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남편이 준 장난감
벨로나 공작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주며 그 하소연을 전부 들어줬다.
“그래. 그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거 같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제 란셀과 저를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물론이지. 그대와 아이를 당당하게 성안에 들일 것이야.”
란셀과 펠리시아가 공작령으로 가기로 결정되면서 벨로나 공작은 자신의 부인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워낙 소문은 자자했던지라 못된 여인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 여자가 무엇을 하든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일이야. 란셀이 위험해질 수 있어.”
“절대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게요.”
벨로나 공작은 그녀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냈다.
공작령에 들어오면서 페루제 공작부인을 만날 생각에 긴장했다.
하도 벨로나 공작에게 경고를 들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만나니 그녀는 소문과 달랐다.
악독하지 않았고 배포가 컸으며 다정했다.
생각을 하다 보니 그녀의 방에 금방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한번 보시지요.”
시종이 문을 열었다.
란셀의 방은 장난이라는 듯이 더 화려하고 멋있는 방이었다.
가구에 새겨진 화려한 무늬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눈을 사로잡았다.
“만족스러우십니까?”
“정말 화려한 방이에요.”
“만족하셔서 다행입니다. 공작부인께서 세세하게 하나하나 신경을 썼습니다.”
펠리시아는 공작부인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과할 정도로 좋았다.
세상 어느 정실부인이 정부를 이렇게 환영해 준단 말인가.
그건 좋은 사람을 넘어서 호구였다.
악명을 생각하면 순수한 의도로 자신을 환대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무슨 의도로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아들을 위해서 얼마든지 열심히 움직일 거예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호의와 의도는 몰랐다.
그러나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서 아들이 공작의 아들로 대우받고 떳떳하게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공작이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벨로나 공작도 란셀이 입적만 되면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 * *
늦은 밤, 벨로나 공작이 펠리시아를 찾아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오고 싶었는데 말이야.”
“공작님이 바쁘신 것을 아는 걸요.”
“그녀가 그대를 환대해 줬다고 듣기는 했는데 정말인가 보군.”
다정한 말투와 달리 그의 시선은 방을 관찰하고 있었다.
절대로 남편의 정부를 그대로 둘 여인이 아니었고 환대할 여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의도가 수상한 것은 당연했다.
“란셀의 방을 보고 느끼기는 했지만 상당히 신경을 썼어.”
“네. 가구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가구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 여자는 자신의 격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니까.”
펠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말을 내뱉기에는 벨로나 공작이 너무 차갑고 경멸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몰랐다.
벨로나 공작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신경 쓰고 있다고 한 것은 가구가 아니라 ‘펠리시아’와 ‘란셀’이었음을 말이다.
“그 여자가 당신과 아이에게 어떻게 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야. 지금 다정하게 군다고 해도 너무 믿지는 마.”
“유념하고 있어요.”
벨로나 공작은 작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펠리시아가 듣지 못할 정도였다.
“유념으로는 부족한데… 보아하니 글렀군.”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뒤로하고는 다정하게 펠리시아를 안았다.
“당신이 잘할 것이라고 믿고 있어.”
“란셀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내조할게요.”
“그렇게 해줘. 내 부인이라는 여인은 나와 가문을 잘근잘근 부셔서 자기 입속에 넣을 생각뿐이거든.”
“물론이에요.”
다정다감하게 펠리시아에게 기운을 주고는 벨로나 공작은 그녀의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따스하기만 했던 벨로나 공작의 눈빛은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대기 중이던 세베루스에게 물었다.
“그녀와 아이는 잘 피신했느냐? 그녀의 몸 상태는?”
“그분의 상태가 나아지셔서 위치를 옮기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적을 따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쯧.”
그가 혀를 찼다.
정말 끈질기다 못해서 질리게 하는 여인이었다.
포기할 만도 한데 아직 그들을 찾고 있을 줄이야!
방심을 한 대가가 컸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이 독사 같은 여인의 손아귀에 있게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별로 관심도 없던 이들을 기억에서 꺼내게 되었다.
“한동안 추적은 멈출 것이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내가 준 장난감을 망가뜨릴 생각에 기분이 좋을 것이니까.”
란셀과 펠리시아가 벨로나 공작령에 온 이유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시선을 잡아줄 장난감들이었던 것이다.
오자마자 한바탕할 줄 알았는데 환대라니…….
도대체 무슨 음흉한 수작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잠시 관심을 돌린 사이에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은밀하게 이동시켜야 한다.”
“최대한 빨리 진행해 보겠습니다.”
세베루스가 고객를 살짝 숙이며 빠르게 대답했다.
* * *
펠리시아가 각오를 단단히 한 것에 비해서 그녀는 빠르게 벨로나 공작가문에 적응해 갔다.
그녀를 따르는 고요인들도 나름대로 생겼다.
“부인, 부인이야 말로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으로 어울리는 분이세요.”
“맞아요. 부인처럼 다정하고 능력이 있는 분이 공작부인이 되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계신데 어찌 그런 말을 하니?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것이야.”
펠리시아는 엄하면서도 걱정이 담긴 말투로 고용인들의 과한 발언을 자제시켰다.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그들의 말을 향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고용인들이 그런 그녀에게 아양을 떨듯이 말했다.
“역시 생각이 깊으세요.”
“저희 같은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벨로나 공작가문에서 그녀는 편안함과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몰락 귀족이었을 때도, 벨로나 공작님의 아이를 낳아 길렀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우월감은 마약과 같았다.
이것만으로 감동스러운데 끝이 아니었다.
북부 사교계에서도 정부임에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머, 미래의 공작부인이 아니세요!”
“공작부인께서 들으시면 화내시겠어요.”
“우리끼리 있는데 뭘 걱정하세요.”
“맞아요. 저희는 부인의 사람이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그녀에게 서슴없이 다가와 준 부인들은 그녀의 힘이 되어 줬다.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줬다.
펠리시아가 정부임에도 그들은 그녀를 윗사람으로 대해 줬다.
미래에 공작부인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리라.
자신이 벨로나 공작님의 총애를 받기는 하는구나 싶었다.
“솔직히 페루제 공작부인께서는 한가문의 안주인으로는 어울리지 않으시죠.”
“아내의 덕목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인데…….”
한 부인이 말을 흐리자 펠리시아가 말을 이어 줬다.
“그분이 자기주장이 강하시기는 하죠.”
“그렇죠.”
사교계에서 정부가 나댄다고 별로 좋지 못한 시선을 보내도 좋았다.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부인들이 있었으니까.
벨로나 공작령에 와서 즐겁고 행복한 일투성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란셀은 조용해졌다.
란셀은 입맛이 없는지 포크로 음식을 뒤적거렸다.
“란셀, 왜 이렇게 힘없이 밥을 먹니?”
“엄마.”
“쓰읍, 어머니라고 해야지.”
“어머니.”
란셀은 이곳이 싫어졌다.
좋은 방, 좋은 장난감, 좋은 음식이 있었으나 외로웠다.
이곳에 진정으로 자신과 어머니를 위하는 이들은 없었다.
란셀은 어린 자신도 아는 것을 어머니가 모른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인간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다.
고용인들은 란셀과 펠리시아를 얕잡아봤다.
특히 란셀은 약한 어린아이에다가 사생아였다.
그들에게 란셀은 약자 중에서도 약자였다.
그래서인지 자신들도 모르게 눈빛으로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그 감정은 경멸, 비웃음 등 좋지 못한 것들이었다.
“우리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왜? 여기가 거기보다 더 좋은 옷도 입고 맛있는 것도 먹고 무엇보다 아버지도 계시잖니.”
“여기 싫어요.”
란셀은 말하지 못했다.
고용인들이 펠리시아 앞에서는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굴지만 뒤돌아서면 비웃음을 머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용인들에게 란셀은 그런 감정을 감출만 한 상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약자란 그런 존재니까.
“여기 사람들 싫어요.”
“모두들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 주고 윗사람으로 여기는데 무엇이 불만이니? 혹시 너를 괴롭히거나 그랬니?”
“여기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고요!”
란셀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 앞에서도 어머니처럼 웃고는 뒤돌면 경멸하거나 비웃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표정과 눈빛이 달라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며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나가 버렸다.
란셀은 정원에서 웅크리며 울었다.
“다들 나빠. 여기 싫어.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나도 싫어? 나는 란셀이 좋은데 섭섭하네.”
웅크리고 있던 란셀이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말을 건 인물의 품에 안겼다.
이곳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하는 인물이 나타났으니까.
“형님!”
“나도 싫은 거야?”
“아니요. 형님은 제외예요!”
란델리노가 자신에게 안긴 란셀을 꽉 안아주고 놔줬다.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접혔다.
동생의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내 동생은 울보였네.”
“울보 아니에요!”
란델리노의 말을 부정하며 란셀이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손길을 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 동생이 이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무슨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주렴. 알았지?”
란셀의 입장에서 이 벨로나 공작령에서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여기 와서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시녀들이 하루 종일 치장을 도왔고 자주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란셀을 위해서, 란셀의 미래를 위해서 나간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원래 공작이라는 자리에 있는 책무는 무거워서 쉽게 개인적인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들었다.
그 말이 맞는지 아버지는 가끔씩 얼굴을 비추고 잠시 놀아주고 사라지셨다.
고용인들은 앞뒤가 달라서 무서웠다.
그런 고용인들을 좌지우지하는 페루제 공작부인은 더 무서웠다.
여기에는 또래 친구도 없었다.
가신의 아이들이 올 만도 한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외로움을 버티게 해준 사람이 바로 란델리노인 것이다.
란셀은 자신의 형님이 좋았다.
어머니는 형님을 믿지 말라고 했지만 말이다.
우아한 자태와 다정한 말투 그리고 란셀을 놀아주기 위해서 자주 그를 찾아왔다.
시간이 되면 공부도 같이 해주고 말이다.
“형님, 그러면 형님만 알고 계세요.”
“물론이지.”
누구보다 믿는 형님에게 란셀은 자신이 느낀 감정과 알아차린 것을 전부 말했다.
* * *
그날, 저녁 시간에 란델리노는 란셀의 고용인들을 불렀다.
그것도 어머니의 별채 앞으로 말이다.
고용인들은 손을 떨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별채가 어떤 의미인 줄 잘았다.
눈앞의 장소는 죄인들과 세작들을 고문하는 곳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서 있는 그들을 바라봤다.
란델리노는 나른하게 보이면서도 나태한 표정이었다.
고용인들은 별채와 란델리노를 봤고 란델리노는 고용인들을 봤다.
“내가 왜 너희를 불렀을까?”
“그, 그것이…….”
“죄송합니다!”
이곳에 불려온 고용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몰랐다.
특별히 정보를 빼돌린 적도, 벨로나 가문과 주인내외를 욕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끌려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기 충분했다.
별채를 밖에서 밝히고 있는 불빛들이 마치 핏물처럼 느껴졌고 비명은 귀에 꼭 박혀들어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