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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46화 (146/221)

146화 석궁

란델리노는 벨로나 공작령에 도착하고서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엄선된 교사들에게 교양 수업을 듣고 검술 수업도 꾸준히 들었다.

빅토르가 없을 때는 그의 부하들이 그를 가르쳤다.

어머니가 암살당할 뻔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한 손으로 어깨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편지를 들고 있었다.

[평소처럼 보내라.]

참으로 간결한 내용이었다.

겨우 그딴 일로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답다면 어머니다운 것이지만… 어머니가 죽을 뻔했는데 관심두지 말라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나?”

그는 푸념하듯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어머니의 핏줄이었다면 이런 편지를 이렇게 쉽게 보냈을까 싶기도 했다.

편지를 받고는 어머니에게 달려갈 생각이 아예 사라졌다.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동요가 아니라 당당함일 것이니까.

암살을 ‘하찮은 일’로 만들어서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걱정도 하지 않는 아들이라고 뒤에서 욕먹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셨겠지.”

“욕은 먹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의 시녀인 아그리피나가 서재에 들어왔다.

그녀의 두 손 위에는 옷이 있었다.

운동을 하기 좋은 활동복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편지를 보냈고 그 말에 따랐다고 소문을 냈으니까요.”

북부에서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성격이 어떤지 악명이 높았다.

편지로 명령을 내렸다는 말만으로 란델리노의 행동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알아서 척척해 주니까 편하네.”

“그 정도는 되어야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거죠.”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어머니는 언제 오신다고 하지?”

“오늘 중에는 벨로나 공작령에 도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뻔뻔함에 엄지를 척하고 들고 싶었다.

어떻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인물이 있었던 가문 저택에서 며칠을 보낼 생각을 할까?

그것도 평온하게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고 한다.

솔직히 정상적인 반응은 다섯 뱀 기사단에게 조사를 맡기고 본인은 영지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에 위협을 느낀다면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그래서 암살의 배후 혹은 무리의 입장에서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것이다.

자신들이 그녀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이 굴고 있으니까.

“그러면 기사들과의 친분을 쌓으러 가 볼까?”

그가 아그리피나의 두 손 위에 있는 옷가지를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란델리노는 훈련장에 갔다.

“오셨습니까?”

“스승님은?”

그는 도착하자마 검은 뱀의 단장이며 자신의 스승인 빅토르를 찾았다.

이에 검은 뱀의 부단장이 대답했다.

“빅토르 단장은 외부 업무로 한동안 복귀하지 못하실 듯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대가 오늘은 내 스승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부단장이 임시로 오늘만은 란델리노의 스승이었다.

“그러면 스승님, 오늘 가르침 잘 받들겠습니다.”

“잠시지만 란델리노 백작님의 스승이 되어서 영광입니다.”

하대하던 말이 달라졌다.

또한 란델리노와 검은 뱀의 부단장이 하는 대화 내용은 진지했다.

이에 대비되게 과장된 태도로 장난스럽게 말투였다.

그들이 얼마나 친밀한지 알게 해줬다.

그들 사이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그러면 오랜만에 석궁을 해 볼까요?”

“석궁이요?”

“네. 한동안 검술에 집중했으니까요.”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저도 석궁 이야기를 해 볼까 했는데 말입니다. 한동안 하지 않아서 감을 잃기 직전이었거든요.”

란델리노는 웃으면서 흔쾌히 임시 스승의 말에 따랐다.

그뿐이랴?

임시라도 스승이라고 상대를 띄워 주기까지 했다.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란델리노는 이렇게 때와 상황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할 수 있었다.

“그리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윗사람이었던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쉽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것인데 어찌 어렵겠는가.

그러나 아랫사람이었던 사람을 윗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위에 있다는 우월감과 권위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의 관계는 ‘임시직’이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란델리노는 유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좋은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임시 스승이라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대하냐?”

“그치? 너무 부담스럽게 깍듯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편히 대하지도 않고 말이야.”

“저렇게 딱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대단해.”

마침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일부 기사들이 란델리노에 관해 호의적으로 말했다.

“그분 어린날에도 똘망똘망하기가 그지 없었다고 하잖아.”

“역시나 대단하시지.”

“크흠.”

그렇게 계속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명의 기사가 헛기침했다.

다른 기사들이 헛기침한 기사를 바라봤다.

그가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르켰다.

거기에는 차갑게 그들을 바라보는 로빈 단장이 있었다.

다섯 뱀 모두를 총괄하는 대단장이 말이다.

로빈이 그들을 보지는 않았으나 기사들은 로빈의 눈치를 봤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네.”

“그러게 말이야. 어서 훈련을 다시 해야지.”

“그래야겠군.”

그들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로빈 단장이 란델리노에게 적대적임을 깨닫게 되었음이다.

대놓고 티는 내지 않았으나 이를 알게 해주는 것들은 있었다.

방금 같은 짜증이 담긴 눈빛이 그예이다.

찰나이기는 했으나 그들은 기사였다.

란델리노의 평가가 올라가는 말들이 들릴 때마다 짧은 시간이라도 그런 눈빛을 보인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은 뱀을 제외한 다른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들이 언행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고 말이다.

팍!

팍!

팍!

기사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무시하며 란델리노는 석궁을 쐈다.

활은 과녁에 정확하게 맞았다.

“아, 란델리노 백작님은 거짓말쟁이셨군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감을 잃기 직전이라고 하셔 놓고 이렇게 잘하시면 어찌합니까?”

“과찬이십니다. 잘 맞추려고 얼마나 집중하는지 모릅니다.”

임시 스승과 란델리노는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잠시 웅성거리더니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들은 몸을 돌려서 뒤를 바라봤다.

그들의 주인이 귀환한 것이다.

란델리노는 빠르게 어머니 앞으로 갔다.

로빈 단장은 인사를 마쳤는지 페루제 공작부인 옆에 있었다.

란델리노가 속으로 로빈은 역시 얍삽한 인간이라고 욕했다.

품고 있는 생각과 달리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예의 있게 인사했다.

“어머니, 오셨습니까? 미리 전갈을 보내셨다면 마중을 나왔을 것인데요.”

“내가 가면 되는데 굳이 너에게 마중을 나오라고 하겠니?”

란델리노가 어머니가 발걸음을 하게 한 것에 죄송해 하듯이 말하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훈련을 방해한 모양이구나.”

“방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가 와서 좋은 것을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너무 좋구나.”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란델리노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러는 것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 말이 마음에 든 것인지 그녀가 다정하게 그의 뺨을 만졌다.

곧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석궁이구나.”

“네.”

“좋은 무기지. 기존의 활보다 위력은 좋으면서 쏘기는 편하니까. 배우기도 쉬우니 교육시간도 줄고 좋지.”

“그래서 요즘 애용하고 있습니다.”

“한번 만져 봐도 되겠니?”

“그럼요. 어머니.”

란델리노는 석궁을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넘겼다.

그녀가 좌우를 돌려가며 석궁을 구경했다.

그리고는 과녁을 맞춰볼 요량인지 석궁을 조준했다.

어정쩡한 자세였으나 활을 쐈다.

활은 과녁 근처도 가지 못했다.

“과녁 근처에도 가지 못했구나.”

“팔에 힘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하긴 과녁에 제대로 조준하는 것이 힘들기는 했지.”

란델리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석궁을 쳐다봤다.

그리고 옆의 시종이 가져온 활을 장착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빠르고 불필요한 행동이 없이 간결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란델리노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시 석궁을 들었다.

“헉!”

“주군!”

“어머니!”

“여기라면 아무리 팔 힘이 없어도 맞출 수 있겠지. 그치?”

그녀가 석궁을 어딘가로 조준했다.

바로 란델리노였다.

바로 지척에 있는 아들을 향해 석궁을 든 것이다.

그녀가 석궁을 발사하면 눈앞의 란델리노는 즉사였다.

석궁은 정확하게 그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어머니, 갑자기 왜 이러는 것입니까?”

“갑자기 왜 이러냐고?”

“제가 어머니의 심기를 언짢게 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말해 주신다면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란델리노는 몸이 굳었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의 머리는 혼란 그 자체였다.

혹시 자신이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과대망상까지 할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어머니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말해 달라고? 너야말로 나에게 해야 할 말이 있을 것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려움을 이기려는 듯이 란델리는 이를 잠시 물었다가 놓았다.

“루비카 남작!”

“……?!”

“네가 무슨 저의로 루비카 남작을 만났느냐?”

그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곧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땅에 대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적장자가 하기에는 굴욕적인 행동이었다.

귀족적이지 않은 행동은 조롱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리하였다.

청소년의 사춘기로 반항심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대는 페루제 공작부인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기어야 함이 마땅했다.

“어머니! 사냥을 하다가 만난 사이일 뿐입니다.”

“사냥을 하다가? 그것을 믿으라고?”

“네. 믿어 주십시오!”

그는 몸과 머리를 들고 소리쳤다.

애절하고도 절박한 외침이었다.

믿어달라는 말이 이렇게 들릴 수 있음이다.

“루비카 가문은 루비로즈 백작가문의 가신 가문 중 가장 발언권이 강한 가문이다. 그런 가문의 가주를 우연히 만났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냐!”

“어, 어머니!”

페루제 공작부인이 석궁에 힘을 쥐려고 했다.

이에 그가 다시 머리를 땅에 댔다.

그가 떨리는 손을 차마 진정시키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제가 일부러 루비카 남작에게 접근했습니다.”

“왜?”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알펜 왕국에서 제가 귀족들과 만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셔서 라스타 왕국 귀족들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녀가 쥔 석궁은 란델리노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냉혹한 눈으로 아들을 내려다봤다.

“내가 허락한 선이라고 여겼다고 말하는 것이냐? 너는 계속 내가 믿지 못할 말만 하는구나.”

“진짜입니다! 루비카 남작이 호되게 저를 꾸짖었습니다. 제정신이냐고 어찌 어머니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오냐고 말입니다.”

“…….”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에게 혼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페루제 공작부인도 란델리노도 입을 열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머리를 땅에 대고 그런 아들을 페루제 공작부인은 바라만 봤다.

오직 스쳐지나가는 바람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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