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무난하다는 평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말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말은 하나도 내뱉지 않았으나, 허락을 받은 부인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께서 진짜 궁금하셨던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원래 저리 이름도 없는 부인을 상대하시는 분이 아닌데 말이에요.”
잘만하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눈도장 찍을 수 있었다.
어쩌면 장미회의 일원이 되어서 사교계의 중심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좋은 투자처를 얻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부인은 눈을 반짝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것을 시기 질투하는 부인들이 있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저 부인은 도르테아 남작부인입니다.”
“도르테아라고?”
페루제 공작부인이 의아해했다.
도르테아 남작가문은 자신의 기억에도 있었다.
가치가 있어서 기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별나게 부유한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특별하게 뛰어난 인재가 있는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강한 병사들이 있는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중앙정치에 선을 대고 있는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영지에 특색이 있는 자원이 있는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북부 귀족 가문 중 하나였기에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언급되는 것조차 기대하지 않던 가문의 이름이 들리니 흥미로웠다.
“도르테아 남작부인이 여기에 왜 있지? 평소에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장남의 혼처를 구하기 위해서 연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흐음… 도르테아 남작가문 정도면 무난하지 않나?”
모두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 한 마디를 더 듣기 위해 귀를 쫑긋했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 도르테아 남작부인은 제외였다.
찰나의 시간 동안에 그녀 주변의 부인들이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에 빠르게 반응했다.
“그렇죠. 무난한 가문이지요.”
“예,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가문이에요.”
“큰 공적도 없지만 큰 사건도 없었으니까요.”
“맞아요. 공작부인께서 정확하게 표현하셨어요.”
‘무난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남긴 도르테아 남작가문의 평이었다.
장점도 단점도 없는 가문.
특색이 없는 가문.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그만인 가문.
그녀는 그 모든 생각을 ‘무난하다’라는 말로 간단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이것은 도르테아 남작의 장남이 혼인하기 아주 힘들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공작부인이 크게 쓸 생각이 없는 가문이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가문에 어찌 딸을 보내겠는가.
정략결혼은 가문의 이익을 크게 할 수단인데 그것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르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요. 마음속으로 저도 그리 여겼습니다.”
정작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여파를 전혀 모르고 한 말이었다.
그런 하찮은 가문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그녀는 너무 바빴다.
그녀는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고 그녀를 찾는 이들은 너무 많았다.
“그래. 이제 말해 보게. 어찌하여 혼처를 찾으러 온 부인의 안색이 저리도 나쁜지 말이야.”
“물론입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귀부인이 흥분을 애써 감췄다.
여기서는 흥분이 아니라 진정성이 필요했다.
귀부인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쉬쉬하면서 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조심스럽게 도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그녀의 태도가 맞았던 모양이다.
“여기 내 옆에 앉게.”
“감사합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짓하며 귀부인을 자기 옆으로 오게 했다.
졸지에 그 옆에 있던 부인이 밀렸다.
그 여인은 그것이 분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감히 북부 사교계 절대 권력자의 말을 거역할 백성은 없었으니까.
“어서 말해 보게. 궁금해서 안달이 나.”
“네, 지금 말하겠습니다. 그 장남이 도르테아 부인의 근심거리입니다.”
“그 아들이?”
페루제 공작부인은 곰곰이 도르테아 가문에 관해 떠올렸다.
특별한 점이 전혀 없어서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모양이다.
모르는 이야기를 안다는 것은 즐겁다.
그녀가 초롱초롱하게 경청했다.
“네. 장남이 하필 한미한 가문의 여식과 눈이 맞았다지 뭡니까.”
“한미한 가문? 어느 가문?”
“몰락한 귀족가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평민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요. 그러던 중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을 듣고 있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요. 도르테아 남작가문의 시녀로 취업을 해서는 유혹했다고 들었습니다.”
“오호라.”
이 모임의 주최자였다.
그녀는 지금 남이 말하는 것을 끊고 자신이 끼어들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곁에 설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장미회 일원도 아닌 인물의 모임에 이렇게 와 준 것 자체가 기적과 비슷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회다.
그것을 놓친다면 화가 나서 병이 날 것이다.
주최자인 부인은 욕을 먹을 각오하고 말의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들었다.
“거참, 대단하군. 미모가 출중했나 봐.”
“그러니까 도르테아 남작가문의 후계자를 유혹했겠지요.”
다행히 페루제 공작부인은 주최자가 저지른 무례를 넘어갔다.
자신에게 버릇없이 굴었던 것이 아니었고, 주최자로 그 정도 권한은 있다고 여겼다.
겨우 이런 것에 주도권을 빼앗길 부인이라면 자신에게 가치도 없고 말이다.
자신에게 말을 걸만큼 담이 크다고 여겼는데 실망이다.
저리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의 판단이 틀렸던 모양이다.
“그 아들이 그 시녀와 혼인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나!”
“어찌 그런 일이?!”
도르테아 남작 가문의 사정을 몰랐던 부인들이 경악했다.
귀한 대우를 하고 정성껏 기른 자식이다.
귀한 집안의 여식을 데려와도 만족하지 못할 판국에 몰락 귀족이라니!
그것도 평민과 같은 생활을 하는 작자의 여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부인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르테아 남작가문은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게 생겼군.’
‘공작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저리 우는 얼굴로 있으면 어쩌나. 자업자득이지.’
‘최대한 도르테아 남작가문과 거리를 둬야겠어. 괜히 엮이면 귀찮아지니까.’
도르테아 남작가문은 한동안 사교계 활동은 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곳 북부 사교계 전역에 이 소식이 들릴 것이니까.
공작부인의 흥미로워하는 일을 공유하는 것은 북부 사교계 활동의 기본이었다.
언제 어디에 올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각자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그 시녀를 만나봐야겠어.”
“예? 지금요?”
“그래. 지금.”
주최자인 부인은 당혹스러웠다.
지금 어디에 그 시녀가 있는지 알고 대령할 수 있겠는지 말이다.
“도르테아 부인에게 물으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도르테아 부인에게요?”
“응. 자기 아들을 언제 어떻게 유혹할지 모르니까 위치 파악은 하고 있을 걸.”
페루제 공작부인이 활짝 웃으며 박수쳤다.
정말 기대가 된다는 웃음이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표정에 주최자 부인은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난감했다.
지금까지 당사자 몰래 가문 사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작부인께서 궁금해서 그 시녀를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르테아 부인에게 물어보고 그 시녀를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데려올 수 있도록 해.”
“네.”
이 사실을 도르테아 부인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주최자 부인의 다가옴에 당황하던 도르테아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게 되었다.
자신이 이 모임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담할 것이다.
그녀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거부하고 싶어도 외면하고 싶어도 할 방도가 없었다.
도르테아 부인은 떨리는 입술로 그 시녀가 있는 곳을 말해 줘야 했다.
* * *
그리고 난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흘렀음에도 집으로 귀가하는 부인들은 없었다.
그들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고 기대가 되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언제나 예측을 넘는 행동을 하는 사람임을 잘 알았다.
도르테아 영식의 마음을 홀린 시녀는 무릎을 꿇었다.
“페루제 공작부인, 인사드립니다. 제 이름은…….”
“그것으로 충분해.”
“예?”
“네 이름은 궁금하지 않거든.”
페루제 공작부인은 시녀의 인사는 받되 소개를 거부했다.
그녀에게 눈앞의 시녀는 한순간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새로운 장난감에 흥미를 유지하는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는다.
그런 장난감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낭비였다.
시녀는 모멸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궁금한 것들이 있어서 너를 불렀단다. 고개를 들으렴.”
“네.”
그녀의 명령에 억지로 고개를 들어야 했다.
상대의 가치를 한없이 낮추는 여인은 지독히도 아름답고 지독히도 차가웠다.
눈에 담긴 흥미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개미를 죽이듯이 시녀도 그리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그럭저럭 예쁘장하게 생겼네.”
그런 것치고는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럭저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라는 뜻이지 않은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은 시녀가 충분히 예쁘지 않다는 말이었다.
“어쩜 이리도 맞는 말씀만 하시나요.”
“그래도 부인보다는 못한 것을요.”
“부인의 미모를 따라올 여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인들의 아부가 따라왔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시녀를 바라봤다.
“도르테아 남작부인이 너를 죽이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용케 살아 있구나.”
“그분이 저를 위해 용병을 고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게 해주셨지요.”
“괜찮은 선택이었구나.”
도르테아 영식은 정말 그녀를 아꼈다.
그러니 도르테아 남작령도 아닌 타 영지에 시녀를 보낸 것이다.
타 영지에 있는 사람을 도르테아 가문의 기사들이 억지로 데려간다면 가문 간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엄연히 영지의 법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기사들을 개입시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써서 그녀를 제거해야 하는데 분명히 실력이 좋은 용병을 고용했을 것이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노력한 보람이 있겠어. 그치?”
“저와 그분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겠지.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다면서.”
시녀는 당혹스러웠다.
모두가 시녀를 손가락질했다.
영지가 있는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되려고 도르테아 영식을 홀렸다고 속닥거렸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으나, 나중에는 욕심이 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사랑에다가 욕심이 추가로 생긴 것이었다.
“너는 도르테아 영식의 어떤 것을 보고 사랑하게 된 것이니?”
“어떤 것을 보고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사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