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예상할 수 없는 여인
그가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고, 이내 내쉬었다.
“지금 우리는 큰 도박을 하는 중입니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전례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뒤에서 암암리에 활동했잖아.”
“그리 쉽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조직원이 아닌 이에게 정체를 드러내며 지원을 하는 것이니까요.”
조직 내에서 란델리노에 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누군가는 대업을 막은 원수의 손자였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업을 위해 헌신했던 명문가의 핏줄이었다.
란델리노의 돕기로 한 것은 순전히 그를 낳은 친모의 공적과 가문의 신의 때문이었다.
조직 내에서 란델리노를 향한 적대적 시선보다 호의적인 시선이 더 많았다.
만약 란델리노가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의 접선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으리라.
아니, 그들의 정체를 알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으시는군…….”
“조직의 역사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권력을 쥔 이들 중에 저희를 눈치 챈 이들이 없었습니까?”
란델리노의 말에도 그는 의연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 챈 이들이 아예 없었겠는가?
그들은 권력자였다.
일부는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선택했으나 나머지는 아니었다.
그들을 적대한 권력자들은 정체를 모를 조직이 없어지기를 원했다.
병사들을 동원해서 그들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했다.
일반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기에 아직도 존재했다.
때로는 내부의 분열을 유도해서 살아남았고 어떤 때는 외부세력을 끌어들여서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가진 정보력과 영향력, 자금력이 월등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고 지금도 존재하지요.”
“지금까지는 살아남았다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그런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오만함을 품고 있었다면 지금 여기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란델리노가 여유롭게 웃었다.
참으로 한결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란델리노를 살펴봤다.
외관은 벨로나 공작을 닮았다.
누가 보아도 벨로나 공작의 자식이었다.
다행히도 벨로나 공작보다 순한 입매와 눈매는 친모를 연상하게 해줄 만했다.
그런데도 전혀 그의 친모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서 나오는 여유로움에 배여 있는 날카로움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닮았다.
당사자는 여유롭고 상대는 숨이 막히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얼마나 란델리노에게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죽은 여인을 잠시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여인을 떠올려 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
“무엇입니까?”
“그대도 알겠지만 지금의 어머니라면 능히 제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야. 그런데 왜 어머니에게 다가가지 않았지?”
란델리노의 의문은 합당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라스타 국왕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만 아니라 카플란 왕국, 알펜 왕국, 헬리오 왕국까지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
헬리오 대공과 나란히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카플란 왕국도 강국인 라스타 왕국의 눈치를 봤다.
강력한 군사력과 막강한 자금력까지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고 제대로 준비한다면 몇 년 후에 제국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제국의 재림을 염원하는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저희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주변에 사람들을 두고는 나서지 않았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입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 페루제 공작부인 측에다가도 그들의 사람들을 심어 놓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인재를 좋아했고 그들은 인재였다.
그 능력을 이용해서 나름 높은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
언제든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전쟁을 유도하는 것도 가능했다.
명분은 만들면 되었으니까.
“도저히 예상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어머니가 어려운 분이시기는 하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시대의 관념을 바꿔 놓고 있었다.
동물형 정령을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여인이 귀족가문의 가주가 된다는 것도, 그 여인이 일국의 국왕에게 경국부인이라는 칭호와 함께 왕과 나란히 앉을 권리를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헬리오 대공이 군사적 지원요청을 위해 직접 타국에 방문한 일은 지금도 회자되는 일 중 하나였다.
헬리오 대공을 헬리오 왕국 선왕을 죽인 배후인양 말했음에도 그냥 넘어간 것은 더더욱 유명했다.
“무서웠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말인데?”
무서웠다.
그것은 솔직한 말이었다.
권력자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꿈꾸는 미래가 있다.
어느 권력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미래를.
어느 권력자는 백성들이 평온한 미래를.
어느 권력자는 지금이 유지되는 미래를.
어느 권력자는 부국강병의 미래를.
각자 다른 미래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 있었다.
어떤 미래일지 밑그림 정도는 그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달랐다.
“그녀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강한 군사력을 키울 전략과 지원을 하고 사교계를 군림하고 있지요.”
“…….”
란델리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도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그런 의문을 품을 시간에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답을 알았다.
비록 완전한 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고 있는 미래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미래를 위해서 이리하는지도 모르고요. 마치 이 모든 과정도 자신의 목표를 위한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기는 하지.”
사람의 목적을 알면 접근하기 쉽다.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내놓으면 상대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페루제 공작부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어떤 때는 백성을 위하는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한없이 탐욕스러운 사람처럼 보였다.
다른 때에는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상대를 밑도 끝도 없이 풀어주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상되지 않는 인물을 잘못 건드렸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도 어머니를 완전히 알 수 없어. 어머니 본인이 원하지 않고 말이야.”
란델리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단단한 말투였다.
“그렇게 그대가 의문을 품고 있다면 답을 알려 주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목적은 백성을 위해서도,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도, 자신의 부유함을 위해서도 아니야.”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움직인단 말입니까?”
“가문을 위해서.”
란델리노는 완벽한 답을 내놓았다.
불완전해 보이지만 본질을 꿰뚫은 완벽한 답이었다.
“어머니가 백성을 위하는 것처럼 구는 것도,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도, 엄청난 부를 얻는 것도 모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
“오직 가문만을 위해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란델리노의 답을 들은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가문만을 위해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것이라면 너무 과했다.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위대한 대의를 위해서였다면 수긍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가문만을 위해서 한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 여러 왕국들에도 힘을 뻗친단 말인가!
가문만 위한 행보치고는 너무 파장이 컸다.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던 그는 곧 진정이 되었다.
“저희가 그녀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군요.”
“그래. 그래서 그대들의 지금 이렇게 나와 함께하는 것이지.”
가문만을 위해서 움직인 여인이 제국의 재림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가문을 위협한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국의 재림을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했고, 그 전쟁에 패배라고 한다면 가문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것이니까.
올바른 판단을 내린 그가 란델리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치 중요한 일을 선언하는 것처럼 엄숙함이 느껴졌다.
“그대는 우리와 한 약조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단호한 말에 란델리노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 말투에 상대가 언짢아 했지만, 란델리노는 그대로였다.
“지금 장난을 치고 싶습니까?”
“분위기 좀 풀라고 해본 말이네. 긴장을 너무 풀어도 문제지만 그 반대도 문제니까.”
란델리노의 변명에도 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주 진지했고 그들은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그대들이 내가 내민 조건을 이룬다면 반드시 이룰 것이야.”
“…….”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란델리노의 장난스러움이 짜증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장난을 칠 여유가 그가 가진 확신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배포가 있는 놈이구나 싶기도 했다.
란델리노의 얼굴에서 서서히 장난스러움이 지워졌다.
거기에는 단호함과 확신 그리고 열망만이 남았다.
“내가 어머니의 모든 것을 잇게 되는 날이 롬 제국의 재림을 시작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부디 그리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리되었으면 ‘좋겠군요’가 아니야. 그리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란델리노가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마치 그따위의 각오로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버렸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한번 있잖아?”
“그대만 한번이지요.”
“그게 아닌 것은 그대가 더 잘 알겠지.”
그리고는 다시 장난스럽게 한쪽 눈으로 윙크를 했다.
그런 란델리노의 모습에 그는 이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 북부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는 여인에게 자란 티가 났다.
순식간에 사람을 긴장하게도 하고 풀게도 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후계자 경쟁을 할 란델리노는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들의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이 대륙이 상승세를 탔던 적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동안 이렇게 급격한 변화와 혁신을 이루는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잘 알았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제국의 재림은 더는 오지 않으리라.
천 년 만에 도래한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천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 한 번의 기회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내리도록 하지요.”
“그 기대를 반드시 이뤄 주지. 그대들이 먼저 나를 어머니의 후계자로 올려놔야겠지만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란델리노가 말했다.
“고용인이 너무 오래 여기에 있었군.”
“고객이 불만사항을 항의했다고 하면 넘어갈 것입니다.”
“뭐, 내가 진상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이만 나가 보지.”
그가 나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란델리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유품에도 그대 조직의 이름이 없던데 말이야. 조직 이름이 무엇인가?”
“아나스타시스입니다. 아나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군. 알았네.”
아나스타시스.
고대어로 뜻은 부활이다.
대답을 끝으로 아나스의 조직원은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