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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54화 (154/221)

154화 란델리노의 자신감

아후라 마스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심계가 보통이 아닌 사람 같은데?”

“무슨 소리야! 페루제처럼 거짓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말을 해. 오죽하면 타락한 성물이 정화가 되었겠어.”

“그건 성물 정화를 시킬 만큼 욕망에 충실해서 그런 거고.”

신전에서 성물이라고 지정해 놓은 것은 아후라 마스다의 힘이 담긴 것들이었다.

그 힘에 자아가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정령을 탄생시키고 관리하는 정령왕이었으니까.

성물은 정령이 사는 집이라고 보면 된다.

고로 아후라 마스다가 타락한 성물이 정화된 이유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너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네가 해주고 있잖아.”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지. 시킨 것은 결코 아니야.”

세상에서 신 다음으로 높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볼 수 없으며, 그 안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그들이 만나본 적이 없는 창조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자꾸 그런 말을 할 거면 얼른 빛의 정령계로 돌아가.”

“하아, 알았다. 그만 말할게.”

아후라 마스다는 페루제 루비로즈가 에레보스의 행동을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단호한 벗의 태도에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솔직히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가.

그것이 단순히 추측일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라보 공작이 가문 내부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며칠이 지났다.

란델리노는 <푸른 뱀>의 단장인 푸르푸르를 여유롭게 기다렸다.

목숨을 건 도발이 성공했다는 것은 그에게 성취감을 줬다.

그 기다림에 화답하듯이 문밖에서 시종이 말했다.

“푸르푸르 단장이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하게.”

문이 열리고 푸르푸르 단장이 들어왔다.

그는 웃으면서 인사했다.

“란델리노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푸르푸르 단장, 어서 오게. 내가 바빠서 이제야 그대를 초대했네. 이해해 주게.”

란델리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푸르푸르는 그 손을 잡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얼굴색을 보니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군.”

“뭐, 각오했던 일입니다.”

란델리노는 푸르푸르 단장의 얼굴을 차분히 세심하게 관찰했다.

전에 봤을 때보다 살도 빠져 있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로빈이 극한 분노를 전부 풀고 있는 것이 뻔했다.

로빈 자신이 <다섯 뱀>을 총괄하는 단장이라고 해도 멋대로 <푸른 뱀>의 단장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해임할 명분을 줄 상대도 아니었고 말이다.

“일단 앉게. 그대가 왔으니 곧 음식들이 올 것이야.”

“주군의 입맛에 맞는 요리사들이 한 음식이라니 기대가 됩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허투로 하는 법이 없었다.

하나하나 자신의 품격에 맞는 것을 찾았다.

내정 관리부터 개인적인 옷차림까지 세세하게 봤다.

그런 사람이 음식이라고 다를까?

그녀의 높은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실력자여야 했다.

푸르푸르는 지금 페루제 공작부인의 높은 수준을 칭찬한 것이다.

란델리노와 푸르푸르 2명만 있는 공간에서 말이다.

란델리노가 장담한 것처럼 고용인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에피타이저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메인 요리까지 먹게 되었다.

그들은 스테이크를 썰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음식은 어떤가? 입맛에 맞는가?”

“역시 주군의 입맛을 만족시킬 만한 요리들입니다. 역시 주군께서 완벽하십니다.”

푸르푸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푸르푸르가 살면서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으니까.

과연 자신의 주군은 하나부터 열까지 최고를 원하는구나 싶었다.

먹은 음식 중에 과하게 달거나, 맵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 것도, 매운 것도 적절하여 포만감을 극대화시켰다.

“나도 그런 어머니를 본받아서 노력 중이지만 아직 부족해.”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백작님을 칭찬합니다.”

“지금에 만족하려면 지금의 위치에 만족해야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안 되더군.”

푸르푸르 단장이 스테이크를 썰던 손을 멈추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놓았다.

그리고는 란델리노와 시선을 진지하게 마주했다.

훈훈했던 분위기는 빠르게 싸늘해졌다.

란델리노는 자신이 페루제 루비로즈의 후계자가 되고 싶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감히 주군이 정정한데 후계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 상대가 주군의 마음에 없는 인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그리 생각했다면 그때 나를 구하지 않았겠지.”

맞는 말이다.

정말 지금의 상황이 유지되기를 원했다면 그가 죽도록 놔뒀어야 한다.

그래야 주군의 조카이자 로빈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쉬웠다.

그의 행보는 자신이 주군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함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석궁 사건 전에는 조심하는 기색이라도 보였지, 지금은 대놓고 그러고 있었다.

푸르푸르 자신과 대놓고 만나는 것이 그 예이다.

이상한 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대는 로빈 단장을 따르지 않아. 그리고 그대가 따르는 이는 로빈의 아들을 반대하고 있잖아.”

“루비카 남작님에게 들으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염두에 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푸르푸르는 사실대로 말했다.

여기서 돌려 말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서로가 가진 패나 의도를 직설적으로 말하고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시간이 흐르는 현시점에도 주군의 조카는 성장하고 로빈은 힘을 키우고 있었다.

“알아. 그렇지만 이제는 나를 확실하게 밀어줘야 할 것이야.”

“오만한 발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너무 높이는 것 아닙니까?”

푸르푸르 단장은 과한 자신감을 질책했다.

후계자가 정해진 것도 아닌데 너무 자신만만했다.

란델리노는 그 질책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너무 자신을 낮추는 인물에게도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자신의 능력과 자질에 비해 과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에게도 사람은 모이지 않습니다.”

“부모의 뒤를 자식이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 순리다. 그리고 나는 자질과 능력도 충분하지.”

그는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말했다.

담담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푸르푸르가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보면 진짜 루비로즈의 핏줄인 줄 알겠군요.”

“그건 상대도 같지.”

“그게 무슨?”

“왜 나의 사촌이 루비로즈의 핏줄이라고 확신하지?”

“주군께서 핏줄도 아닌 상대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할 리가 없으니까요.”

페루제 루비로즈는 오직 루비로즈 가문만을 위해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가문의 핏줄이 아닌 인물을 후계자로 앉힐 리가 없었다.

혈통에 관해 조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며 허술하게 조사한다는 것은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서? 그거야 말로 편견이지. 생각해 봐.”

“편견이라고요?”

그런데 로빈의 아들이 페루제 루비로즈의 조카가 아니다?

라스타 왕국의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가정이었다.

그 페루제 루비로즈가 마음에 둔 후계자 후보였으니까.

“어머니의 사생아 동생인 아델 이모님이 과연 외할아버지의 딸일까?”

“동생이니까 받아들인 거겠지요. 누구의 조카인지 생각해 보시지요.”

푸르푸르 단장의 말에 란델리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꿈속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사촌이라는 녀석이 루비로즈의 핏줄이 아니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인물은 완벽했고 틈이 없었으며 자신의 핏줄에 자부심을 가졌다.

“외할머니를 어머니가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고 믿었고 존중했지.”

“그 말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외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야. 그런 외할머니가 인정한 사실을 굳이 확인해서 바꾸고 싶었을까?”

푸르푸르 단장은 옅은 신음을 내며 생각에 잠겼다.

란델리노의 주장은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어머니 사랑은 유명했으니까.

그녀의 어머니가 유일무이한 루비로즈 가문의 안주인이라며 2명의 계모를 지워 버렸다.

법적으로 루비로즈 백작은 재혼한 적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두 번째 계모의 가문을 몰살해서 그 존재 자체를 찾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첫 번째 계모의 가문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봐 납작 엎드리며 살았다.

아니, 자신들이 알아서 먼저 첫 번째 계모를 법적으로 없는 사람으로 처리했다.

그녀는 공식서류에는 태어난 적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라스타 왕국에서는 누구도 대놓고 루비로즈 백작과 재혼했던 여인들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과거 자신의 어머니에 관해 뒷담화를 하던 부인들도 말년에 좋지 못한 꼴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욕하는 것은 넘어가지만 어머니와 가문을 모욕하는 것은 참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아델 이모님을 친동생으로 여기며 살라고 했다지. 어머니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델 이모는 핏줄 여부와 관계없이 루비로즈 가문의 사람이 된 거야.”

“루비로즈 백작부인의 말씀을 따른다. 의혹을 가지기에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누구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가정이지만 한번 떠올리면 의심을 지우기 어려운 가정이기도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생아 동생을 낳은 어미 되는 인물이 아델을 임신한 시기가 애매하기는 했기 때문이다.

루비로즈 백작의 총애를 잃고 오지 않기 직전이나, 그 직후에 임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총애를 잃기 직전에 임신했다면 루비로즈 백작의 자식이 맞았다.

그러나 총애를 잃은 후라면 당연히 남의 자식이지 않겠는가!

“어느 가문에서 핏줄도 아닌데 가문의 아이로 받아들입니까? 사생아도 핏줄임에도 인정받기 얼마나 어려운데요.”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

루비로즈 백작부인이 사생아와 그 정부를 거둬서 당시에도 루비로즈 백작의 자식이라서 받아들였구나 하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설마 가문의 안주인이 가주의 자식도 아닌 이와 그것을 속인 정부를 받아들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현숙하고 자애로운 분이셨다고 들었어. 아마도 그들을 보호해 주려고 외할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했을 거야. 물론 그분도 어머니가 가짜의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둘 줄은 예상하지 못하셨겠지.”

“그럴듯한 이야기군요.”

푸르푸르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위 여부를 몰라도 한번 말이 퍼지면 상대의 정당성에 큰 상처를 남길 주제였다.

그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로빈과 그 무리에게는 큰 타격이 올 것이다.

후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치명적인 결함이니까.

“게다가 어머니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나의 어머니이자 그대의 주군인 여인은 그 유명한 페루제 루비로즈야.”

“…….”

푸르푸르 단장은 속으로 인정했다.

란델리노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혹하는 면이 있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만 같았다.

‘페루제 루비로즈라서 가짜 핏줄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할리가 없다’에서 ‘페루제 루비로즈라서 뛰어난 타인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로 말이다.

란델리노는 살포시 웃으면서 여기에 쐐기를 박기로 했다.

“뛰어난 아이를 가주로 삼고 방계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면 루비로즈의 혈통은 지킬 수 있다. 그리 생각하셨겠지.”

“…….”

“어머니의 높은 안목을 만족시키면서 루비로즈 가문에 영광된 미래를 가져다줄 인물은 나,란델리노이고 말이야.”

푸르푸르는 받아들어야 했다.

눈앞의 소년은 오만하지 않았다.

충분히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알았고 자신이 앉아야 할 영광된 자리를 알았다.

“이 식사가 끝나면 ‘노엘’님에게 란델리노 백작님을 지지해야 한다고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고맙네. 나도 그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드디어 란델리노는 라스타 왕국의 비공식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푸르푸르의 제안 혹은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루비카 남작의 조건 중 하나가 성사되는 것이다.

그들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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