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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55화 (155/221)

155화 사생아와 그 어미

알펜 왕국의 사회에서 초유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일.

그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페루제 공작부인 암살 미수 사건이다.

사교계에서는 그녀가 왕실 조사관 대표를 질책했고, 그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공작부인께서 눈을 노려보시니 제임스 말콤 자작이 어버버하며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들었어요.”

“말콤 자작이 밤마다 공작부인이 나타나는 악몽을 꾼다고 하네요.”

“공작부인을 조사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그 이야기는 살을 붙이면서 자극적으로 변했다.

들을 가치도, 말할 가치도 없는 말들이었다.

그 과장된 이야기 중에서도 황금 같은 대화는 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람 중에 삼류는 없었다.

“말콤 자작이 조사관들을 두고 홀로 왕성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폐하에게 반드시 보여줘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말이겠죠.”

“페루제 공작부인과 만나고 바로 돌아갔을 것이니.”

“그 무언가를 페루제 공작부인이 줬겠죠.”

이류 이상의 사람들은 암살 미수 사건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임스 말콤 자작은 뛰어난 조사관으로 정평이 났다.

그런 그가 조사 현장을 뛰쳐나가자마자 왕궁으로 갔다.

그 어떤 조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우위를 페루제 공작부인이 점쳤다는 것이다.

“과연 페루제 공작부인이 준 ‘무언가’는 무엇일까요?”

“그러게요. 이번 건국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네요.”

“무엇이든 친왕파가 수세에 몰릴 일이 벌어지겠죠.”

귀족 사회의 모든 저명인사과 영향력 있는 거물들이 이번 건국제를 주시했다.

그들은 아직 폭풍이 오지도 않았는데도 난리였다.

* * *

귀족 사회고, 나발이고 그건 지금의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테라스에서 우아하게 차향을 맡고 있었다.

은은한 바람이 기분을 좋게 했다.

자신이 정성껏 가꾼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실리, 역시 그대가 타주는 차가 가장 내 취향에 맞아.”

“과찬입니다. 모시는 분의 수준에 맞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뿐이니까요.”

“겸손함은 귀족의 덕목이지.”

실리는 담담하게 그녀를 높이고 자신을 낮췄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분이 좋게 하는 말이었다.

아무런 과장도 사심도 없어서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때였다.

똑, 똑, 똑!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노크 소리는 감정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으나, 두 번째부터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노크였다.

“란델리노입니다. 어머니.”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고 귀족다운 품위를 유지한 란델리노가 들어왔다.

그는 전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우아한 어머니를 닮은 아들’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런 아들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아직 같이 차를 마실 시간이 아닌데 왜 벌써 왔느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서 어머니께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이리 급히 왔습니다.”

그는 반듯하게, 진심을 담은 듯한 눈빛을 보냈다.

란델리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면서도 그녀는 순진한 눈망울을 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구나. 이리 급히 올 만큼 중요한 일이니?”

“어머니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는 일이지요.”

란델리노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려는 손을 억지로 풀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 조심해야 한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아들은 완벽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도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구나. 알려 주렴.”

“어머니가 그리 말씀하시면 말해야지요.”

그가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말투와 표정 어느 것 하나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모습을 훑었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서 입에 댔다.

그러면서 아들이 아닌 밖에 시선을 뒀다.

“아버지가 여인을 데려왔더군요.”

“그래. 그렇다고 하더구나.”

란델리노도 어머니를 따라서 찻잔을 들어서 한입 마셨다.

“아이도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내아이요.”

“그 여인이 낳은 아이라고 들었다.”

벨로나 공작이 여인과 아이를 데려왔다.

그 여인이 벨로나 공작의 정부이고 아이는 사생아일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었다.

지나가던 거지도 알 만한 관계였다.

“어머니께서는 그 결정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생아를 내 자식으로 입적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반대해야 하니?”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쿠키를 한입 먹었다.

여유로웠고 근심이 없었다.

란델리노의 한쪽 눈썹이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어머니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벨로나 공작이 사생아를 데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그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입적한다고 하신다면 막으실 것입니까?”

“글쎄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페루제 공작부인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란델리노가 후계자에서 밀린다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란델리노의 안위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런 분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어머니는 가문을 위하시는 분이시지요, 어머니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것은 가문을 위한 것이겠지요.”

“내가 사생아 입적을 찬성해도 괜찮다는 뜻이니?”

시선이 란델리노에게 향한 그녀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사생아가 벨로나 공작 가문에 입적되면 아들의 입지가 어떻게 될지 알았으니까.

가문의 가주가 지지하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이 흔들릴 수 있었다.

이제껏 쌓아놓았던 세력과 인맥이 허상처럼 무너질 것이다.

사람들은 갈대처럼 상황에 따라 오랫동안 이어진 것들을 매정하게 끊어내니까.

“아니요.”

“그러면 불만이라는 뜻이니?”

“그것도 아닙니다.”

“찬성은 하지 않으나 불만은 없다니 신기한 대답이구나.”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옅은 미소가 있었다.

어떤 말을 하는지 기대가 된다는 얼굴이었다.

“가문을 위해서 한 결정이니 불만은 없습니다. 반대하는 이유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서 귀찮아서고요.”

“귀찮은 일?”

“자잘하게 문제를 일으킬 요소를 치워야지요.”

그녀가 서늘한 눈빛으로 엄중하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아이를 꾸짖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과한 자신감과 방심을 경계하도록 말이다.

“입적하는 순간에 그 아이도 적통이 된다. 그리고 그이는 너보다 그 아이를 지지할 것이야.”

“제가 그따위 녀석에게 질 것 같습니까?”

란델리노의 대답에는 그 사생아가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능력이 있어도, 벨로나 공작의 지지를 받아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란델리노는 아직 어렸다.

꿈속의 기억이 있다고 한들 아직 청소년이었다.

호르몬으로 인해 심리 변화가 많을 시기였다.

“저는 그 사생아와 비교가 된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따름입니다.”

“비교되는 것 자체가 말이냐?”

순간의 감정이 이성을 넘을 때가 자주 있었다.

하필 그 순간이 어머니 앞에 나타났다.

란델리노의 모습은 딱!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아들이었다.

그의 언행은 우아한 귀족과 어울리지 않았다.

말을 뱉고 나니 아차 싶었다.

석궁 사건까지 있었던지라 더 눈치가 보였다.

어머니가 아직 완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면 이것을 빌미로 자신을 누르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미안하구나.”

“예?”

석궁 사건이 잘 넘어가기는 했어도 신경이 쓰였다.

후계자 문제에 관해 어머니의 의심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겉으로는 다정해도 어머니가 속으로는 자신을 날카롭게 바라보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생각이 무색하게 사과의 말을 들었다.

무려 페루제 루비로즈에게서 말이다!

이 말을 타인에게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일반적인 사과와 달리 담담했고 깔끔했다.

무릇 사과란 상대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네가 사생아 따위를 견제하며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

“그런데 마치 너와 사생아 따위가 동등하다는 식으로 말을 했으니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겠느냐.”

역시나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 사생아와 자신을 경쟁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란델리노 자신에 비하면 상대는 너무 하찮다고 여긴 것이다.

가주의 지지도 자신의 아들을 흔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말이 아들에게 모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모든 생각에는 자신이 기른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사과를 해야지요. 어머니의 말씀에 과하게 반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무리 내가 어른이라고 해도 잘못을 했으면 인정해야지.”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석궁 사건으로 어머니가 불신을 풀어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의심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이런 놀람은 뒤로하고 이곳에 예정보다 일찍 온 목적을 꺼냈다.

“어머니, 지금 이곳으로 오는 그 여인과 사생아는 진짜가 아닐 것입니다.”

“왜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란델리노는 꿈에서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여인과 그 아들을 보지 못했다.

왜냐고?

사람들을 시켜서 죽였으니까.

아버지가 깊게 숨기고 아끼며 사랑한 그들을 끝까지 찾아서 죽였다.

그리고는 관에 담아서 아버지에게 선물로 바쳤다.

그게 란델리노가 아버지에게 주는 증오이자 사랑이었다.

물론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얼굴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초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아직 그 여인과 사생아를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정을 갈구했던 만큼, 아버지를 증오했던 만큼 그는 아버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면 어머니가 찾지 못하는 곳에 더 깊숙이 그들을 숨겼을 것이니까요.”

“맞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찾지 못했지.”

페루제 공작부인도 벨로나 공작이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이 지금 오고 있는 이들이 아님을 알았다.

“그들이 가짜인 것을 아시는데 어찌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까?”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녀가 빠르게 대답하고는 밖을 바라봤다.

란델리노도 그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곳으로 향하는 마차와 기사들이 보였다.

“너는 그 사생아가 가짜라고 하는데 완전히 가짜는 아니다.”

“진짜 아버지의 핏줄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완전한 가짜는 아니다.

그 말은 벨로나 공작의 핏줄이지만 그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런 아들을 데려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놀라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관심도 없던 아들을 데려올 정도로 벨로나 공작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싫어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지하는 란델리노를 쫓아내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그 속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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