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우위
그녀가 손짓으로 자신의 맞은편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따라 그림자도 흔들렸다.
그녀의 자태와 풍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그는 잠시 그 광경을 멍하니 봤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듣지 못했군요.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자작인 제임스 말콤입니다.”
그는 그녀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빠져서 자기소개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소개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말이다.
“제임스 말콤! 능력이 출중하다고 들었어요. 명성으로만 알던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과찬이십니다.”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곳에 왔겠죠.”
제임스는 그녀의 서늘한 눈매에 움찔하는 기분이 들었다.
티는 내지 않았으나 자꾸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싶었다.
그녀는 기품이 넘치는 미소로 자기 손등 위에 턱을 올려놨다.
“아까도 말했듯이 피해자로 사건에 관해 말해 주려고 불렀어요.”
그녀가 말을 하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대들은 이만 가 봐요.”
“네, 부인.”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제임스는 도대체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이곳의 주인과 안주인이라는 부부는 마치 자신들이 집사와 시녀장인 것처럼 굴었으니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봤자면 이곳의 주인은 눈앞의 여인이었다.
“부인의 진술을 들을 예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현장 확인과 범인을 추궁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나부터 하지요.”
“부인, 모든 일에 순서가 있습니다.”
일단 부하 중 일부를 사건 현장과 암살미수범이 투옥되어 있는 곳으로 슬쩍 보냈다.
피해를 입은 가문임에도 주인 내외가 저자세였다.
피해를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가 갈까 봐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뭔가 있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암살을 당할 뻔한 당사자가 제임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나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전부 끝났으니까요.”
“네?”
“저희 쪽 사람들이 다 조사를 마쳤으니까요. 말콤 자작은 제 진술이랑 저희 보고서만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발생 장소를 관리하는 가문에서 조사를 하는 것이 맞았다.
가령 벨로나 공작령 내의 사건을 벨로나 공작가문이 처리하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고위귀족이 연루된 사건의 경우에는 왕실이 조사를 주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조사자 혹은 조사 가문에서 사건을 조작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치적인 이익이든 보복이든 어떤 이유에서든지 말이다.
뭐, 왕실의 정치적 이유로 사건이 조작되어도 명분으로 그러했다.
“조사할 인력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날 꿈이 영 뒤숭숭해서 조금 많은 인력을 호위로 데려왔거든. 이곳 근처에서 휴가 중이던 조사관이 있었고 말이야.”
운이 좋게도 일반적이지 않은 기사의 수를 호위로 끌고가고, 우연히 근처에 있던 조사관을 데려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저지른 자작극일 수 있었다.
그는 빠르게 생각하고 조사 방향을 정했다.
“그것은 조사를 하면 나올 일입니다. 당장, 죄인을 저희 쪽으로 인도하고 관련 자료 및 증거물을 주시지요!”
“무엇이 문제이길래 그리 화내는지 모르겠군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시는 것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상을 내려치자 찻잔이 흔들렸다.
게다가 그녀를 향해서 삿대질까지 했다.
그녀는 찻잔 안에서 요동치는 차를 보다가 다시 제임스를 봤다.
그녀가 턱을 올려놓고 있던 자신의 손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내가 왜 그대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국왕 폐하의 명령입니다!”
“그대야말로 오해를 하고 있군.”
말투가 달라졌다.
손님을 대하는 것 같았던 말투는 명령조가 되었다.
아랫사람으로 대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부탁을 하거나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야.”
“무슨…….”
그는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그대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고 통보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라고 하면 그래야 하는 것이야.”
“…….”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살기가 어린 눈빛은 진심이었다.
언제라도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것처럼 말이다.
“국왕 폐하의 명령?”
쨍!
그녀가 찻잔과 잔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그 깨진 조각들을 발로 잘근잘근 깨버렸다.
흙에 퍼져 버린 붉은 차는 마치 핏빛처럼 보였다.
“국왕 폐하께서 이 사건의 배후라면 어찌하겠느냐? 너는 떳떳하게 그것을 말하겠느냐!”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국왕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싫어한다고 해도 암살 시도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괜찮지만 실패했을 경우에 생길 파장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것을 봐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녀가 제임스에게 어떤 서신을 던졌다.
그것을 읽은 제임스는 떨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서신 하나로 페루제 공작부인의 자작극이라는 의혹조차 가질 수 없었게 되었다.
“이, 이것은?!”
“이것을 보고도 나의 의심이 헛되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냐!”
“…….”
그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받은 것이 진실이라면 그녀의 의심은 타당했고 합리적이었다.
이것을 보고 국왕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바보이리라.
이것이 알려지면 국왕과 친왕파의 명운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봐라! 배후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음에도 말을 꺼내지도 못한다!”
“그, 그것이…….”
제임스를 반박하고 싶었다.
자기 왕국의 국왕이 귀족을 암살하려고 했을 가능성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왕실을 향한 능멸이고 왕국을 분열시키는 죄이다.
신하를 암살로 죽이려고 한 국왕을 따를 수 없다!
이런 명분은 반역하기 딱 좋았다.
반왕파에게 좋은 빌미이기도 했다.
국왕과 친왕파를 몰아세울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것은 국왕이 배후에 있으나, 이런 저런 사정을 생각해서 당신이 참으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
“죄인의 신분고하, 성별의 차이를 막론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조사해야 할 조사단의 대표부터 이러는 형국이다! 내가 어찌 너희를 믿느냐! 내가 어찌 너희에게 조사를 맡긴단 말이야!”
애초에 제임스 말콤은 당당하게 손가락질하던 손을 가지런히 내놓은 상태였다.
고개까지 숙이고 서 있는 모습이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을 연상하게 했다.
“나에게 성물이 없었다면 잘나신 폐하로 인해 죽었겠지.”
“오해가,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조사를 하여…….”
“철저하게 증거를 없애겠는 뜻이겠지.”
제임스 말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지금 자신도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시켜서 잡으려고 하고 있음이다.
어느새 다섯 뱀 기사단의 기사들이 근처에 대기했다.
언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을 제압할 것이다.
그 안에는 검은 뱀 기사단의 기사들도 있었다.
검은 뱀 기사단은 첩보와 정보 관련 업무에서 최고로 조사 업무에 딱이었다.
게다가 왕실 조사단이 호신술도 제법하고 뛰어나기는 하지만 전장을 누비며 생명을 앗아가던 정예병에 비하면 약했다.
지금 보니까 고문이라도 해서 거짓자백이라도 받아내려는 심사 같았다.
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 순간, 그녀가 그가 쥐고 있는 서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은 그대에게 주지.”
“준다고요?”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았던 차가움은 사라졌다.
봄바람처럼 살랑살랑한 느낌을 주는 웃음을 지었다.
“그것뿐 아니라 범인도 증거물도 증언이 담긴 기록물도 전부 주지.”
“정말입니까?”
“그럼. 잡아놓았던 놈들 풀어주고 현장 조사라고 해.”
“알겠습니다.”
제임스의 예상처럼 그녀의 기사들은 왕실 조사단을 구금했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왕실에 관한 권위 도전으로 벌을 받아 마땅했음이다.
그러나 이 서신 하나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무언가를 감추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이들만 하는 짓이잖아.”
아름다운 미소는 은은하게 부는 바람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전혀 웃지 않는 눈빛은 제임스의 흐르던 땀조차 멈추게 만들었다.
“대신에 폐하께 이것을 주고 제대로 된 답을 내놓으라고 해. 아니면 건국제에서 아주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뭐해?”
“네?”
제임스는 충격적인 증거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정신을 잠시 놔버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으나 아직도 조금 멍했다.
“당장 폐하께 달려가서 전하지 않고 뭐하냐고?”
“알겠습니다!”
솔직히 이것의 진위 여부에 따라서 사건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현장 조사는 부하들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폐하에게 달려가야 했다.
친왕파의 앞날이 이 서신에 달려 있었다.
* * *
제임스 말콤 자작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소상히 말했다.
국왕은 굳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서신에 어떤 내용이 있길래 조사조차 못하고 그대가 직접 다시 여기로 왔단 말인가?”
“직접 확인해 보시옵소서.”
그는 국왕에서 서신을 줬다.
그는 그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손이 떨렸다.
충격과 경악을 넘어서 분노를 느끼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지금 바로 라보 공작을 불러!”
“네!”
라보는 발에 불이 날 것처럼 빠르게 왕궁에 도착했다.
국왕의 진노가 궁 안에 울려 퍼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폐하, 라보 공작이…….”
“당장 들어오라고 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시종이 라보 공작의 도착을 알리는 말을 끊어 버렸다.
라보 공작은 긴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국왕의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폐하, 폐하의 부름에 왔습니다.”
“이 사단을 낸 그대가 드디어 왔군.”
“무엇 때문에 이리 분노하셨습니까?”
국왕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라보 공작은 큰일이 터졌음을 알아챘다.
자신은 모르지만 자신과 연관이 있는 큰일이 말이다.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지 모르는 것이 그대의 죄다!”
“그게 무슨?”
“이것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라보 공작은 왕이 던져 버린 서신을 주워서 읽었다.
그의 손도 국왕과 제임스 말콤처럼 크게 떨렸다.
서신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알펜 왕국의 고귀한 라보 공작가문의 가주로 말한다.
알펜 왕국의 국왕께서 원하는 왕국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을 하고 계신다.
그런데 악랄한 여인이 사사건건 이를 막으려고 드니 왕국에 근심이 사라지지 않는구나.
…
그대들의 복수를 돕는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님이오.
나아가서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을 구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대들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
라보 공작의 필체였다.
필체는 사람 하나 구하면 따라할 수 있었다.
이 서신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저는 이런 적이 없습니다.”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다. 위조라고 하는 것이냐!”
각 귀족 가문에는 가주가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서류에 찍는 인장이 있었다.
그것은 왕실의 명령을 수행하거나 어떤 정책을 제안할 때도 쓰였다.
“위조일 것입니다. 제가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서신에 라보 공작가의 인장이 찍히겠습니까?”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귀족가문의 운영부터 왕국의 정책까지 중요한 공식문서에 쓰이는 인장.
이런 인장의 위조를 막기 위해서 인장에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