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페루제 공작부인도 사랑할 줄 안다
시녀는 도저히 무슨 저의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해하기 어렵니?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말이야.”
사랑은 갑자기 마음에 내려앉는 것이다.
뜬금없이 갑자기 오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나이도, 출신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사랑에 불순한 의도가 있음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빛은 전혀 달랐다.
“너를 보니 내가 그이를 처음 알게 된 때가 생각이 나.”
“…….”
“그때의 풋풋함이 떠오른다고 할까나. 그래서 불렀어. 그러니까 물음에 대답해 줄래?”
귀부인들은 자신들이 헛것을 들었나 싶었다.
사랑? 풋풋함?
페루제 공작부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언급조차 될 일이 없을 단어가 당사자 입에서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그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아리송했다.
눈빛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 그 자체였다.
그러나 상대는 페루제 공작부인이다.
그 눈빛조차 연기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죄송하지만 저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분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아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으흠. 실망스러운 답변인 걸?”
정말로 재미란 하나도 없는 대답이었다.
이러려고 이 시녀를 기다리면서까지 만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실망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 질문이 어려웠나?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는데 의외네.”
이 아이가 머리가 나쁘구나 싶었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질문을 좀 쉽게 해야겠구나. 상대의 수준에 맞춰야지.”
“훗.”
주변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시녀는 더 이상 도르테아 영식을 유혹한 천박한 여인이 아니었다.
공작부인의 흥미를 보인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윗사람을 따라서 아랫사람도 행동하는 법이다.
귀부인들의 눈에는 어느덧 시녀에 관한 경멸은 사라졌다.
그들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이 집중했다.
시녀는 자신을 대놓고 경멸하고 싫어하는 도르테아 부인보다 눈앞의 페루제 공작부인이 더 싫었다.
호감을 드러낸 눈빛으로 자신을 한없이 깎아내리고 있었다.
악의 없는 악한 행동이었다.
“도르테아 영식의 어떤 면이 좋니? 장점 말이야. 그것은 말할 수 있겠지.”
“그분은 다정하십니다. 아랫사람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아십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니 시녀는 모멸감이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줍은 얼굴로 그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저를 가장 먼저 생각해 주시고 아름다운 시를 읊어주시지요. 저를 위해 시를 지어 오기까지 해주십니다.”
“또 있느냐?”
“세상에서 저를 가장 아껴 주시는 분입니다. 저를 생각하여 외출하고 돌아오면 작은 선물을 꼭 사서 주셨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 정말 진심으로 도르테아 영식을 사랑하는구나.”
귀부인들은 저 시녀의 말 중 어느 부분이 아름다운 이야기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단순히 도르테아 영식의 장점을 말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음흉한 의도를 숨긴 거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도 그랬지. 나도 그이를 그런 눈빛으로 사랑했단다. 물론 지금도 사랑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봐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빛이었다.
부인들은 그 눈빛과 말에 서로를 바라봤다.
—공작부인이 벨로나 공작을 사랑한다? 그것이 진실일까요?
—부인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잊을 만하면 벨로나 영지에서 두 분이 싸우는 소리가 성에 울려 퍼진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칸나 백작부인을 대놓고 찍어 누르는 분이세요. 사랑하는 남자와 권력 다툼을 하는 분이고요!
—아, 제가 어리석었네요.
부인들은 금방 결론을 내렸다.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진심이라고는 없는 말을 하셨다고 말이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한다.
성서에 나온 그것은 부부의 첫 번째 의무였다.
에클레시아의 독실한 신자인 페루제 공작부인이다.
그런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서를 따르지 않는 말과 같았다.
분명히 그래서 그리 말한 것이라 부인들은 믿었다.
“나는 그이에 대해서 알자마자 사랑에 빠졌단다.”
그녀는 마치 그 당시를 회상하듯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시녀도 귀부인들도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자꾸 벨로나 공작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니 진짜 그런 것처럼 느꼈다.
방금 전에 결론을 내렸음에도 혹시나 싶었던 것이다.
“벨로나 공작 가문의 추정 재산을 가늠하고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지 아니?”
페루제 공작부인 일어나서는 시녀의 주변을 돌면서 걸었다.
진짜로 가슴이 떨려하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벨로나 공작 가문의 역사와 많은 공적들을 봐도 가슴이 떨리는데 그이 개인이 세운 공적도 대단했어. 그이를 어서 만나고 싶다고 기도를 했지.”
그녀가 시녀의 어깨를 슬쩍 만졌다.
그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벨로나 공작 가문의 정계 영향력을 파악하고는 전율이 일어났어.”
그때를 떠올리는지 눈에는 소유욕에 불타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몬스터들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영웅이자, 왕의 신임을 받는 권력자가 된 공작.
그 남자는 자신과 너무 잘 어울렸다.
자신을 빛나게 해줄 인물이었다.
“그이에 관해 알고 나는 이리 생각했단다. 그이는 나를 위한 존재구나 하고 말이야.”
시종이 가져온 와인잔을 들며 한 입 마시고는 잔을 시종에게 넘겼다.
수줍어하는 표정을 보여줬다.
그리고는 뒤에서 시녀의 양어깨를 잡고는 귓속말했다.
“그이가 70세의 노인이라고 해도, 그이가 신체적 문제가 있는 환자라고 해도, 그이가 추악한 외모라고 해도 나를 그를 사랑했을 것이야.”
시녀는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신분의 차이가 너무 컸으나 그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페루제 공작부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저는 달라요! 저희는 순수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요!”
악명이 자자한 공작부인 앞에서도 당당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시녀의 분노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도르테아 영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리도 모욕을 당한 것처럼 울그락불그락 얼굴이 변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작부인처럼 그분의 재산이나 그런 것을 보고 다가간 것이 아니에요!”
“어머? 왜 그런 식으로 말하니?”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의아해했다.
시녀가 울컥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순수하게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처럼 눈가와 손을 떨고 있었다.
“그래. 너도 나처럼 사랑하고 있잖니. 누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니?”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기분이 심히 좋지 않음이다.
그것을 눈치챈 부인들이 얼른 입을 종알거렸다.
“어머, 부인. 미천한 아이가 아닙니까?”
“맞아요. 무식한 것이니 행동도 무식하지요.”
“공작부인께서 넓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아양을 떨면서 부인들은 공작부인을 주시했다.
그녀가 분노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제야 시녀는 정신을 차렸다.
상대는 북부 사교계를 휘어잡고 있는 절대 권력자이자 왕조차 건들지 못한다는 권력자였다.
시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까는 수치스러워서 몸을 떨었다면 지금은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떨었다.
“좋아. 무지한 것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윗사람의 도리지.”
“맞아요. 정말 지당하신 말씀만 하시네요.”
“겸사겸사 저희에게도 가르침을 주세요.”
운이 좋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분은 풀어졌다.
한 번 나빠진 기분이 돌아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정말 다행이었다.
부인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리고는 그 시녀를 노려봤다.
일이 터졌다면 사지를 찢어놓았을지 모를 살기였다.
시녀는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고개를 들라고 했는데, 왜 숙이니?”
“죄송합니다.”
“그래.”
페루제 공작부인은 빤히 시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싶어서 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이 커졌다.
“그래. 이해했다. 그리 생각하면 너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혼잣말이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 말을 들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여 얼른 듣고 싶었다.
“네가 말했지. 도르테아 영식은 다정하고 아랫사람들을 쉽게 너그럽게 용서한다고.”
“네, 맞습니다.”
“도르테아 영식이 귀족가문의 자제가 아니었다면 하물며 장남이 아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예?”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도르테아 남작이나 남작부인은 아랫사람에게 후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영식은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지.”
페루제 공작부인에는 생략이 되었다
‘그런 부모에게 자란다면 그 아들도 그렇지 않겠니?’라는 물음이었다.
도르테아 영식의 다정함과 넓은 마음은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해도 오만하고 못된 영식들도 많아요.”
시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반박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식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지. 그런 경우도 의외로 많지.”
그녀는 너무 쉽게 시녀의 반박을 받아들였다.
반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모에게 문제가 있단다. 부모 중 하나가 아니면 둘 다이든가. 단지 소문이 돌지 않을 뿐이지.”
좋다고 소문이 난 사람들도 실상은 다를 것이라는 말.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추악하면 추악할수록 감추는데 도가 트는 것이다.
“네가 문제가 있다는 영식의 이름을 말하면 나는 그 부모의 비밀을 술술 말할 수 있어. 한번 말해 볼래?”
“아, 아닙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윙크까지 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진짜로 시녀에게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면 그 부모가 가진 비밀을 내뱉을 기세였다.
눈치 없이 확인한다고 이름을 뱉었다가 큰일이 나는 것은 시녀였다.
공작부인이 그들의 비밀을 밝힌다고 한들 감히 보복을 할 수 있겠는가!
30만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존재에게?
자연스럽게 그들을 언급한 시녀에게 보복을 가할 것이다.
그것은 도르테아 영식도 막기 어렵다.
도르테아 남작부부는 신이 나서 방관할 것이고 말이다.
시녀는 이 문제에 관해서 더는 뭐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건 이렇게 넘어가고. 다음은 뭐였더라? 너를 먼저 생각해 주시고 아름다운 시를 읊어준다고 했던가?”
“네, 맞습니다.”
시녀는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할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는 것은 도르테아 영식이 귀족이라서란다. 귀족이 아니었다면 시를 배우고 아름다운 시를 말할 수 있었을까?”
“저도 귀족입니다.”
“귀족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몰락 귀족이지.”
키득키득.
시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변했다.
평민과 같은 삶이었지만 귀족임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대가가 이런 모멸감이라니!
시녀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시를 배울 만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며 어찌 너에게 시를 읊어줄 수 있겠느냐. 그렇지?”
시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웃었다.
그 울그락불그락거리는 얼굴이 재미가 있는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