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추궁
실리뿐 아니라 누구라도 신경을 쓸 사항이었다.
“왕실에 도움을 청하지 않겠습니까? 누명이라느니, 과하다느니 호소라도 하면…….”
“내가 준 서신이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야. 그것을 확인하고도 나선다면 머저리가 따로 없는 것이지.”
“알펜 국왕이 그 정도 바보는 아니긴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서신이란 라보 공작이 페루제 공작부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라는 증좌였다.
그녀가 자신의 정령을 이용해서 만든 거짓 문서.
그것으로 인해 국왕은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라보 공작을 어떻게 구할지 머리가 아픈데 이딴 문제로 신경을 쓸 여력이 있겠는가.
대충 너네가 잘못했다며 넘겨 버릴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정말로 재미가 있다는 듯이 웃었다.
“대놓고 빼앗기에는 명분도, 연관도 없어서 난감했잖아. 그런데 거기서 부인이 도움을 요청하다니 얼마나 운이 좋아?”
“맞습니다. 딱 필요할 때에 도움을 청하다니요. 신께서 부인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부터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도움을 청한 부인이 알아서 할 것이다.
정부의 가문을 옥죄기 위해서 증거와 증인을 만들어서 판을 만들 예정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과정에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되었을 때에 꼬리 자르기를 하기 위함이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리도 운이 좋게 딱 맞아떨어졌겠지?”
“그럼요.”
신실한 신자인 페루제 공작부인은 실리의 아부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신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뜻이었으니까.
자신의 행동과 결단에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
원래도 거리낌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똑! 똑!
“어머니, 저 란델리노입니다.”
“그래. 왔느냐?”
란델리노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쓰러졌단 소식에 달려온 티가 역력했다.
진심으로 걱정하여 달려온 것처럼 보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럼. 괜찮지. 이 일에 관해 알면서도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해독을 하셨다고 해도 독을 드셨습니다. 걱정이 되지요.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니까요.”
“그 말도 맞구나. 내가 너의 어미이니까.”
그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을 다정하게 만졌다.
“다시는 이러지 마십시오. 알아도 걱정이 됩니다.”
“그래. 다시는 이러지 않으마.”
그녀가 우아하게 웃었다.
아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말과 말투가 싫지 않았다.
별 영양가 없는 걱정을 한다는 말을 할만도 한데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말로 표현하지 않을 감정이 올라왔다.
“어머니께서 기운을 차리시도록 ‘선물들’을 가져왔습니다.”
“선물들? 그것이 무엇이냐?”
그녀는 기대가 되었다.
란델리노는 언제나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높은 안목을 맞출 줄 아는 아이였다.
저리도 자신이 있어 하는 것을 보니 이번 선물들도 좋은 것이겠구나 싶었다.
“가져와라.”
“……?!”
실리도, 페루제 공작부인도 눈이 크게 떠졌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선물들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정말, 정말…….”
페루제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 사람처럼 말이다.
너무 감격하여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떨리는 입가를 가리기 위한 손짓이었다.
“그동안 받아온 선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마음에 드실 줄 알았습니다.”
“고맙구나. 금방 몸이 나을 것 같아.”
그녀는 란델리노의 선물이 어마무시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금방 일어났다.
너무 빠른 회복에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들이 상상도 못하는 온갖 좋은 약초들과 음식들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몸이 낫자마자 한 일은 펠리시아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
기사들이 죄인을 가차 없이 그녀 앞에 데려왔다.
“꺄악!”
“그동안 잘 지냈니? 괜한 것을 물었군. 잘 지낸 것 같구나.”
그녀가 자신의 특별한 식물만 있는 정원에서 꽃들을 구경했다.
편해 보이면서도 고급진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한쪽 발을 까닥거리고 있는데도 우아하게 보였다.
이에 반해 펠리시아는 살이 빠졌고 머리는 엉망이었으며 눈 밑은 거뭇거뭇했다.
기사들에게 끌려간 곳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쉴 틈이 없이 귀를 때렸다.
다음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다가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에 애써 힘을 쥐고 말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부인을 해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이상하구나. 내가 들은 말들과 다른데?”
“어떤 말을 들으셨든 오해이십니다.”
“그래?”
페루제 공작부인은 두려움에 떠는 상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그들을 데려와.”
“네.”
그녀의 명령에 고용인 몇이 나타났다.
펠리시아의 곁에서 수발을 돕던 고용인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펠리시아와 달리 변한 것은 없었다.
“펠리시아가 평소에 어땠다고 했지?”
그 물음이 시작이었다.
정중하게 서 있던 고용인들이 돌변했다.
“평소에 자신이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 될 것이라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다음 대 벨로나 공작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공작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부인만큼의 대우를 받지 않으면 싫어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싫어한 적 없어요.”
펠리시아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신과 함께 란셀의 입적을 도울 사람들을 모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들을 벨로나 공작의 후계자로 만들 야심도 있었다.
그러나 공작부인과 같은 대우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펠리시아는 아직은 자신이 그럴 위치가 아님을 잘 알았다.
“싫어한 적은 없다니 믿기 어렵네.”
“정말입니다!”
“그대가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 될 미래와 아들이 공작이 될 미래를 상상했겠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그, 그것이…….”
펠리시아는 공작부인의 물음에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답한다고 해도 믿어 줄 리도 없었고 말이다.
도리어 거짓을 말해서 화를 자초할 수 있었다.
제대로 말도 못하는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준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장미회는 내가 만든 모임이야.”
“장미회가 부인께서 만든 모임이라고요?”
“그렇단다. 그 모임의 부인들을 불러다가 무슨 짓을 벌이려고 했니? 같이 나를 쫓아내자고?”
“아니에요! 저는 장미회가 부인이 만든 모임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아들에게 좋은 친구를 만들어 주고 저도 사교계에서 잘해 보려고 했던 것이에요.”
“어떻게 모를 수 있니? 북부의 사교계는 내가 쥐고 있다. 내가 주인이란 말이야.”
“…….”
“주군이 누군지도 모르는 기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으며 사교계의 중심이 누구인지 모르는 귀족이 어디에 있느냐!”
“저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이 죄인에게 나에 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느냐?”
고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말했다.
“아닙니다. 공작부인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다 설명했습니다.”
“그동안 같이 있으면서 계속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공작각하께서도 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펠리시아는 머리에 돌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을 고용인들을 말했다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했다.
저들의 말에 진실은 벨로나 공작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경계하라고 했다는 말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 너의 명령에 따라 찻잔에 독을 넣었다는 시녀가 있었다. 죄책감에 조사가 들어오기 전에 바로 자백을 했단다.”
“누명이에요! 저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결단코 없어요!”
“진실이 드러나면 다들 그런 식으로 발뺌을 하지.”
“아니에요! 진짜로 누명이에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펠리시아를 한심하게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하찮게 여김이 느껴져서인지 어깨가 절로 좁아졌다.
“가문을 위해 헌신한 고용인들과 야심을 가진 정부 중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까? 너라면 누구를 믿겠니?”
페루제 공작부인은 물음을 던지고 다시 꽃들을 바라봤다.
펠리시아는 바라볼 가치가 없다는 듯이 힐끔거림조차 없었다.
“그대와 어울리던 부인들도 말하더군. 나는 자기주장이 강해서 이 가문의 안주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이야.”
“저,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그런 식의 말을 많이 했더군. 내가 다 읊어 줄까?”
펠리시아는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너 왜 이러니?”
“살려주십시오! 원하신다면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란셀이랑 같이 숨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펠리시아는 무릎을 꿇고는 애원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벨로나 공작은 자신과 아들을 위해서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여인에게 줄 제물로 데려온 것이었다.
모든 것을 쥐락펴락 하는 여인을 어떻게 펠리시아가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 증거로 벨로나 공작은 그 사건이 벌어진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너는 아둔하구나. 어떻게 너와 네 아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럴까? 기회를 줘볼까?”
그녀가 다시 펠리시아를 봤다.
얼굴에는 미소가 띄었는데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아까도 얼핏 말했지만 네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단다.”
“예?”
“단, 이것은 그이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
펠리시아는 자신이 들은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어머니!”
“란셀!”
기사에게 란셀이 끌려왔다.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겼다.
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몸을 떨었다.
며칠 동안 사라진 어머니.
모두가 기다리라고만 했고 그들의 시선은 눈보라처럼 차가웠다.
오직 형님만이 자신을 안심시켜 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기사가 어머니에게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따라온 것이다.
어머니를 만나기는 했으나 충격이었다.
란셀에게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자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란셀의 어머니는 엉망이 되었다.
아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이에게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모자 상봉을 좀 더 봐도 될 건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까닥거렸다.
“헉!”
“엄마!”
“제발 아이만은 살려 주세요!”
기사들이 검을 뽑아서 란셀과 펠리시아에게 겨눈 것이다.
모자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애절한 모습을 시큰둥하게 봤다.
“말했잖니? 살 기회를 주겠다고 말이야.”
그들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잠시 일어나더니 시녀가 의자의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는 시녀는 빠르게 사라졌다.
“나중에 큰 재미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앉는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지.”
그녀가 다시 앉고는 그들을 내려다봤다.
“먼저 아들이 준 선물들로 재미를 봐야겠구나.”
이 독살 미수 사건의 모든 것들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펠리시아도, 란셀도 그녀가 보고 있는 것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