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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41화 (141/221)

141화 같은 사랑

시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울컥해 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오직 시녀 자신뿐이었다.

대단한 귀부인들의 시선이 시녀에게 쏠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무례하다고 판단이 되거나 공작부인의 심기가 불편하면 나서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자신은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다.

그것만은 모두가 부정해도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시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자신은 당신과 다르다는 근거를 내뱉었다.

“시를 배웠어도 상대를 위하지 않는다면 그 시를 짓고 읊지 않을 것이에요.”

“맞는 말이야.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시도 짓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마치 친한 이웃과 편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로 즐거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그거 아니? 반대로 상대를 위하지 않아도 시를 짓고 읊을 수 있단다. 몰락 귀족으로 고생이란 고생을 한 너도 알 것이야.”

“…….”

시녀는 그 말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처럼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서, 불순한 의도를 위해서 사람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런 추악한 이들 사이에서 거짓된 사랑을 말하며, 거짓으로 사랑의 시를 읊는 사람들은 준수한 편에 속한다.

“한순간의 감정을 평생의 마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아. 놀이에 불과한 한때의 감정에 사로잡히다니 웃기지.”

“…….”

“물론 진실만 있고 아름다운 ‘너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야. 그런 작자들도 있다는 것이지. 오해하지 말렴.”

“네.”

시녀는 한순간의 열정에 빠져서 불타오르다가 식어 버린 사랑도 봤다.

고용주의 아들 혹은 조카의 정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시녀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녀들은 몰랐으리라, 그들이 적극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짧게 불타고 끝날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사랑을 진실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녀의 연인은 달랐다.

도르테아 영식은 그런 불한당들과 전혀 다른 사내였다.

시녀는 애써 자신의 불안함을 가슴 안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뚱하고 침묵하니 재미가 없구나.”

시녀의 반응이 재미가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하품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도르테아 영식이 선물을 꼭 사서 준다고 했지?”

“예. 저를 생각해서 사다 주시는 것입니다.”

시녀의 침울했던 눈빛에서 활기가 옅게 띠었다.

저 무섭고 차가운 여인의 말에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남편에게 사랑의 선물조차 받은 기억이 없는 공작부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사랑과는 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사랑만큼은 공작부인보다 위에 있다고 여겼다.

“세상에서 너를 가장 아껴 주는 분이라고 했지?”

“네, 도르테아 영식께서는 세상에서 저를 가장 아껴 주시는 분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이었다.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그런데 페루제 공작부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불쌍해라. 진정 그리 생각하니?”

“네.”

시녀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확신을 드러냈다.

마음속에 불안이 싹트고 있기는 했다.

잔인한 말로 자신의 심장을 파먹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무서웠다.

몸이 저절로 움츠려드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시녀의 옅은 활기는 금방 사그라졌다.

그런 시녀를 본체만체하고는 그녀는 혼잣말했다.

“세상을 아직 덜 살았구나. 괜찮다. 그럴 수 있지. 젊으니까.”

“…….”

“너는 고마워해야 해. 내가 원래 이런 충고는 잘 하지 않거든.”

“감사합니다.”

시녀는 전혀 감사하지 않음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위계가 분명한 사회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임에도 하지 않는다면 큰 곤혹을 치를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강렬한 공작부인의 눈빛에 저절로 그런 말을 내뱉게 되어 버렸을지 모른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양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랑에 빠진 여인 그 자체였다.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말이 나올 차례였다.

“네가 아는 사람들과 너 중에서 너를 가장 아끼는 것이야.”

그 말이 전하는 바는 명확했다.

모두 중에서 시녀를 가장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시녀 자신을 포함하여 시녀가 아는 사람 중에서 아낀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동시에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나대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충고였다.

시녀가 사람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지인들의 위치가 다 고만고만하지 않겠는가?

시녀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할 자격조차 없음이다.

시녀는 누군가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기에는 하찮았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면 나중에 호되게 큰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유념해.”

“알겠습니다.”

“아! 아까 네가 이런 말도 했지?”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참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근히, 묘하게 들뜬 것 같았다.

반면에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시녀의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정신적으로 얼마나 몰렸으면 이리되었을까 싶었다.

귀부인들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 시녀가 도르테아 영식과 헤어질 것이니 그만 보내달라고 애원해도 말이다.

아니, 수치심과 모멸감에 치를 떨며 뛰쳐나가도 용서할 아량을 베풀어줄 수 있었다.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선물을 준다고? 분명히 네가 만족할 만한, 너에게는 비싼 선물들이었을 거야.”

“저는…….”

“그것을 위해서는 그만한 지출을 감당할 만큼의 재력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니.”

시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시녀가 사랑한 사람은 도르테아 영식이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너를 믿어. 도르테아 가문의 영식을, 도르테아 가문의 후계자를 사랑한다는 너의 마음을 말이야.”

페루제 공작부인은 시녀의 마음을 잘근잘근 씹어 버렸다.

“이제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다르지 않음을 이해했니?”

페루제 공작부인의 미소가, 그 눈빛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언제나 완벽했으나 더 완벽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시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지 않았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서는 황홀해했다.

“너를 보니까 내가 그이를 처음 사랑하게 된 때가 떠올라. 지금도 사랑하지만 그때는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했지.”

그것이 시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시녀는 자신의 사랑을 부정당했고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커졌다.

“왜 우니? 우리 대화에 울만한 이야기가 있었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나 시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시녀가 이유를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인간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런 시녀의 마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거슬렸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았으니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군. 이제 그만 가 봐.”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녀는 눈물을 닦아 내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연회장을 벗어났다.

달아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모두의 시선이 빠르게 사라지는 시녀에게 향해 있을 때였다.

“윽!”

“꺄아아악!”

페루제 공작부인의 곁에서 와인을 나눠 주던 시종이 쓰러졌다.

그의 곁에는 단도가 있었다.

그 단도로 목을 노리던 시종은 도리어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를 막기 위한 어떤 행동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상황 파악이 된 부인들이 혼비백산이 되었다.

“어서 사람을 불러요!”

“꺄아아아! 어떻게요!”

비명에 기사들이 몰려들어 왔다.

대단한 가문의 부인들이 참석한 만큼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부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라!”

“불온한 죄인을 어서 제압해!”

“예!”

연회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기사들이 페루제 공작부인 암살미수범을 제압했음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 어머 어떡해요?!”

“그, 그러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지?”

“너무 무서워요.”

품위가 없고 가벼웠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근처에 놓여 있던 다른 부인의 와인잔을 들고는 떨어뜨렸다.

쨍그랑!

붉은 와인이 바닥을 물들였다.

마치 피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행동해. 이게 무슨 짓이야?”

우아한 말투였으나 언짢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암살 대상인 당사자는 여유만만이고, 관계가 없는 이들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부인들을 한심하게 보았다.

“어느 때이고 의연하고 우아해야지. 쯧.”

“죄, 죄송합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혀를 차자 다른 부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난리가 날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사과를 해야 하는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그만하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되었네. 좋았던 기분이 나빠졌어. 갈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게.”

일부 부인들은 얼른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들은 이곳에, 페루제 공작부인 곁에 남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남아서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와 달리 주최자와 장미회의 부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다시 앉았다.

그들은 이후의 일을 직접 목도할 자격이 있었다.

주최자는 이 연회의 주인으로, 장미회의 부인들은 공작부인의 사람으로 그 자격을 갖췄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그제야 페루제 공작부인의 시선에 암살미수범이 닿았다.

“데려와.”

“예!”

그녀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죄인을 그녀 앞에 꿇렸다.

“머리를 들게 해.”

“윽!”

기사가 죄인의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죄인에게서 신음이 나왔다.

그녀가 찬찬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이의 얼굴을 관찰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분노도, 배후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도 없었다.

그냥 얼굴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너는 나를 흔들 수 없다고 표현하는 듯했다.

한참을 보고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리 구면인가? 어디에서 본 듯한데 말이야?”

그 말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며 상대를 떠올리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인물을 만나는 그녀였다.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네. 너는 누구니?”

“내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고 이거나 받아라! 튓!”

그 암살미수범이 그녀에게 침을 뱉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뺨에 침이 묻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침은 닿지 않았다.

어떤 막에 가로막혀서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놈이!”

“악!”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던 기사가 소리치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기사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공작부인이 자신을 질책할까 두려웠음이다.

“되었다. 더렵혀졌다면 모를까 괜찮으니까.”

그녀가 손을 들어서 기사의 과한 행동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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