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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43화 (143/221)

143화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자신을 암살하려던 죄인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저는 주군께서 설립하신 신전아카데미 출신입니다.”

“그렇구나. 잘 성장해 줘서 고맙구나. 앞으로도 잘해다오.”

“죄인의 자식이었던 저를 정화시켜 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신입 기사는 그녀가 말을 걸어 준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홀해했다.

그는 그 감동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죄인을 끌고 가려고 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런데 말이다. 그대의 이름은 뭐지?”

“애반스 마테오입니다.”

“신전에서 새롭게 이름을 받기 전의 이름은?”

“아론 마스체니입니다.”

“그렇구나. 좋은 이름인데 바꾸게 해서 미안한 걸.”

“아닙니다. 죄인의 낙인이던 이름을 버리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고맙구나. 너의 마음을 잊지 않으마.”

“영광입니다!”

그 이름을 듣자 암살미수범의 몸이 떨렸다.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름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아들이었으니까.

루비로즈 가문에서 일정 나이 이하의 아이들은 살려 놓았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문으로 치부되며 서서히 사라졌다.

루비로즈 백작가문의 병사들이 워낙 귀족들을 완벽하게 죽였기 때문이다.

훗날 분란의 씨앗이 될 가문의 아이들을 살려 놓았을 리 없다고 여긴 배경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살아 있었다.

그 아들은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를 은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진짜 성모를 보듯이 페루제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참으로 맹목적이었다.

“으아아아악!”

“아직도 성모님을 해치려고 하다니!”

“윽!”

아비를 알아보지 못한 아들은 그의 배를 때려서 제압했다.

암살미수범은 가족과 가문의 복수를 위해 달려왔던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재갈 때문에 제대로 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났음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들을 보여줘서 절망감까지 주다니!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진실과 그 아들이 공작부인을 누구보다 따르고 있다는 진실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기쁨과 그런 아들이 자신을 경멸하며 바라보고 있다는 절망감은 공존했다.

쓰러진 그를 보고 페루제 공작부인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는 것처럼 착각할 만했다.

“가려고 할 때마다 막아서 미안한데 말이다.”

“아닙니다!”

신입 기사, 애반스 마테오는 눈을 반짝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얼마든지 물어봐 달라고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아론 마스체니의 아버지가 상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아론 마스체니에서 애반스 마테오가 되리라고도, 원수를 동경하며 따르는 것도 말이다.

“혹시라도 네 아비가 살아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 살아 있다면 내가 찾아서 만나게 해줄 수 있다.”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만약 살아 있다면 제 손으로 그 죄인을 처단할 것입니다.”

“아버지인데도?”

“아버지라도 해도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살아 있다면 죽음이라는 벌을 거부한 악인입니다. 게다가 성모를 해하려고 한 작자라고 들었습니다. 용서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알았다.”

애반스 마테오는 자신의 말에 단호함을 담았다.

비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절대 변할 수 없는 이치처럼 말이다.

혁명 당시에 사라진 귀족 가문의 아이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거둬진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광신도로 만들기 위함이다.

아이들에게 그들은 죄인의 자식이라며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이를 구원해 줄 인물은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가르침을 받게 한 것이다.

그녀가 말을 마치고 다시 암살미수범을 슬쩍 봤다.

자애롭던 미소는 비웃음으로 돌변했다.

부채로 입가를 감췄으나 눈빛에서 느껴졌다.

페루제 공작부인 자신이 저 기사의 친부보다 더 높이 있다는 우월감과 복수를 한다면서 이용만 당한 상대에 대한 비웃음이 복합적으로 있었다.

연회장은 차분하다 못해서 싸늘해졌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끌려가던 죄인이 연회장을 벗어났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뒤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누군가는 어둠의 정령왕인 에레보스였다.

“하급 정령들이 네가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를 하더라?”

“…….”

그녀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계약자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말에 경청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나는 잠시 생각할 것이 있네. 그러니 이만 이 모임을 파하지.”

“네, 알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부인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곳의 안주인인 부인조차 예외는 될 수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나가고 연회장에 오직 그녀만 남았다.

그러자 그녀는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댔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가 웃었다.

에레보스는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편안한 미소가 좋았다.

사실 빅토르라는 놈이 그 미소를 먼저 보기는 했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 나를 흥미롭게 할까나?”

“그게 말이야. 하급 정령이 나무 그림자 속에서 네 아들을 봤다고 하더라고.”

“사냥터에서 봤겠군.”

“맞아. 숲에서 봤다고 했어. 이미 알고 있었어?”

“미리 말하고 갔어. 사냥을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틈틈이 가지.”

“그래. 그런데 전에 너를 찾아왔던 루비카 남작이라는 놈과 만나고 있었다고 해.”

에레보스가 루비카 남작과 란델리노가 만났다는 말에 그녀가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루비카 남작? 그가 정말 맞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지성까지 없지만 하급 정령도 지성이 있어. 환영으로 얼굴을 보여주니까 맞다고 했어.”

에레보스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에 삐졌음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평소였다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그를 풀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정령이었기에, 친우였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타나토스,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재차 확인하는 것이야.”

“어? 중요한 문제야?”

에레보스는 빛의 정령왕과 더불어서 신 다음으로 높은 존재였다.

하찮은 인간들의 일에 관심을 쓸 리가 없었다.

그는 지상의 낮을 궁금해 했으나 깊게 파고들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관광지에서 가이드에게 기본적인 지식만 듣고 구경 다니는 것과 같았다.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사실 이것도 자신의 계약자인 페루제 공작부인과 대화하는 것이 좋아서 알아낸 것이었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표정이 굳은 것에 걱정이 되었다.

언제나 여유롭던 그녀답지 않은 얼굴이었으니까.

당연했다.

루비카 남작과 란델리노가 밀회를 가진 이유는 명확했다.

란델리노가 제대로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마음이 드러냈으리라.

감히 루비로즈 가문의 핏줄이 아닌 아이가 말이다.

자신의 허락을 억지로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루비로즈 가문을 분열시키려고 함이다.

자신이 드높인 루비로즈 가문을 더럽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 중요한 문제야.”

“중급 정령이 있었으면 어떤 대화를 했는지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인데…….”

에레보스는 안타까웠다.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하급 정령의 기억을 억지로 헤집어 놔서 다치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어둠의 정령들을 다스리고 지켜야 할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타나토스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일어섰다.

“타나토스,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래?”

“내가 너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있어?”

“아니.”

에레보스가 안도하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에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곧 그녀가 서늘한 얼굴로 연회장을 나섰다.

혼잣말하면서 말이다.

“직접 알아내면 되니까 괜찮아.”

루비카 남작과 란델리노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란델리노의 마음이다.

그가 진짜로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 경쟁에 뛰어들려는 것인지, 아니면 간만 보려고 하는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간만 보려고 한다면 곧 포기하겠지만 진심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니까.

* * *

이 연회 이후에 벌어진 일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도르테아 남작부부가 그 시녀와 아들의 혼인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진실된 사랑이 통했다며 이야기를 만들며 좋아했다.

반면에 귀족들은 도르테아 남작부인이 왜 몰락가문의 여식을 며느리로 허락했는지, 도르테아 남작도 이에 동의했는지 모를 일이라며 수군거렸다.

그 의문은 시녀도 가지고 있었다.

“남작부인, 어찌하여 저를 허락하셨습니까? 저는 지참금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집안의 여식입니다.”

“글쎄… 솔직히 지금도 네가 탐탁지 않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처럼 귀족 같지도 않은 귀족이니까.”

도르테아 남작부인은 미래의 며느리를 위아래로 봤다.

험하게 자라서인지 아직도 귀족의 예법이 어색했다.

처음보다 많이 나아진 것을 보면 노력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그럼에도 허락을 한 것은 믿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무엇이요?”

“사람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처럼 욕심에만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것이다. 사랑조차, 선의조차 욕심을 위해 만든 거짓 감정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시녀는 멍하니 도르테아 남작부인을 바라봤다.

전혀 예상치 못한 허락의 이유였으니까.

“연회장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있었으나 페루제 공작부인이 무서운 것이 더 컸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름다웠고 우아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웃으면서 상대를 파멸로 인도할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일 분이시다. 시녀였던 너는 더 그러하겠지. 그런 분을 상대로 자신은 진심으로 내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어.”

도르테아 부인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풀어졌다.

미래의 며느리를 믿는 모습이었다.

“너라면 공작부인의 말을 부정해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

그녀는 도르테아 부인의 진심에 감동하며 말했다.

그러면 시녀와 도르테아 남작가문의 후계자 간의 사랑은 행복한 결말이었을까?

생활력이 강했던 예비 도르테아 부인은 영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과거보다 돈을 아끼고 필요한 곳에 더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시어머니의 기대와 남편의 사랑에 최대한 호응한 것이다.

몇 년 후 귀족사회에서 며느리를 잘 들었다는 소리까지 조금씩 퍼져 나갔다.

“도르테아 가문의 작은 부인이 아주 야무지다며?”

“그렇다고 하네. 가문의 재정을 늘리는데 한몫했다고 들었어.”

“몰락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들일만 했네.”

거리를 두던 도르테아 남작도 며느리를 아주 예뻐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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