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행복한 날
란델리노의 한쪽 눈썹이 언짢은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무엇이?”
“무, 무엇이냐면!”
“설마 자기 잘못도 모르면서 사과부터 한 것은 아니겠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사과를 했다는 의심을 한 란델리노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였다.
바지 위에서 손가락 하나가 위로 뻗었다가 바지로 향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별채 쪽으로 돌렸다.
자신들이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에 한 시종이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의 잘못을 알려 주신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제발 저희가 개선할 기회를 주십시오!”
시녀도 시종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는 완벽한 것을 좋아하시지.”
“공작부인께서는 완벽한 분이시니까요.”
“그럼요. 그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사람도 완벽하기를 원하신다. 자신이 명령한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고용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다.
말을 이렇게 하는데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명령을 수행해야 할 것들이 아이 앞에서 어줍잖은 우월감을 드러내?”
“그것이, 그것이 말입니다.”
“아직 아버지나 펠리시아 그 여자에게 말을 꺼내지 않아서 망정이지!”
란델리노가 화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벌을 주고 싶어서 안달난 것처럼 얼굴에는 분노가 차 있었다.
고용인들을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갑자기 모두 사라지면 수상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말을 듣던 란델리노는 곧 진정이 되었는지 차분하게 다시 등을 의자에 댔다.
“처음부터 너희를 별채 안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면 여기에 세워 놓지도 않았겠지.”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야. 다시 한 번 안일하게 군다면 그때는 어머니에게 친히 말할 것이니까.”
안도하며 감사함을 전하던 고용인들의 안색이 검게 변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들의 실수를 알게 된다면 그들은 진짜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되리라.
게다가 그녀가 명령한 일은 중요도가 아주 높은 일이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하는 일.
조금의 빈틈도 없어야 했다.
“물론입니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잠시 방심했던 것을 격렬하게 후회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들은 더 간교해졌다.
펠리시아에게 더 달고 단 말을 꺼냈으며 뒤에서도 진심으로 따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란셀에게도 과할 정도로 윗사람 대우를 해주며 신경을 더 각별하게 썼다.
* * *
정실부인과 정부 사이에 감도는 오묘한 침묵이 드디어 깨질 때가 다가왔다.
펠리시아는 분주하게 시녀들과 시종들을 부렸다.
“그거 저쪽에 두고.”
“여기요?”
“아니, 저기 말이야. 저기! 아이, 참! 거기 말고 저기!”
란셀의 삶을 불행으로 바꿀 날은 이렇게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란셀은 예전에 어머니랑 마을에 온 극단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연극을 하기 전에 준비하는 분주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 뭐하세요?”
“란셀!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란다.”
펠리시아는 행복하게 웃었다.
북부 사교계의 영향력이 있는 부인들에게 란셀을 소개하는 날이었으니까.
측근 고용인들이 말하기를 북부 사교계를 지배하는 ‘장미회’의 일원들이라고 들었다.
친해진 귀부인들이 말하기를 북부 사교계에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돌 만큼 힘이 있다고 한다.
그런 부인들이 자신에게 초대를 요청하다니!
벨로나 공작각하의 총애를 받는 여인과 친분을 쌓고 싶다면서 말이다!
이보다 더 란셀을 소개하기 좋은 자리가 있을까!
이를 계기로 제대로 된 귀족 아이들을 아들의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너의 미래를 위해서 이 어미는 힘낼 거야!”
“저는 어머니와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요.”
“무슨 소리니? 더 행복해져야지! 걱정 마렴. 네가 꽃길만 걷도록 해줄게.”
따스하게 웃으면서 안아주는 어머니.
어머니에게 나는 향과 온기가 란셀을 편하게 해줬다.
그리고 행복했다.
요즘 어머니가 바쁘셔서 뜸하시기는 했지만, 점점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분명히 예전처럼 행복해질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고용인들도 비웃거나 하는 눈빛이 사라졌다.
과거보다 덜 외로웠고 형님도 자주 찾아봐서 즐거웠다.
란셀은 그리 생각했다.
점점 행복해지고 그 행복이 계속 되리라.
펠리시아는 몰랐다.
그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장미회’를 만든 사람이 바로 ‘페루제 공작부인’임을 말이다.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 * *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화려한 마차들이 도착했고 우아하게 부인들이 내렸다.
그 부인 중 가장 높은 부인이 앞장을 서고 나머지 부인들이 서열에 따라 뒤따라갔다.
5명의 부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뭔가 긴장한 듯하기도 했고 언짢아 보이기도 했다.
가장 앞에 있던 부인이 시종에게 물었다.
“그분께서는?”
“곧 오실 예정입니다.”
“그래. 알았네.”
귀부인은 잠시 머뭇하더니 시종의 귀에 작게 귓속말했다.
오직 시종만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내가 직접 말하기는 하겠지만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고도 전하게.”
“부인께서 그리 말하시면 괘념치 말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그 부인이 감동한 듯이 눈을 빛냈다.
시종은 말을 마치고는 문이 열었다.
펠리시아가 기분 좋은 미소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기는 저와 공작님의 아들인 란셀이에요. 란셀,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란셀 벨로나입니다.”
아이의 소개에 부인들이 움찔거렸다.
찰나였으나 눈을 찌푸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직 가문에 입적조차 하지 않은 아이에게 귀족의 성을 붙여서 소개하도록 하다니 말이다.
이것은 이곳의 안주인을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귀족 가문의 합법적인 아이는 응당 가주의 아들이자, 가문 안주인의 아들이기도 했음이다.
안주인의 자식이 아닌데 가문의 성을 쓴다는 것은 안주인의 권위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짓이었다.
즉 이곳에 있는 본부인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드는 짓거리였다.
그녀들은 더는 이딴 것과 상대하기 싫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억지를 부렸는데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니까요. 초대를 얼마나 받고 싶었는지 몰라요.”
“편지까지 보내서 요청할 만큼이죠!”
“편지를 보내길 잘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오니까 좋네요.”
아이의 인사를 무시하고는 부인들은 환하게 그녀를 향해 웃었다.
능청스럽게 펠리시아에게 초대해 주기를 요청을 하는 편지를 보냈음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펠리시아가 우위에 있는 것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긴장하고 있던 펠리시아는 부인들의 이런 행동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부인들은 펠리시아가 꾸민 공간을 훑었다.
“어머! 너무 단아하게 잘 꾸몄네요.”
“저희를 얼마나 생각해주 셨는지 느껴져서 너무 좋아요.”
“맞아요. 나중에 저도 이런 식으로 꾸며 봐야겠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주최하는 ‘격이 다른’ 것을 누린 부인들은 안목이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그들의 수준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미치지 못할 뿐이지 귀족사회 전체를 보면 최상위급이었다.
그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요.”
“그러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볼까요?”
펠리시아의 말에 따라 모두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란셀은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귀부인들만의 이야기는 그에게 재미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 방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굳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란셀이구나. 오늘날이 좋지?”
“네, 날이 정말 좋아요”
란셀은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공작부인은 그에게 잘해 줬다.
간식도 주고 좋은 장난감도 보내주고 유명 디자이너를 초빙해서 란셀을 위한 옷을 만들도록 했다.
그런데 왜 공작부인의 웃음을 보면 다리가 떨리고 도망가고 싶을까?
란셀은 아름다운 미소로 자신을 대해 주는데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앞에 우아한 말투와 웃음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으니까.
“날씨가 좋은 만큼 즐. 거. 운. 날이 될 거야.”
“네. 맞아요.”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란셀은 공작부인이 자신을 지나치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
“괜찮으십니까?”
그는 뛰어가다가 어느 시종과 부딪혔다.
그 시종이 란셀을 일으켜 줬다.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그럼 이만.”
그 시종은 떨어진 서신을 겉옷 안쪽에 넣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란셀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시종에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란셀, 거기서 뭐하니?”
“형님!”
그가 란델리노에게 뛰어가서 폴짝 안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서 란델리노를 향하게 활짝 웃었다.
* * *
란셀의 불행이 시작되는 날은 이렇게 행복했다.
부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펠리시아님, 정말 유머가 넘치시네요.”
“재치가 있으신 것이 어떻게 사교계에 그리 빨리 자리를 잡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이 방의 주인인 펠리시아가 허락하지도 않았음에도 문이 열렸다.
빠르고 절도 있게 부인들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뵙사옵니다.”
마치 군대처럼 완벽하게 합이 맞았다.
펠리시아도 얼떨떨해하며 일어나서 인사했다.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그래. 내가 좀 늦게 왔는데 괜찮지?”
“물론입니다.”
“어서 자리를 마련해 드리거라!”
이 모임을 주최한 펠리시아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초대된 부인들이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명령을 내렸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페루제 공작부인은 괘념치 않아 했다.
“이리 지각을 했는데 환대를 해주니 고맙군.”
“북부의 누구라도 부인께서 오셨다는 이유만으로도 환영할 것입니다.”
“그럼요. 너무 좋아요.”
펠리시아가 초대하지 않은 인물에 등장에 당황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는 이상했다.
귀부인들은 마치 페루제 공작부인이 이 모임에 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 모임 주최자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과의 표시로 쿠키를 가져 왔네.”
“너무 과한 대우를 받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잘 먹어 주면 되는 것이지.”
부인들은 호들갑을 떨며 페루제 공작부인이 준 쿠키에 감동했다.
펠리시아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대를 생각해서 쿠키를 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너무 과한 반응이었다.
시녀가 과자를 올려놓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녀를 위한 다과도 바로 제공이 되었다.
오직 펠리시아만 모를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차를 마셔 볼까?”
“저는 마침 다 마셨답니다. 새로 마셔야겠네요.”
“호호호. 식어 버려서 새로 따라서 마셔야겠어요.”
주도권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넘어갔다.
귀부인들이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으니까.
펠리시아가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펠리시아는 방 안에 세워진 꽃병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그들에 비해 신분이 한미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리 펠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해주니 내가 고맙군. 좋은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
“어휴,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이 아닙니까. 응당 신경을 써야지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다니 내가 사람을 잘 뒀어.”
페루제 공작부인은 누가 보더라도 펠리시아를 위한 말만 해주고 있었으니까.
펠리시아가 사교계에 적응할수록 뒤에서 도와준 것처럼 말하고 있었으니까.그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공작부인! 공작부인! 괜찮으세요!”
“어서 의원을 부르거라!”
공작부인이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쓰러졌다.
귀부인들은 경악하며 난리가 났다.
암살미수 사건에서도 살아남은 페루제 공작부인이었기에 더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