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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48화 (148/221)

148화 노림수

란델리노는 아그리피나와 방에 들어왔다.

더러워진 옷을 벗어던지고 그녀가 준비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는지 제대로 된 무인의 몸이었다.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나서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하하하하.”

그리고는 갑자기 막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그리피나는 란델리노가 죽을 뻔했던 경험에 미쳤나 싶었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라면 버려야 했으니까.

물론 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기에 불가능했다.

란델리노를 버리기에 그녀는 이미 그의 최측근으로 너무 알려져 있었다.

“아그리피나.”

“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측근 시녀를 불렀다.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어머니에게 죽을 뻔한 공포가 아닌 승리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는 희열에 가까웠다.

그가 나른한 자세로 침대에 앉았다.

“<다섯 뱀> 안에 로빈을 따르지 않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

“설마요. 그 로빈이 그리 허술하게 사람을 관리할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 믿기 어려운 말이 뭔지 알아?”

란델리노가 장난스럽게 아그리피나의 물음에 답했다.

“그 인물이 따르는 자가 소드마스터라고 해.”

“거짓 정보가 분명하군요. 로빈 단장과 척을 지는 소드마스터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불신하지는 말라고.”

라스타 왕국에 알려진 소드마스터들은 같은 소드마스터인 로빈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중립적인 인물도 있었으나 적대적인 인물은 없었다.

그들이 알아본 정보는 그러했다.

게다가 로빈이 얼마나 기사단을 꽉 쥐고 있는지는 그들이 잘 알았다.

단장, 부단장 혹은 그 아랫급 기사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자리를 마련했다.

“그동안 그 작자가 어떻게 굴었는지 아니까요.”

“하긴… 빅토르 스승님이 은밀히 알려 주지 않았다면 꿈에도 몰랐을 거야.”

그들은 란델리노의 만남을 로빈에게 보고한 것이다.

어머니의 눈치가 보여 ‘비밀리’에 만나자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검사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불러들였다.

식사와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자고 말이다.

성인이었다면 술을 마시며 경계를 풀게 했을 것인데 아쉬웠다.

“그런 일들과 우리가 알아낸 정보들이 있었으니 네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 그렇지만 믿을 만한 인물에게 듣게 된 정보다.”

“믿을 만한 인물이라면 누구를 말하시는 것인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섯 뱀> 총단장인 로빈이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심스럽게 상대를 만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기사들은 로빈에게 란델리노와의 만남을 보고하고 허락을 구한 뒤에 만났다.

보고한 뒤에 만난다는 것은 그 만남에서의 대화도 로빈에게 보고된다는 것이다.

란델리노가 그 만남들에서 문제가 될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공격당할 만한 빌미가 될 언행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주 만나고 친분을 쌓아도 벽이 느껴지는 쎄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루비카 남작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신빙성이 있지 않아?”

“드디어 성공하신 것이군요. 루비카 남작의 말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지요.”

란델리노는 사냥을 즐긴다는 명목으로 자주 사냥을 하러 나갔다.

벨로나 공작령과 메디치 백작령 경계 부근으로 말이다.

루비카 남작과 ‘우연’을 가장하여 만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마치 나와의 만남을 거부하듯이 요리저리 피하더니 드디어 만나 줬어.”

“그동안 애타게 하더니!”

아그리파나가 격하게 감격하며 좋아했다.

루비카 남작이 란델리노와의 만남을 거부하다가 만났다고 함은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아직 나를 밀어 주기로 한 것은 아니야.”

“아, 아닙니까? 그렇군요.”

그녀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 반응은 당연했다.

루비카 가문은 라스타 왕국에서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루비로즈 백작가문의 가신 가문 중 가장 발언권이 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남작 가문에 불과하지만 권세는 웬만한 백작 저리가라였다.

그러니 루비카 남작의 지지가 가져올 성과는 어마어마했다.

“아쉽군요. 루비카 남작이 란델리노님을 지지하겠다고 했다면 라스타 왕국 내에서 세력을 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에요.”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어. 완벽한 거절은 아니었거든.”

완벽한 거절이 아니라고 함은 조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해내야 하는 일이 있군요.”

“맞아. 그가 제안한 두 가지만 이행할 수 있다면 나를 지지해 준다고 했으니까.”

침대에 앉아 있던 란델리노가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오늘, 어머니 덕분에 하나는 수월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지.”

“그렇군요.”

아그리피나는 아둔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로빈이 장악했다고 여겼던 <다섯 뱀>.

그 안에서 로빈을 반대하는 인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더 숨어 버릴 수 있었고 로빈이 눈치 채고 먼저 제거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인물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란델리노는 고민했다.

어떻게 그 인물을 찾아서 포섭할 수 있을지 깊게 생각했다.

그는 도저히 미지의 인물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인물이 자신을 드러내게 할 방법은 떠올랐다.

“란델리노님을 구한 푸르푸르 단장이 ‘로빈 단장을 반대하는 인물’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오늘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좋은 기회였어.”

란델리노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그리피나는 드디어 알았다.

어째서 란델리노가 목숨이 위험했던 경험을 했음에도 괜찮은지 말이다.

“처음부터 기사단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작부인께 위협을 당하려고 했군요.”

“루비카 남작과 나의 만남을 알면 분노한 드래곤처럼 화를 낼 것을 알았거든. 그 정보를 어머니 측에 몰래 뿌리려고 했지. 설마 이미 알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너무 위험한 방법이셨습니다.”

“목숨을 걸 만하잖아. 루비카 남작과 로빈을 반대하는 무력 세력을 얻는다는 것은 말이야.”

아그리피나는 그 말에 차마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 반응에 란델리노가 피식 웃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권력을 가질 기회를 더 우위로 보고 있었으니까.

헛헛함을 느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감이 넘치며 우아한 소년이었다.

귀족다우면서 뛰어난 무인의 면모가 느껴졌다.

“로빈 단장의 위협이 있겠지만 그 정도는 알아서 처신할 거야.”

“그렇겠죠. 그러니까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로빈 단장을 속이고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로 로빈도 푸르푸르 단장이 진정한 자신의 사람이 아님을 눈치 챘을 것이다.

로빈은 그를 처리하고 싶을 것이고 푸르푸르 단장은 주의를 경계하며 자신을 지키려고 들 것이다.

“조만간 그를 초대한다고 했으니 로빈도 타인의 시선 때문에 그때까지는 건들지 않을 거야.”

“최대한 격식에 맞으면서도 과하지 않도록 식사를 준비해야겠군요.”

“그날을 위해 준비 잘해 줘.”

그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려고 했다.

아그리피나가 그런 란델리노를 멈춰 세웠다.

“아무리 예정되었던 일이라고 해도 예상치 못하게 앞당겨졌습니다. 좀 쉬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아그리피나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어머니의 분노를 맨몸으로 받아 낼 계획이라고 해도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다.

게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공작부인이 그를 죽이려고 들지 않았는가.

담담하게 보여도 속은 말이 아닐 것이었다.

그에게는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 모두가 내가 벌벌 떨고 있다고 뒤에서 수군거리겠지. 그 꼴은 죽어도 보기 싫네.”

“알겠습니다.”

란델리노가 차갑게 웃었다.

사방이 적들이었다.

어머니조차 자신이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를 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것으로 부족해서 친아버지라는 작자는 자신을 치워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가.

꿈속의 자신은 끝까지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뭐, 이제 아버지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으니 상관은 없다.

대신에 아버지가 자신의 뒤를 잇기 원하는 아들은 자신이 친히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아버지의 인정을 포기한 대가였다.

* * *

뚜벅, 뚜벅.

란델리노는 방을 나가서 우아하게 걸었다.

그러다가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아그리피나의 말이 맞았다.

그는 쉴 시간이 필요했다.

죽음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다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두려웠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고,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숨을 쉬기 어려운 기분이 들게 했다.

‘숨쉬기가 어렵다.’

아그리피나 앞에서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측근이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뭉친 사이였다.

란델리노는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약점 따위를 보일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서자마자 그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다.

그 방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있었다.

개인 서재라고 하기에는 과했다.

그곳 책상에는 한 여인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에 비치는 햇빛과 너무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녀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온 상대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란델리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 숨쉬기 어려웠던 심장이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잔잔하게 뛰었다.

“란델리노 백작님, 벌써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신 건가요?”

“응. 레티시아. 돌아왔어.”

레티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란델리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레티시아에게 ‘그런 일’이 전해지지 않도록 실리 시녀장이 손을 써뒀으리라.

과할 정도로 실리 시녀장은 레티시아를 아꼈다.

마치 딸아이가 꽃길만 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해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어차피 알려질 일인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란델리노의 땀을 닦았다.

“훈련장에서 힘드셨나 봐요. 이렇게 땀을 막 흘리시고요.”

“응. 많이 힘들었어.”

“제가 계속 말했잖아요. 너무 앞만 보고 달리면 쉬어야 할 때를 놓칠 수 있어요.”

“응. 네가 자주 그리 말했지.”

란델리노는 속으로 말했다.

‘너무 무서웠어. 어머니가 나를 진짜 죽일까 봐 두려웠어.’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끝낼까 봐 무서웠어.’

‘숨이 쉬어지지 않는 두려움이 나를 잠식할 것 같았어.’

‘그런데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졌어. 네가 있어서 숨이 쉬어져.’

자신의 벗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모르고 레티시아는 자기 할 말을 했다.

그 말은 란델리노를 향한 걱정이었다.

“그러면 몸이 아프게 된다는 말도 같이 했죠.”

“…….”

“안색도 좋지 않으세요. 쉬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녀가 그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봤다.

정말 순수한 걱정이었다.

눈빛에는 그 어떤 탐욕도, 불순한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목에 파고들었다.

“란델리노 백작님?”

“아까까지 아팠는데 이제 괜찮아졌어.”

레티시아는 갑작스러운 란델리노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으나 그를 피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안아 주며 토닥였다.

“괜찮아질 거예요. 괜찮아질 거예요. 이 또한 지나갈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란델리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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