금 당신 곁으로 보낼게요.”

“엘리사, 헤레스 어서 와라.”

<다섯뱀>의 기사들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그녀가 턱을 잠시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자 엘리사와 헤레스를 위협하던 기사들이 검을 내려놓았다.

엘리사가 헤레스를 데리고 벨로나 공작을 향해 뛰었다.

“엘리사, 헤레스.”

“아빠!”

“무서웠어요.”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아.”

그들은 벨로나 공작의 품에 안겼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아이를 안심시켜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엘리사, 헤레스 놀랐을 것이니 쉬어야지. 시종이 방으로 안내할 것이야.”

“아빠, 같이 있으면 안 되나요?”

“그래요. 같이 있어요.”

“뒷수습하고 얼른 갈게.”

서로가 곁을 지키려는 사랑은 마음을 몽글거리게 만들었다.

물론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기에는 꼴값이었다.

유부남이 아내 앞에서 무슨 추태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콧웃음을 쳤다.

엘리사와 헤레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사들끼리 대치한 상황이야.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일을 이렇게 키웠지?”

“그냥 부부싸움했다고 해요.”

“하!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사람들은 우리라면 그렇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할 걸요.”

벨로나 공작은 사교계에서 어떤 소문이 퍼질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일을 벌인 당사자는 아주 마음이 편해 보였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워낙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부부였다.

기사들끼리 대치하는 일은 종종 있었고

이번에도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렇게 싸웠구나 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불쌍한 존재들을 잊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들의 존재를 깨워주듯이 절규가 들렸다.

“각하! 제발 란셀을 구해 주세요!”

펠리시아는 벨로나 공작이 자신을 구할 리 없음을 이미 알았다.

그렇지만 란셀은 펠리시아와 달랐다.

그녀는 아들이라도 구해야 했다.

“저는 공작님께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알아요!”

“엄, 엄마.”

“그러나 란셀은 당신의 아들이잖아요! 제발 구해 주세요! 란셀만은 구해 주세요!”

“싫어! 그러지마! 나는 엄마랑 있을 거야!”

벨로나 공작의 시선이 펠리시아와 란셀에게 닿았다.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였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을 무심하게 봤다.

“아까 선택했잖아요. 이제와 번복하려고요?”

“…….”

“모두를 구할 수 없어요. 그것이 세상의 이치죠.”

모두를 구할 수 없다.

맞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였다.

하나를 구하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는 구함을 받지 못하니까.

이런 때에 쓰일 이치는 아니었으나 세상의 이치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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