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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47화 (147/221)

147화 의외의 인물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를 제외한 모두가 침을 자신도 모르게 삼켰다.

숨소리조차 조심해서 내야 할 분위기였다.

꿀꺽!

몇몇은 자신이 침을 삼킨 소리에 놀라기도 했다.

그 와중에 란델리노는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아래의 흙이 젖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 정말입니다. 어머니께서 괜찮다고 여기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 생각했습니다.”

“아까도 말했잖니? 너는 내가 믿지 못할 말만 한다고 말이지. 그런데 끝까지 믿지 못할 말만 하는구나.”

“저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누구보다 저를 잘 알지 않으십니까.”

“그래. 나는 누구보다 너를 잘 알지.”

석궁을 쥔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은 힘이 풀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너를 잘 알기 때문에.”

“제발 믿어 주십시오.”

오히려 아까보다 더 활을 쏘려고 하는 기미가 느껴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아들의 머리를 박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란델리노는 오랜 세월 공을 들인 아들이다.

비록 루비로즈 가문의 핏줄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리 치우려고 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가 죽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군! 목숨을 걸고 간청 드립니다. 제발 멈춰 주십시오!”

“…….”

그때, 누군가가 란델리노를 지키기 위해서 나섰다.

그 의외의 인물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란델리노가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있는 것에 비하면 편하고 덜 굴욕적으로 보였다.

그는 기사단 다섯 뱀 중 하나인 <푸른 뱀>의 단장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그대 지금 뭐하는 짓인가! 감히 주군의 행보를 막다니!”

“그만해라. 로빈.”

“아닙니다! 엄히 다스려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그. 만. 하. 라. 고.”

“죄송합니다.”

로빈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났느냐면 페루제 공작부인을 언짢게 만드는 실수를 할 정도였다.

정보와 첩보를 담당하는 <검은 뱀>을 제외한 나머지 뱀 기사단들은 <다섯 뱀>의 총단장인 로빈의 휘어잡고 있었다.

<검은 뱀>은 기사단의 특수성으로 인해 자율성이 크게 부여된 기사단이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 다음의 최우선 명령권자로 로빈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로빈이 <다섯 뱀> 기사단을 장악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푸른 뱀>의 단장인 로빈이 적대하는 란델리노를 구하려고 움직였다?

이것은 로빈이 <다섯 뱀>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푸른 뱀>의 단장의 뒤편에는 검은 뱀의 단장인 빅토르를 대신한 임시 스승이 살며시 서 있었다.

“제발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시고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허하지.”

“아무리 교황 폐하께서 주군을 지지하고 벨로나 공작가문 간의 혼인계약서가 주군께 유리하게 되어 있을지라도 가문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를 죽인다면 어찌 이 혼인과 혼인계약서의 효력이 유지가 되겠습니까?”

혼인계약서는 혼인 전에 혼인하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 놓는 계약서다.

엄연히 법적인 효력이 있는 공식문서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칸나 백작 부인을 이용해서 그 계약서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내용을 넣었다.

칸나 백작 부인은 벨로나 공작의 고모이자 그녀가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으로 오기 전까지 가문의 내정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다.

뭐, 지금은 벨로나 공작의 눈 밖에 나서 별로 좋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혼인계약서를 특수한 종이에다가 썼다.

계약 내용 변경을 위해 양쪽의 합의와 함께 교황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하는 효력이 있었다.

교황은 과거 성도를 공격한 일로 벨로나 공작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런 그가 벨로나 공작을 위해서 혼인계약서 내용 변경에 승인할 일은 없었다.

“이 혼인과 혼인계약서를 성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셨습니까? 그 노력을 모두 헛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 번거롭기는 했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짓이었다.

만약 그녀가 란델리노를 죽인다면 아무리 교황이라고 해도 벨로나 공작의 이혼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혼 사유가 너무 확실하게 되니까.

설령 벨로나 공작이 그 아들을 사랑하지 않더라고 말이다.

아들을 죽인 범인과 부부로 살라는 것은 세간에서 혀를 차고 욕을 할 일이었다.

혼인계약서는 혼인을 전제로 성사되는 계약이다.

이혼하게 되면 혼인계약서의 효력도 사라진다.

“한 번의 분노로 잃기에는 너무 많아.”

“맞습니다. 그러면 알펜 왕실이 어찌 나오겠습니까?”

알펜 왕국의 법에서 부부끼리의 죄는 연좌제였다.

왕실이 적극적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을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다.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몰아세우게 되면 벨로나 공작을 공격하는 꼴이 되었다.

친왕파의 한 축인 벨로나 공작을 공격한다는 것은 친왕파의 세력을 왕이 스스로 줄이는 것과 같았다.

“나를 쳐내려고 하겠지.”

“싸우자면 못 싸울 것은 아니나 굳이 그리 귀찮음을 감당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푸른 뱀>의 단장이 강하게 호응했다.

그는 자신의 주군에게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손실과 이득을 계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설득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도 그대가 말한 것들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문제는 아니야.”

분노로 아들을 죽이기 직전까지 간 여인은 빠르게 차분해졌다.

그녀는 다시금 제대로 석궁을 쏠 자세를 잡았다.

모두가 진짜로 란델리노를 죽이려고 한다고 여겼다.

<푸른 뱀> 단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모두의 예상처럼 석궁을 쐈다.

그렇지만 그 활은 정확하게 과녁에 맞았다.

“그러나 그대 말처럼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갈 필요는 없지.”

“감사합니다.”

“뭘, 그대가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어. 진짜 감사할 사람은 따로 있지.”

그녀의 시선이 다시 란델리노에게 향했다.

어머니가 빤히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만 일어나거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델리노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얼굴이 젖었으나 그 잘생긴 외모를 추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우는 모습도 멋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에게 석궁을 주고는 훈련장에서 벗어났다.

눈앞에서 갑자기 벌어진 엄청난 일에 대부분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란델리노는 어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바로 옷소매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자신을 구해 준 은인에게 다가갔다.

“정말 고맙네. 푸르푸르 단장.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의 몸은 땅속에 파묻혀 있었을 것이야.”

“아닙니다. 주군을 위해 충언을 내뱉은 것뿐입니다.”

<푸른 뱀>의 단장인 푸르푸르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여기서 그를 구하기 위해서 나섰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도 로빈이 그를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고맙네. 나를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나를 구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요.”

푸르푸르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 같아서는 로빈 총단장을 피해서 훈련장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나를 구해 준 일을 어찌 말로만 감사하겠다고 하겠는가! 내 조만간 그대를 초대할 것이니 와주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어찌 나를 은인에게 제대로 은혜를 갚지 않는 작자로 만들려고 하는가. 제발 내 초대를 받아주게.”

피는 잇지 않았어도 란델리노는 주군의 아들이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권유를 계속 거절하는 것은 모양새가 영~ 아니었다.

게다가 부당한 이유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푸르푸르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시면 초대하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날을 잡도록 하겠네!”

란델리노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훈련장을 돌아가려고 했다.

“스승님, 오늘은 더 이상 훈련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어서 가서 쉬시지요. 그리고…….”

그의 임시 스승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을 참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란델리노는 의아해하며 그를 마주봤다.

“혹시 아까의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네. 죄송합니다. 란델리노님을 위해서 나서지 못해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스승님의 입장을 잘 알고 이해합니다.”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델리노의 말은 진심이었다.

<검은 뱀>의 부단장이 자신을 위해서 나서는 것과 <푸른 뱀>의 단장이 나서는 것은 엄연히 그 여파와 결이 달랐다.

<검은 뱀>은 정보와 첩보를 위주로 하는 기사단이었으니까.

그런 기사단의 부단장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의 명령 없이?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실질적인 <검은 뱀>의 주인이 란델리노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할 것이다.

그 의심은 새로운 정보조직의 창설 필요성과 <검은 뱀>의 몰살을 고려할 불씨가 되리라.

상대가 주는 정보와 첩보 활동에 거짓이나 누락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정보의 신뢰성은 확 떨어진다.

정보 하나로 많은 승리와 패배가 결정지어지는 일들은 많다.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면 신뢰할 만한 조직을 새로 만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게 페루제 공작부인의 방식이다.

그것은 란델리노에게도 <검은 뱀>에게도 좋지 않았다.

란델리노가 웃으며 임시스승의 귀에 귓속말했다.

“아까 푸르푸르 단장이 나서도록 해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

란델리노가 한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분명히 기척 없이 은밀하게 푸르푸르 단장에게 다가갔다.

옆에 있던 자들도 눈치 채기 어려운 움직임이었거늘.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던 그가 어찌 알았을까?

정말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란델리노는 그 의문을 해소해 주듯이 다음 말을 했다.

“스승님께서 자기 몸만 사리고 바라만 보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저를 그리 믿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나 믿었습니다.”

란델리노가 듬직하게 말하자 그는 감동하며 눈을 빛냈다.

그런 그를 보며 눈인사를 하고는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저택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 시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상하신 곳은 없으시고요.”

그 시녀는 아그리피나였다.

그녀는 란델리노의 몸을 구석구석 보면서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괜찮아. 다행히 멀쩡히 돌아왔어.”

“정말이십니까?”

“그럼. 피나, 네가 봐도 다친 곳이 없잖아.”

여유롭게 말하며 아그리피나를 안심시켰다.

란델리노는 몸을 회전하며 자신이 다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 모습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식을 늦게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그 상황에 누가 감히 그곳을 벗어나서 그 사단을 전할 수 있겠어.”

란델리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미가 아들을 죽이려는 상황.

아내가 남편의 아들을 죽이려는 상황

모두가 그 상황의 전개와 결말이 궁금해서 발을 떼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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