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에레보스가 본 페루제 루비로즈
순한 눈빛으로 걸으니 아무도 그녀가 ‘페루제 공작부인’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평범한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에레보스가 그들의 존재감을 낮춘 덕도 있었다.
“페루제, 무슨 일이 있어?”
“응? 타나토스, 왜 그런 말을 해?”
에레보스의 물음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우울해 보여서 말이야.”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티가 났나 보구나. 걱정시키기 싫었는데 말이야.”
그녀가 손을 뺨에 대며 난감해했다.
그러면서 우울함을 머금은 미소를 지었다.
보기만 해도 씁쓸했다.
모르는 사람이 그 미소를 봤다면 자신의 손수건을 줬을 만큼이었다.
“너의 힘을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자꾸 쓰게 되네. 점점 동등한 친구가 아닌 것 같아. 이용만 하는 듯해서 미안하네.”
“왜 그런 말을 해! 정령이 계약자의 소망을 이뤄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에레보스는 울컥했다.
“그렇게 착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응?”
그래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헛소리 들은 사람마냥 눈이 커졌다.
그 정도의 개소리였다.
다행히도 에레보스는 눈치 채지 못했다.
에레보스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계약자는 너무 착했다!
그는 인간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의 계약자가 저렇게 선량하고 신의가 있으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물론 인간들 사이에서 그녀가 잔인하다는 말이 도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원래 인간은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에레보스가 보낸 세월, 보아 온 인간들, 계약자들을 경험하고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내가 착하다는 이야기는 정말 오랜만이네!”
“네가 정말 착하니까!”
“권력을 가질수록 그런 말을 듣기 어려워져.”
“내가 자주 말해 줄게. 너는 착하다고 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에레보스는 발을 동동거렸다.
계약자가 자신의 진심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이 억울한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그녀가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이 들으면 화를 낼 말이잖아.”
“어둠의 정령 계약자 중에는 개인적 원한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놈도 있었어.”
“책에 나오는 어둠의 정령 계약자?”
“그래! 인간의 기록에는 없지만 자기 왕국을 멸망하기 해달라거나 대륙을 통일하고 싶다거나 하는 놈들도 있었어.”
“그렇구나.”
에레보스의 계약자 중에는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계약자도 있었다.
계약자의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려서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머지 계약자들도 그에 준하는 희생자를 야기하는 소망을 가졌었다.
그런 계약자들로 인해 죽은 사람 수는 헤아리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들이 죽인 사람들에 비하면 너는 새의 발에 난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다는 거야.”
그에 비해 페루제 루비로즈는 어떤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빠른 결단과 행동력을 내릴 줄 안다.
그러면서도 명분이 없다면 자신의 이득을 쫓지 않는 배포를 지녔다.
그뿐만이 아니다.
불의와 부당함을 참지 않고 약자를 보호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야말로 성모의 칭호에 어울린다.
이러다가 사악한 이들에게 해를 당할까 걱정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에레보스를 빤히 바라봤다.
다정한 웃음은 함께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농담하는 말투였다.
“틀린 말이 아니네. 그런 천박한 인간들과 달리 나는 지적이고 우아하니까.”
자신만 봐주는 그 시선이 좋았다.
거기에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살의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추악함도 없었다.
자신의 친구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 감정을 감추려고 헛기침했다.
“흠흠. 이야기가 잠시 샜네. 하여튼 네가 지금은 잘 나가고 있어도 나중 일은 모르는 법이야. 어떤 사악한 것들이 흉한 짓을 할 수 있어. 너무 그렇게 착하게 굴지 마!”
“…….”
물론 어둠의 정령왕인 자신이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말이다.
에레보스는 페루제 한정으로 콩깍지가 씌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페루제 공작부인의 어이없어 하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네가 그 인장을 가져오라고 말한 것이 아니잖아! 내가 원해서 가져온 것이라고!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내가 괜한 푸념만 하지 않았어도 네가 그리하지 않았겠지. 신전 아카데미에서 학대받는 아이가 있는지 봐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는데 말이야.”
에레보스는 그녀 덕분에 살육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
그가 기대하고 기다리던 그녀의 첫 번째 요청은 ‘좋은 일’이엇으니까.
라스타 왕국에서 벌어진 혁명에서 살려 둔 아이들을 모아 둔 신전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학대받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어둠의 정령들이 아이들을 관찰하고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이 되면 에레보스에게 알려 줬다.
어둠의 정령들은 그 일을 좋아했다.
그들과 계약하려는 작자들은 하나 같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존재들이었으니 그들에게 이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동시에 누군가를 구했다는 보람도 있었고 말이다.
실제로 아카데미 내 어른들에게 학대당할 뻔한, 학대당한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 너는 그거 하나만으로 충분했는데 내가 멋대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마음을 편히 가져.”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그러는 것이 맞겠지?”
“그럼. 그게 맞아.”
“고마워.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그래. 다행이다!”
“그리고 네가 가져온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졌어. 그것도 고마워.”
“언제든지 난감한 거 있으면 시켜!”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을 훔쳤다가 다시 돌려놓은 범인은 어둠의 정령왕인 에레보스였다.
정확히는 그가 라보 공작가문에 서식하는 어둠의 정령들을 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라보 공작은 애먼 고용인들을 잡아다가 끌고 갔다는 것이다.
억울한 목숨들만 죽어나가게 될 예정이었다.
* * *
어둠의 정령왕.
창조신 아래의 만물 중 가장 높은 두 존재 중 하나다.
그런 에레보스는 계약자와 즐거운 산책을 마치고 정령계로 돌아왔다.
어둠의 정령들이 있는 아늑한 세계에서 그는 다음에는 그녀와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어둠만 있는 공간에 빛이 들어왔다.
빛의 정령왕인 아후라 마스다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후라 마즈다라고 부르기도 했다.
“웬일이야. 저번에 빛의 정령 뒷목 잡고 던져 버린 일로 오고는 한동안 오지 않았잖아.”
“내가 얼마나 권속들의 항의를 받았는지 아냐? 솔직히 너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기력이 빠진 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아후라 마스다가 얼마나 권속들에게 시달렸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 아직도 권속들이 그래?”
“겨우 진정시켜 놓으면 다시 그러고, 겨우 진정시켜 놓으면 다시 그러다가 이제 진짜 진정이 되었어.”
엄연히 잘못은 에레보스가 했다.
원래 페루제 공작부인과 계약했어야 하는 빛의 정령을 던지고 계약자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지고한 위치에 있어도 이번만큼은 권속들에게 져주고 있었다.
그들의 서운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다.
“속성도 다르고 나와 동급인 너에게 항의는 못하지. 그래도 내가 그들의 왕이라고 나에게 속상함을 토로하는 것인데 들어주지 않을 수 없어.”
아후라 마스다는 빛의 정령들이 불만을 토로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어둠의 정령왕에게 피해를 입은 중급 빛의 정령이 속한 벨레누스들은 더욱 그러했다.
중급 빛의 정령인 벨레누스.
인간들에게 전해지는 책의 그림을 보면 사자와 비슷했으나 달랐다.
사자의 몸을 가진 벨레누스는 빛나는 비늘이 몸을 감싸고 있으며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 있었다.
또한 겨드랑이쪽에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빛으로 상대가 옳고 그름과 진실됨과 거짓됨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거짓된 자와 그른 자라 판단이 되면 저주를 걸 수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한 마디로 부당함을 참는 애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왈! 왈! 왈! 왈!(어찌 어둠의 정령왕에게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을 수 있으십니까?)”
“아르르릉, 아르르릉(정령 계약의 원칙을 이런 식으로 깨다니요! 아무리 에레보스님이라고 해도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카르릉!(권속을 지켜줘야 할 왕께서 가만히 계시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빛의 정령왕이라고 해도 갑작스럽게 생긴 불상사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도 에레보스가 계약하기 위해서 그따위로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사고 친 당사자에게 나름 항의를 했다고 여겼는데, 권속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들에게 에레보스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약조했다고 설명했다.
빛의 정령들도 진정이 된 듯싶었다.
“그리고 에레보스의 계약자들이 어땠는지 알잖아. 살육을 당연시하던, 정의와 선의라고는 모르는, 양심도 없는 존재들이었어. 자, 봐. 지금도 비밀리에 그런 일을 하고 있을 거야.”
빛의 정령왕은 그들 앞에 영상을 띄웠다.
아후라 마스다의 실책이었다.
그동안 에레보스의 계약자들과 페루제가 다를 바가 없다는 편견이 만든 실책인 것이다.
“이야! 이 팔찌 예쁘네. 뭐로 만든 거야?”
“최상급에서도 최상급이라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었어. 너 주려고 산 거야.”
“나에게 주려고 직접 산 거야?”
“친구잖아. 이 정도는 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이거는 이번 달 용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껏 해.”
에레보스는 누릴 거 다 누리고 편히 잘 놀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화가 나는데 분노를 자극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만약에 빛의 정령과 계약을 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빛의 정령과 계약을 했다면 최고급 쿠션에다가 온갖 놀이용품 그리고 너처럼 식사가 가능하다면 최고급 음식을 제공했을 거야.”
“나처럼 놀게 할 거야?”
“처음에는 무언가를 시킬까 했는데 말이야. 어차피 내 말을 따를 인간들은 많잖아. 정령 하나 제외한다고 해서 대업에 지장은 없어. 내 무릎에서 쓰다듬을 만한 존재로 있는 것도 괜찮을 듯싶어.”
아후라 마스다는 충격적인 영상에 집중하느라 꺼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영상을 껐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권속들은 다시 흥분했다.
정확히는 벨레누스들이었다.
저 인간 계약자와 계약만 했다면 아주 손쉬운 인간계 생활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자신들은 그 벨레누스가 아닐지라도 피해정령은 벨레누스다.
동료를 위해 나설 줄 아는 벨레누스들은 강하게 짖어댔다.
물론 피해 벨레누스도 함께 짖었다.
“왈! 왈! 왈! 왈!(이게 뭡니까?!)”
“와알! 왕! 왕!(살육에 힘들어 하기는커녕 잘 먹고 잘 놀고 있는데요?!)”
“아르르릉, 캬르릉(인간들은 계약 정령을 부려먹으려고 하는데 전혀 그런 낌새가 없어요!)”
그들의 동요와 분노를 다독이느라 엄청 고생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진땀이 났을 것이다.
점점 짜증이 느끼지는 힘의 기운에 에레보스가 얼른 진심을 말했다.
“진짜, 진짜, 진짜 고맙고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알면 되었어.”
“설마 그 대화에서 네가 볼 줄은 몰랐지.”
“나도 설마 그때에 네가 그런 대화를 할 줄은 몰랐다.”
아후라 마스다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
조심스럽게 꺼내는 것을 보니 고민을 많이 한 듯싶었다.
“그런데 네 계약자 정말 괜찮은 인간이 맞느냐?”
“물론이지. 내가 장담하는데 인간 중에서 가장 완벽한 인물이야.”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인간들은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인물도 범상치 않았다.
아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