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지키지 못한 가문의 인장
국왕은 이가 갈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로 명령을 내렸다.
“얼른 그대의 피를 떨어뜨려 보게.”
“알겠습니다.”
라보 공작이 허겁지겁 품에 있던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에 상처를 내서는 피를 냈다.
그 피는 곧 인장이 찍힌 부분에 떨어졌다.
피가 서신에 닿자 인장에 빛이 났다.
“진짜 인장으로 찍었군.”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습니다!”
라보 공작이 눈을 비벼보며 다시 종이를 봤다.
믿을 수 없었으나 외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서신에 찍힌 인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진짜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이었다.
“지금 눈앞에 이것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하는가!”
“진실이옵니다. 저는 이런 것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가주라는 작자가 가문의 인장을 잊어버렸다고 말하고 싶은가!”
이것이 공론화된다는 것은 라보 공작가문이 절벽 끝자락까지 몰리게 된다.
반왕파와 페루제 공작부인을 지지하는 세력은 라보 공작가문을 몰락하기 위해 힘을 합칠 것이다.
친왕파는 확실한 증거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그, 그렇지만 저는 이런 서신을 쓴 적도 비슷한 일도 꾸민 적도 없습니다.”
“그 악랄한 여인에게 그리 말해 보게. 알겠다고 수긍할까? 수긍하냐고!”
“진짜로 한 적이 없습니다.”
라보 공작은 떨리는 입술로 겨우 말했다.
가문이 자신의 대에서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런 라보 공작을 보자 국왕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가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었으니까.
그가 낮은 저음으로 말을 꺼냈다.
“지금 그 악녀가 이것을 나에게 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이거 하나 나에게 줘도 라보 공작 그대를 몰아세울 확실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국왕은 다시 화가 났다.
그 악녀는 명백히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불안해하며 떨고 있는 라보 공작과 분노하는 국왕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고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잘못 건들었다가는 라보 공작가문의 몰락에다가 친왕파의 세력 와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으니까.
국왕 자신도 왕권의 약화라는 미래가 될까 무서웠다.
“도대체 인장을 어찌 관리했길래 일을 이렇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라보 공작이 정신을 다잡았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상황이 말해 주는 바는 하나다.
누군가가 가문의 인장을 몰래 썼다는 것이다.
이는 가문의 보안이 뚫렸다는 것과 이어진다.
“당장 돌아가서 인장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쯧. 얼른 상황 파악을 하게.”
“알겠습니다.”
라보 공작이 국왕에게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국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다가 시종장을 불렀다.
“벨로나 공작을 은밀히 불러…….”
“네,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대답하고 몸을 돌려서 나가려고 했다.
국왕이 한 손을 들었다.
“잠깐!”
“네. 폐하.”
“벨로나 공작을 부르지 말거라. 다른 이를 은밀히 부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부르면 되겠습니까?”
벨로나 공작을 향한 국왕의 의심은 행동으로 서서히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 의심은 이유는 다양했다.
가령 벨로나 공작과 잔인한 여인이 부부라서 벨로나 공작이 자신에게서 돌아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부부 간의 교감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가령 뛰어난 벨로나 공작이 페루제 메디치 루비로즈 백작에게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것이 의도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왕실을 뛰어넘는 가문으로 만들고 싶어서 말이다.
친왕파가 와해되거나 분열이 된다면 그 시작은 국왕이 한 것이었다.
* * *
라보 공작은 빠르게 저택에 도착했다.
그가 마차에 내리자마자 기사 단장에게 말했다.
“당장 저택의 출입을 막아라.”
‘네. 알겠습니다.’
집사가 이런 귀가에 당황하며 다가왔다.
“각하, 오셨습니까?”
“지금 당장 모든 고용인들을 집합시켜라.”
“네?”
갑작스러운 명령에 집사가 당황하자 라보 공작이 그를 노려봤다.
“어서!”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아주 큰 사단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표정이 누구 하나 걸리면 다 죽여 버릴 듯 보였다.
이럴 때에 빠르게 처신하지 않으면 집사조차 큰 사단에 같이 휩쓸릴 수 있었다.
집사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큰 사단’으로 목숨이 위험했다.
그는 집무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그리고는 인장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다행히 인장은 그대로 있었다.
그는 국왕이 던졌던 서신을 펼쳤다.
“감히 이런 짓을 해?!”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에는 상대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페루제 공작부인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라보 공작가문에는 인장과 관련되었으며 다른 가문들과 차별화된 마법이 있었다.
인장을 서신 근처에 대었다.
그 다음에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반지에 자신의 마력을 넣었다.
그러자 그 반지에서 빛이 나왔다.
푸른빛이 서서히 검게 변했다.
으득!
라보 공작이 이를 갈았다.
가주가 아닌 자가 인장을 사용하는 것을 대비하여 만든 마법은 말해 주고 있었다.
푸른빛에서 검은빛으로 색이 변했다는 것은 서신의 인장은 라보 공작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젠장! 이것으로는 부족해.”
인장을 공작이 찍지 않았다는 증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암살 미수의 배후가 공작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공작이 들킬 때를 대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인장을 찍게 했다고 주장하면 그뿐이었다.
오히려 실패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뒀다며 몰아세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보안을 관리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져! 배후가 없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도 성공할 수도 없는 일이야.”
라보 공작은 일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배후를 알아내고 살아 있는 것 자체를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집사의 명령으로 한 명도 남김없이 연회장 홀에 모였다.
그들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왜 우리를 모두 여기에 모이라고 했지?”
“그러게. 평소에 본관에 올 일이 없는 별채 고용인들까지 깡그리 다 모았잖아.”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외부에 심부름을 나간 고용인들이나 얼마 전에 관두거나 휴가를 떠나 있는 고용인들까지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나 봐.”
이상함을 느끼고 도망을 치고 싶어도 이미 기사들이 출입을 철저히 막은 상태였다.
여기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수상한 짓거리를 했다고 자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들은 근래에 관둔 고용인들이나 심부름을 나간 고용인들, 휴가를 간 고용인들까지 깡그리 명단을 확보하고 그들을 잡으러 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모든 고용인들을 끌고 오라는 각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꺄아아, 공작부인 제발 구해 주세요!”
“당장 그 손을 놓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가 각하와 이야기하겠네!”
“공작부인, 각하께서는 이 일과 관련하여 방해하는 자는 공작가문의 혈육일지라도 관련자로 잡아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부인을 끌고 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라보 공작부인이 혼인 전에 데려온 시녀들까지 끌려갔다.
라보 공작부인을 키워 준 유모까지도 말이다.
라보 가문의 핏줄조차 끌고 가겠다고 함은 공작부인일지라도 이 일에 관해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고용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라보 공작이 들어왔다.
공작의 얼굴에는 분노가 기사와 병사들이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너희가 왜 여기에 모여 있는지 궁금하겠지. 대부분은 말이야.”
“…….”
지금 바로 이 순간에라도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이 일에 관해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감히 가문의 인장을 멋대로 꺼내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둔 놈이 있더군.”
“그, 그런 일이 벌어졌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저도 아닙니다!”
집사를 포함하여 홀에 모인 고용인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내부자의 소행이 아니라면 벌어질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라보 공작은 그 절규하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저 안에서 선량하고 억울한 눈빛으로 자신을 조롱하고 있을 범인들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모조리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닥쳐라.”
“꺄악”
“히익!”
라보 공작의 일갈에다가 기사들이 창으로 위협을 하니 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정말로 조용하게 있지 않으면 누구하나 본보기로 죽일지도 몰랐다.
가문의 인장은 가주가 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훔쳐다가 썼다는 것은 가주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다.
라보 공작은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좌우로 걸으며 그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봤다.
“너희 중 가문의 인장을 가진 범인 혹은 공범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고한다면, 누가 배후에 있는지 밝힌다면 목숨을 보장해 주마.”
“…….”
고용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눈으로 힐끔거렸다.
그들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손을 들어달라고 말이다.
야속하게도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래. 죽을 각오를 했으니까 이런 짓을 벌인 것이겠지. 단장!”
“예! 주군!”
라보 공작가문의 기사단 단장이 주군의 부름에 답했다.
기사단 단장의 근엄한 얼굴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끼게 해줬다.
“저것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라. 진실을 토설할 때까지 결코 죽여서 아니 될 것이나, 죽지만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빠르고 강하게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조용했던 연회장 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난리가 될 만도 했다.
라보 공작의 명령은 죽지만 않으면 모든 고문 방법을 다 쓰라는 뜻이었으니까.
“꺄아아악!”
큰 공포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무릎을 꿇으면서 억울함을 계속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리가! 저리가라고! 하지도 않은 짓 때문에 내가 왜 끌려가야 해!”
발차기도 하고, 주먹질도 하며 나름대로 저항하려는 고용인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차분히 보던 라보 공작이 비웃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여기에 없는 것들도 곧 너희 곁으로 올 것이니까.”
그는 절규하고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연회장을 당당하게 나갔다.
* * *
라보 공작이 가문 내부를 탈탈 털고 있을 때,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의 정령인 에레보스와 산책을 나왔다.
장소는 레티시아가 사는 동네 주변에 있는 공원이었다.
레티시아가 가족들과 자주 간다고 해서 한번 와 본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레티시아 그 아이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그렇지? 타나토스.”
“그 아이가 추천하는 것은 언제나 만족스러웠어.”
그녀의 어둠의 정령이 옆에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평소와 달랐다.
그녀를 상징하는 흑발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는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타나토스, 머리카락 색을 정말 잘 바꿔 줬어.”
“나중에는 다른 색으로도 바꿔 보자! 색다른 느낌이 좋네.”
“자주 같이 나가자는 뜻이지?”
“그렇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장난스럽게 윙크하자 에레보스가 이에 호응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이 들떠 있음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