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가짜 정부와 완벽하지 못한 사생아
란델리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계자로 삼고 싶은 아들이 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아들까지 데려왔는지 말이다.
무슨 흉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까 어머니의 말과 여유로운 태도에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였다.
방심은 패배를 불러오는 요소 중 하나였다.
“양육비만 보내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란델리노는 그것을 잘 알았다.
어머니는 자잘한 것을 숨기고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사생아를 이곳에 들일 생각까지 하게 만들까?
“무엇을 하셨길래요?”
“그이가 숨긴 이들을 찾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들이 숨은 곳을 파악했단다.”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무언가 하셨군요.”
“작은 장난 하나를 쳤지.”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참으로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능청스러움은 덤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그들을 데려와서 시선을 끌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듯이 아버지도 어머니를 잘 아니까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들을 찾아서 데려오면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녀가 남편이 사랑하는 여인과 아이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동안 북부 사교계에 정부를 짓밟는 문화를 퍼트리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참는 일을 참지 않으면 유난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지만, 모두가 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투기하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정부를 때리는 문화를 퍼트린 당사자가 바로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알고 가만히 두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했다.
정부 때리기 문화를 정착한 인물이 자신이 만든 문화를 부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포기하신 줄 알았어요.”
“그이가 포기했으면 나도 포기했을 거야.”
란델리노는 감탄했다.
어머니의 끈기는 정말 존경스러웠다.
포기하지 않음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결국에는 만들어 내니까.
란델리노가 웃자 페루제 공작부인도 웃었다.
곧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가 오는구나.”
“친히 마중하시는 것입니까?”
“새로운 가족이잖니? 정답게 맞이해 줘야지.”
란델리노는 하찮은 정부와 사생아를 직접 맞이하러 간다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은 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때리거나 그에 준하는 뭔가를 하게 되면 근거가 되었다.
투기가 아니라 잘못을 훈육하는 것이라는 근거가 말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눈 가리고 아웅이기는 하다.
당연하게도 그 눈 가리고 아웅조차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갑자기 생긴 동생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렇지? 그러면 같이 내려가자구나.”
그녀는 아들의 팔짱을 끼며 걸어나갔다.
그들은 우아하게 웃었다.
마차가 성을 들어와서 드디어 섰다.
그 마차를 호위하던 벨로나 가문의 기사들은 움찔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서 있었으니까.
“공작부인, 어찌 이렇게 나와계십니까?”
“새로운 가족이 오는데 어찌 방 안에만 있겠는가? 환영을 해야지.”
“동생이 없어서 적적했는데 정말 좋습니다.”
어느 부인이 남편의 정부를 이렇게 환영할까?
어느 아들이 사생아 형제를 이렇게 환영할까?
그것은 기사들에게 든 생각이었다.
그들은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고 뭔가 기대하는 것처럼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치 알아서 뱀의 입으로 들어오는 먹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기사들은 이대로 마차 안의 여인과 페루제 공작부인을 만나게 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를 막을 명분이 없지 않은가.
엄연히 페루제 공작부인이 윗사람인데 그들이 그녀보고 물러나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서 마차 문을 열어 줘요. 마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 동생을 맞이하는 것인데 제가 열어 줘도 될까요?”
먹이를 보던 눈빛은 어느새 따스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란델리노의 말에 박수쳤다.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그래. 형이 동생을 환영해 주면 아이도 여기에 적응을 더 빨리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역시 내 아들이구나.”
페루제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손을 올려서 란델리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대견함이 느껴졌다.
란델리노는 그녀의 허락이 끝나자마자 마차의 문을 열었다.
기사들이 막을 새도 없었다.
“부인, 어서 내리시지요. 안녕? 네가 내 동생이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주홍빛 머리카락의 여인과 아이가 마차에서 내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엉거주춤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란델리노의 손을 잡고 내리자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가왔다.
“어서 와요! 얼마나 오기를 기다렸는지 몰라.”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눈앞의 여인을 안아줬다.
란델리노를 제외한 모두가 움찔거렸다.
어떤 여인이 남편의 정부를 만나는데 이렇게 할까?
아무리 페루제 공작부인이 벨로나 공작을 사랑하지 않아도 질투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녀도 사람인데 벨로나 공작이 여인을 들이면 질투하며 추하게 굴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정부 그 당사자는 더욱 그러했다.
워낙 악명이 자자해서 각오하고 온 것이었다.
정부는 자신이 각오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몰랐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올 것이 아니라 도망을 쳐야 했음을 말이다.
그녀가 북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북부 언저리에서라도 살았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인데 불쌍하다.
“네가 그이의 아이구나. 그이를 닮아서 총명함이 보여.”
“저와 친형제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녀가 아이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호의적으로 굴었다.
그러나 9, 10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시체처럼 차가운 손에 놀라서 어머니의 뒤에 숨었다.
“란셀, 어서 인사를 드려야지!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이가 낯을 가릴 수 있지.”
“맞습니다. 차차 나아지겠지요.”
란델리노까지 아이의 편을 들었다.
분위기가 참으로 좋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친한 사이인 줄 알았을 것이다.
정부와 본부인, 정실자식과 사생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갑작스러운 상황과 여정에 모자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이를 눈치 챈 란델리노가 말했다.
“어머니, 두 사람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군. 어서 가서 쉬시게.”
이곳에 정부를 더 세워 놓고 싶었으나 아들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쉬게 해준다는 말이었다.
정부가 피곤하든 말든 억지로 세워 놓으려고 했었다.
란델리노는 잠시 저들 모자를 동정했다.
첫 만남에서 환영을 가장한 엿 먹이기를 시전하려고 한 어머니였다.
나중에 저들이 이곳에 적응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배려와 환대에 감사합니다.”
“윗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지.”
그녀가 위엄 있게 말했다.
차갑고 독기가 있는 듯한 말투였다.
정부가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 말투는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다정하게 시녀와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어서 이들을 안내하렴. 귀한 이들이니 신경을 써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이리 따라오시지요,”
“알겠네.”
그들은 정부와 사생아를 정중하게 안내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방 하나를 열었다.
란델도 란셀의 어미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풍적인 가구들과 장식들은 누가 봐도 그 가격을 감히 평할 수 없었다.
이 방 하나를 꾸미는데 얼마나 큰 금액을 썼는지 가늠하지 못하게 했다.
“이 방이 란셀님의 방입니다.”
“정말로 제 방이에요! 이런 멋있는 방은 처음이에요!”
란셀은 난생처음으로 본 고급진 방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이 신나서 방방 뛰었다.
게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난감들이 큰 상자에 쌓여 있었다.
신나 하는 아들의 모습에 그녀는 난감해했다.
“이, 이런 방을 란셀이 써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사생아에게 주기에는 과한 방이었다.
그 반응에도 고용인들은 무덤덤했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만 있었다.
“공작부인께서 아낌없이 귀함을 받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의 입장에서 부족하실 수 있으시겠군요.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예전에 란델리노 영식께서 쓰시던 방을 새롭게 꾸민 것입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그녀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자신이 공작부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처럼 시녀가 말했으니까.
이곳에 온 첫날부터 공작부인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가문의 유일한 장남이 쓰던 방을 줬다.
어린 시절에 쓰던 공간이겠지만 자신의 공간을 내준다는 것은 얼마나 상대를 우호적으로 생각하는지 보여줬다.
“아, 아닐세.”
“다행입니다. 그러면 부인의 방을 보시러 갈까요?”
“엄마, 저는 여기에 있어도 될까요?”
란셀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어서 눈을 반짝였다.
이럴수록 벨로나 공작이 야속했다.
그는 양육비를 부족하게 주지는 않았다.
딱 중산층 평민이 살 정도로 줬다.
이런 귀족들이 쓰는 장난감은 보러 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무려 벨로나 공작의 아들임에도 말이다.
벨로나 공작의 아들임을 밝힐 수도 없었다.
말하는 순간에 양육비 지원을 끊어 버리겠다고 했으니까.
사람들은 하룻밤 실수로 생긴 자식도 외면하지 않은 좋은 분이라며 정체 모를 귀족 아빠를 칭송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벨로나 공작은 그녀에게 아들을 만나러 오지 않는 아비, 의무적인 양육비만 주는 아비, 자신과 아들을 하룻밤의 치부로 생각하는 나쁜 남자였다.
“그러렴.”
“네!”
“이따가 시녀를 통해 란셀님을 부인께 안내하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랬던 무심한 이가 자신들을 데려왔는지 모른다.
* * *
그녀는 벨로나 공작의 예고 없는 방문이 일어난 날을 떠올렸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 있었다.
“대접할 것이 이곳 밖에 없네요.”
“되었네.”
벨로나 공작이 먹기에는 하찮았을까?
손님을 생각해서 내온 차를 거부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외면하다가 찾아온 이유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뾰족하게 말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그동안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으시잖아요.”
“그동안 내가 무심하기는 했지.”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는 란셀에게 좋지 않은 아비였으니까.
“펠리시아, 내가 생활비만 주고 그대와 아이를 외면했어. 진심으로 후회하네. 앞으로는 내가 보이는 곳에서 그대들을 보살펴 주고 싶어.”
“제가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귀족이에요. 연회에서 하룻밤 실수였더래도 아이를 제대로 대우해 주셨어야지요.”
참으로 이상했다.
벨로나 공작에게 이제야 잘못을 알았냐며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데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로하고 싶었다.
자신의 출산 소식을 듣고 벨로나 공작은 그녀와 아이를 북부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쫓아냈다.
귀족의 정부도 아니고 운이 좋아서 아이 하나 잘 낳아서 편히 산다는 수군거림을 참고 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 고마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등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가족들이 자신에게 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