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50화 (150/221)

150화 부부 간의 예의는 이미 오래전에 개밥이 되었다

그 석궁 사건의 당사자인 란델리노도, 훈련장에 있던 기사들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두가 모르는 사실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석궁으로 란델리노를 위협한 것은 사실이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 것도 푸르푸르 단장의 말에 이성을 찾은 것처럼 보인 것도 다 계산된 연기였다.

‘로빈이 <다섯 뱀>을 완벽하게 관리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조카를 반대하고 란델리노를 밀어줄 의향이 있는 인물 혹은 세력이 있다.’

‘란델리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만 본 것이다.’

그녀가 속으로 란델리노에 향한 결정을 내렸다.

‘그래. 진심으로 내 후계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야. 정말 그랬다면 그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추하게 땅에 머리를 대고 우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그리 추한 자를 누가 진심으로 따른다고 말이야.’

아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하지만 죽일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아들을 쳐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인지,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인지는 모를 일이다.

“이따가 차나 마시자고 해야겠어.”

아들을 향한 총애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은 아무리 란델리노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닮았다고 해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성장 환경에서 온 차이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평생을 우아한 귀족으로 살아왔다.

학대를 당한 적도 없고 열등감을 가진 적도 없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능력, 외모, 자질 모든 것을 갖췄다.

란델리노는 아버지의 외면으로 고모할머니, 고용인, 사교계의 괴롭힘과 학대를 당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펼칠 기회조차,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쭈그리고 있어야 했다.

권력자인 어머니의 비호로 인해 그의 인생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페루제 공작부인과 완전히 다른 사상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얼마든지 진흙탕을 구를 수 있었다.

추하다고 손가락질을 해도 귀족답지 못하다고 혀를 차도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리해서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 사상의 차이가 란델리노를 살렸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었다.

그녀의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더러워졌으니까.

우아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상대는 감히 그녀가 업무를 보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벌써 소식을 귀에 들어갔나 보네요.”

“내 아들을 죽이려고 한 부덕한 여인의 낯짝을 보려고 왔지.”

“죽이려고 한 적 없어요. 잘못을 꾸짖었을 뿐이죠.”

“석궁을 머리에 대고 쏘려고 했으면서? 양심이 없군.”

그 불청객은 바로 벨로나 공작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결코 남편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고, 벨로나 공작도 결코 아내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빛은 살벌함의 끝판이었다.

한량처럼 의자에 기대서 자신의 의자에 앉은 남편을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었다.

저 의자는 그녀가 아주 아끼는 의자였다.

장시간 일을 해도 불편함이 없는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만을 위한 의자였다.

이 의자를 만든 장인은 이제 죽고 없어서 더는 만들 수조차 없었다.

“양심은 당신이야말로 없지요. 그리고 내 의자에서 당장 엉덩이를 떼요.”

“남편이 아내의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것이지. 뭘 그리 화를 내나?”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며 벨로나 공작은 자기 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양심을 논할 줄은 몰랐군.”

“그 아들을 쫓아내려고 벼르고 있는 분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라고요.”

그녀는 남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음에도 당당했다.

오히려 벨로나 공작에게 뻔뻔하다고 돌려 말하지 않는가.

그 와중에 그녀는 남편을 의자에서 떼어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남편에게 자신의 고급의자를 양보하기 싫은 것이 정말 티가 났다.

벨로나 공작은 그녀가 의자에 시선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엉덩이에 힘을 더 실었다.

“솔직히 그대가 그 아이를 살려 놓아서 의아해 하기는 했지.”

“설마 내가 아들을 진짜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그 아이를 아끼는데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이를 갈면서 시선을 의자에서 벨로나 공작에게 옮겼다.

그녀가 의자를 언급하면 할수록 그 망할 엉덩이로 의자를 짓눌렀으니까!

장인이 죽어서 더는 만들라고 의뢰조차 할 수 없는 의자를 말이다!

“그대라면 가능하지. 마음이야 이득 앞에서 얼마든지 버릴 수 있잖아.”

“누구 좋으라고 죽입니까?”

벨로나 공작에게 이혼의 명분을 주는 그딴 짓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책으로 이혼이라니!

자신의 명예와 가문의 명예가 더러워질 일이었다.

상대의 잘못으로 이혼을 해도 여인에게는 흠인데 말이다.

그리고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으로 얻은 이득을 생각하면 란델리노를 죽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리고 아내가 살해당할 뻔했다는 소식을 들었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내다니요.”

“괜찮냐고 물어봐 주길 원하나?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아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예의가 필요하다니 몰랐어.”

“너무 섭섭하군요.”

그녀가 정말 야속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불과 며칠 전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에게 선물로 보냈다.

“당신을 생각해서 선물까지 보낸 아내에게 너무하네요.”

“너무 고마워서 나도 친히 선물을 보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딱 그 정도 사이지.”

벨로나 공작에게 선물이라며 상자 안에 목을 담아서 줬다.

벨로나 공작이 보낸 세작의 목이었다.

이에 응수하듯이 벨로나 공작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낸 세작의 목을 접시에 올려서 보냈다.

부부 간의 예의는 이미 오래전에 개밥으로 준 부부였다.

“딱 그 정도 사이이지만 물어보지. 언제부터였지?”

“무엇이요?”

“그대가 성물을 가지고 있고 성모가 된 것 말이야?”

“그거요? 궁금할 만도 하겠죠. 성물은 당신과 혼인하기로 했을 때에 받았고 성모 칭호는 혼인 후에 얻게 되었어요.”

벨로나 공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성을 잃고 검을 뽑고 공격을 했다면 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성모를 공격한 죄를 묻겠다면 신전의 공격을 당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일들이 없었기에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친왕파 내부에서 그녀가 성물을 다룰 수 있는 성모라는 충격적 사태를 어찌 받아들일지 몰라 했다.

성물을 다루는 성모는 일반적인 성모와 달랐다.

일반적인 성모는 성모로 인정받을 공적이 있는지 철저하게 평가하고 교황의 승인 하에 성모가 되는 것이었다.

반면에 성물을 다루는 성모는 그런 과정 자체가 필요가 없었다.

성물을 다룬다는 사실은 신이 그를 선택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교황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이다.

친왕파에서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왔다.

“성모라니요? 그것도 성물을 다루는 성모라고요.”

“교황이 아니라 성물이 선택한 성물. 교황에 준하는 대우를 해줘야 하지요. 이런 사실을 벨로나 공작각하께서 몰랐을까요?”

“사이가 나쁘기로 소문이 난 사이지 않습니까. 모르셨겠지요.”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부부인데 설마 몰랐겠습니까?”

“오히려 부부니까 알 수 있는 틈이 있었을 수 있어요.”

벨로나 공작이 아내와 척을 진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의 씨앗이 심어진 계기였다.

벨로나 공작은 친왕파의 내부에서 힘을 가지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친왕파를 제외한 세력 쪽에서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함께였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부부가 알펜 왕국의 권력을 다 먹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벨로나 공작의 입지가 위태롭게 된다.

그러면 벨로나 공작가문의 주도권도 완전히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넘어가게 되리라.

벨로나 공작은 아내의 태연자약한 얼굴과 말투에 짜증이 일었다.

그가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중요한 문제를 지금까지 언질조차 주지 않다니 대단하군.”

“제 안위가 위험하지만 않았다면 성물을 쓸 일이 없었을 것이니까요.”

“나를 염두에 두고 성물을 구한 것인가?”

소드마스터인 남편이 분노로 칼을 들 상황을 대비한 것인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겸사겸사요.”

그녀가 우아하게 인정했다.

그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아내를 위험에 처하기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대의 기사단이 조사한 모든 자료들을 넘겨.”

“왜 그래야지요?”

“엄연히 아내가 죽을 뻔한 일이야. 나도 어느 정도 알아야지.”

“왕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듣지요.”

“그대의 기사단들이 죄인과 모든 증거를 가져가 버리지 않았나.”

이를 악문 벨로나 공작의 말에 그녀가 미세하게 웃었다.

* * *

페루제 공작부인 암살 미수 사건.

이것은 알펜 왕국만 아니라 라스타 왕국에서도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 덕분에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왕실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라스타 왕국의 귀한 인물이 죽을 뻔했네. 어찌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녀를 기반으로 권력을 쥔 관료들도 왕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았다.

“라스타 왕국의 기둥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위험에 처하게 하다니요!”

“라스타 왕국을 무시하지 않는 이상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녀를 따르는 무리가 라스타 국왕의 말에 따르니 신속하게 결정이 되었다.

라스타 왕국은 알펜 왕국에 사신을 보냈다.

‘귀한 인물’을 위험에 빠지게 한 것에 관해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알펜 국왕은 머리가 아팠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암살 미수 사건을 듣고 그는 바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능력이 좋고 빠릿빠릿하기로 평이 좋은 귀족이 조사단을 지휘하도록 지명했다.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죄송합니다.”

“왜 하지 못했는지 말하게.”

“그, 그것이 말입니다.”

국왕의 아래에서는 한 귀족이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닦았다.

그는 조사단으로 파견되면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사건이 일어난 가문에 방문할 당시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조사단 대표로 일을 잘 처리하리라 다짐했다.

“공작부인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사하기 왔습니다.”

“왕실에서 파견을 오신 관리님이시군요. 어서 오십시오.”

가문의 가주와 안주인이 예의를 차리며 그들을 안내했다.

그런데 그들은 저택이 아니라 어느 나무 그늘 아래로 조사단을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기품이 있는 자태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와요.”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

“참으로 날씨가 좋은 날이죠.”

“그런데 어찌 저를 부르셨습니까?”

찻잔을 내려놓고 조사단 대표인 그를 보는데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성물이 있었다고 해도 목에 칼이 오기 직전까지 갔다고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 괴리감이 그를 주춤거리게 했다.

“응당 조사란 피해자의 말부터 들어보는 것이 먼저 아니겠어요.”

그녀는 그의 마음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