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사교계에서의 란델리노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란델리노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레티시아에게 간략하게 말했다.
그녀가 경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녀는 곧 자신의 놀람을 진정하도록 다독였다.
그리고는 란델리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억지로 나오셔야 해서 힘드셨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레티시아는 왜 그가 쉬지 못하고 방을 나가야 했는지 이해했다.
세간의 시선이란 무서운 법이다.
여기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정말로 어머니의 총애를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당하게 돌아다니고 괜찮아 해야 이것을 단순히 ‘어머니의 훈육’ 정도로 만들 수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통 이상의 사람이었다.
란델리노만 의연하다면 사람들은 이리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여자라면 아들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며 혼낼 수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지지 세력을 안심시켜야 했다.
자신은 아직 후계자가 아니었으니까.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으니까.
란델리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레티시아가 갑자기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두드렸다.
“응?”
“특별히 제 무릎에 머리를 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엄청 귀한 것을 누리게 해준다는 듯이 레티시아가 자신감 넘치게 제안했다.
란델리노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며 동공이 흔들렸다.
상상으로 끝나던 모습 중 하나를 하자고 레티시아가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룰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뭐? 머리를 기대라고? 네 무릎에?”
“네. 누구도 제 무릎에 머리를 기댄 적이 없었으니까 영광으로 알아주세요!”
그녀가 윙크를 하며 웃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은 순수한 아이처럼 느끼게 해줬다.
평소에 우아함을 유지하는 레티시아는 가끔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란델리노와의 첫 만남에서도 그를 구하려고 나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
레티시아는 철저하게 실리 시녀장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입맛에 맞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지금도 성장 중이었다.
그들은 레티시아가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자태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란델리노는 당장이라도 레티시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다.
그렇지만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아니야. 괜찮아.”
“왜요?”
레티시아는 자신이 너무 부담스럽게 했나 싶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란델리노는 그런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였다.
“내가 그러면 네 무릎이 아프잖아.”
“에이~ 아프면 제가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면 되잖아요.”
그녀는 란델리노가 정말 착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일도 자신을 배려해 주는 모습은 그가 배려가 몸에 배여 있어서라고 여겼다.
‘이런 분이 어째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분위기를 긴장시킨다고 할까? 작은 소문이라도 마음이 좋지 않아.’
그는 고용인들을 괴롭히고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용인들을 편하게 대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적당히 권위를 유지하면서 아랫사람들의 숨통을 틔어 주는 인물이었다.
나쁘지 않은 작은 주인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으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부당한 명령을 내리거나 과중한 업무를 주거나 하는 것도 아님에도 불편했다.
* * *
가령 별다를 것 없는 대화에서도 불안함을 줬다.
“차가 어떠십니까?”
“맛있네. 고마워. 최선을 다해서 한 거지?”
“네. 물론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수고했어.”
이런 식의 대화를 마치면 그 고용인을 다시는 란델리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그가 칭찬을 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불안해하며 잠에 들지 못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고용인들도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물론 페루제 공작부인과 있으며 느끼는 중압감만큼은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으니까.
귀족이나 귀족 자제들에게는 조금 달랐다.
사교계에서 그는 성격이 좋고 능력도 ‘미래가 기대가 되는 인재’였으니까.
“정말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예의가 바르고 성격이 좋은지 몰라요.”
“우리 아들이 란델리노 백작 반이라도 닮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뛰어난 학생이기도 하다고 하더군요.”
“아까 가문의 어른들과 막힘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사실일 거예요.”
“저런 자식을 가진 기분은 어떨까요? 부러워죽겠어요.”
“나도요. 저거 봐요. 또래 영식과 영애가 몰려오는데 하나하나 다정하게 받아주잖아요.”
알펜 왕국의 사교계의 전반적인 평가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마녀의혹자 명단에 올라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목숨줄을 쥐게 된 귀족 자제들에게는 달랐다.
그들은 명백히 란델리노의 아랫사람이었다.
그에게 그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그들이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하극상을 벌이려고 했다는 말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러면 그들의 모친은 마녀로 몰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모든 것을 잃고 신전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나른한 얼굴로 책을 읽었으며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나를 따르겠다며?”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성적이 별로던데? 내가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
“그게, 란델리노 백작님께서는 일류만 상대한다고…….”
“성적이 사람의 능력을 모두 평가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면 재치가 있거나 다른 능력을 보여줘야지. 그게 안 되면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아야 마땅하지 않아?”
란델리노는 자신이 완벽한 만큼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완벽하기를 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백작님을 언짢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래. 기회는 한 번 더 주지.”
“감사합니다!”
두려움에 떨던 귀족 자제가 발에 불이 난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너무 상대를 억누르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반전이 있었다.
란델리노를 따르는 다른 북부 귀족 자제들이 말을 걸었다.
그들도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의혹자 명단에 들었지만 아까의 소년과는 입장이 전혀 달랐다.
“어쩌자고 기회를 주셨습니까?”
“맞습니다. 저런 덜 떨어진 녀석에게요.”
“사교계에 매장을 시키는 것이 나을 무능력자입니다.”
“저 녀석의 어미가 부탁을 하더군. 매일 놀기만 하는 녀석을 좀 정신 차리게 해달라고 말이야. 어찌 나도 누군가의 자식으로 그 애원을 외면하겠어?”
“역시 사려 깊으십니다!”
“오죽하면 백작님께 그런 부탁을 했을지 싶지만 너무 받아주시는 것도 좋지 않은 듯합니다.”
그들은 란델리노에게 인정을 받았다.
인정을 받은 만큼 그들은 북부 사교계에서 쉽게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교계에는 여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내들만의 세상도 있었다.
또래 소년들만의 세상도 있었다.
“참으로 넓은 마음이십니다.”
“저희는 절대로 란델리노 백작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너희는 그 녀석과 다르다는 것을 내가 잘 알지.”
알펜 왕국의 북부를 좌지우지하는 페루제 메디치 백작과 벨로나 공작의 아들인 그는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였다.
그런 그의 비호를 받는 이들의 위치도 그만큼 독보적이었다.
란델리노의 묵인 하에 휘두르는 권력은 그들의 지배 욕구를 자극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했다.
능력을 증명하고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를 원했다.
란델리노는 페루제 공작부인과 정말 닮아 있었다.
* * *
자꾸 자신의 호의를 거부하는 란델리노에게 레티시아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했다.
그녀는 알았다.
눈빛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란델리노가 눕기를 원하면서 애써 자기 마음을 외면했음을 말이다.
자신을 위한 배려를 우선시했음이기도 했다.
“이거는 제가 멋대로 하는 것이니까 나중에 꾸짖어 주세요.”
“뭐?”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겨서 억지로 눕힌 것이다.
솔직히 레티시아와 란델리노는 힘부터 차이가 엄청났으니 거부하려면 충분히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란델리노는 그리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힘이 스르륵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로는 거부해야 함을 알지만 몸은 본심을 따른 것이다.
결국 레티시아가 원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눕게 되었다.
마음이 편했다.
그녀의 온기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그들이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옅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꾸준히 만났고 끊임없이 정서를 교감했다.
란델리로는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잘 수는 없었기에 그는 입을 열었다.
“실리 시녀장이 숙제를 많이 내줬나 봐?”
“언제나 그러시죠. 제 승부욕을 자극한다고 할까요.”
그녀가 발랄하게 대답했다.
그는 실리가 얼마나 많은 숙제를 내는지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한 번도 제때 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럴수록 기대감은 커질 것이다.
분명히 힘들 것인데 그녀는 한 번도 자신에게 푸념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실리 시녀장이 수업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 뻔했다.
“좀 줄여달라고 해보지.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면 어떡해?”
“과하다 싶으면 실리 시녀장님에게 말해요.”
“진짜로?”
란델리노의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말투가 느긋하여 레티시아는 눈치 채지 못했다.
“직설적인 면이 있으셔서 그렇지 얼마나 다정하신 분인데요.”
“뭐? 다정?”
헛웃음이 나왔다.
다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다정’이라는 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을 뽑자면 하나는 자신의 어머니고 다른 하나는 실리 시녀장일 것이니까.
“웃기는 농담이네.”
“농담이 아니에요. 공과 사가 분명하셔서 그렇지 사적인 시간에는 얼마나 재미가 있으신 분인데요.”
레티시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감출 일이 없는데 어찌 거짓을 말하겠는가.
그래서 란델리노는 그녀의 말을 재미가 없는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는 솔솔 오던 잠이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다정하신데?”
“자주 초대해 주셔서 같이 저녁도 둘이서 먹기도 하고 그래요.”
“얼마나 자주?”
“일주일에 1, 2번 정도요.”
실시 시녀장은 자신의 사적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는 여인이 아니었다.
아니,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 그런 공간이 있을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방을 같이 꾸미기도 하고 즐거운 일들이 많았어요.”
“실리 시녀장과 친하다니 정말 대단하네. 부럽다.”
“좋으신 분인데 오해를 받아서 마음이 아플 뿐이죠.”
레티시아는 오직 페루제 공작부인만을 위해 살던 사람을 바꿔 놓았다.
자신을 위한 물건들과 가구들을 방안에 들인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란델리노는 왜 자신이 진작 그녀에게 그들의 관계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누구보다 레티시아의 사랑스러움을 잘 아는 자신이었다.
실리 시녀장과 친분이 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레티시아가 굳이 먼저 그에게 실리 시녀장에 관해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 사이에서 실리 시녀장은 대화를 이어 나갈 공통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실리 시녀장과 그리 친분이 있지 않았다.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탐탁지 않게 봤으니까.
레티시아 입장에서는 상대가 꺼려하는 인물에 관해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