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루비카 남작의 조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제 역량에 달린 것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자신한다니 기대해 보겠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란델리노는 고민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라는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눈빛은 당당했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루비카 남작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저 눈빛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란델리노는 자기 할 말을 했다.
“첫 번째는 알았으니 하면 일이지요. 그러면 제가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알펜 왕국에 소드마스터가 벨로나 공작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라스타 왕국도 로빈만 있는 것은 아니네.”
란델리노가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꿈속이었을지라도 로빈의 배신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하면 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칠지 깊게 고민하게 했다.
“뭐, 자네가 로빈을 검술 스승으로 받아들였다면 여기에서 자네와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
루비카 남작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루비카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아들을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하는 로빈이다.
그런 로빈을 곁에 둔 란델리노에게 접근하는 것은 스스로 사자의 입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빅토르를 스승으로 둔 것은 제 최고의 한 수였습니다.”
“빅토르… 좋은 사람이지. 카엘족이라고 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격자야.”
루비카 남작은 카엘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경멸했다.
카엘족이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한 욕심을 냈으니까.
카엘족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런 생각에도 빅토르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좋은 사람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카엘족으로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야.”
“정말 좋은 분이시지죠.”
그것은 란델리노도 인정했다.
처음에 빅토르를 이용할 생각에 접근했다.
그러나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느꼈다.
불순한 의도로 다가간 것이 미안할 정도로 빅토르는 좋은 사람이었다.
신의가 있고 굳건한 의지가 있으며, 타인을 함부로 매도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를 자신의 첫 번째 기사라며 치켜세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소드마스터 외에 라스타 왕국에는 한 명의 소드마스터가 더 있네.”
“어찌하여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소드마스터는 왕국의 국력을 상징했다.
왕국이 강할수록 소드마스터의 수도 많다는 것은 반론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소드마스터가 된 인물이 나타나면 왕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그의 존재를 공표하며 대우했다.
“그분께서 반대를 하셨으니까.”
“어머니가요?”
란델리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로빈과 그 녀석을 반대하는군요.”
“카엘족을 아주 경멸하거든.”
란델리노는 잘 알았다.
소드마스터.
왕국과 가문을 빛나게 할 인재다.
그런 인재가 카엘족을 경멸한다.
도대체 얼마나 경멸을 하면 정식으로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공표하지 못하도록 했을까?
자신의 주군이 선택한 후계자를 탐탁치 못하는 경우는 있더라도 대놓고 반대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가문의 미래를 위해 그런 인물을 살려두는 경우는 더 흔하지 않았고 말이다.
의문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카엘족들이 운영하는 범죄조직에게 부모를 잃었지.”
“카엘족은 뒤쪽 세계에 연루된 경우가 많으니까요.”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던 카엘족.
보이는 족족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잡히는 인생이다.
그런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뒤쪽 세계에서 활동하는 카엘족이 많았다.
카엘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던 인생은 인간의 죄였다.
그 인간의 죄로 카엘족은 범죄자가 되었고 죄를 짓게 되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였다.
그 굴레를 페루제 공작부인 끊었다.
교황을 통해서 카엘족의 죄를 사하게 해주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이미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사창가에 팔렸지. 동생을 도망가게 위해 시선을 끌다가 잡혀간 결과지.”
“그런 환경에서 소드마스터가 되다니 대단하네요.”
순수한 감탄이었다.
부모도 잃고 누나는 사창가에 팔려가고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런 환경을 이겨 내고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독한 인물이겠는가. 꾸역꾸역 누나가 몸을 파는 곳을 알아내서 갔다고 하더군.”
“죽을 것이 뻔한 상황인데 갔군요.”
“누나를 구해 내지 못하면 죽겠다는 생각으로 갔다고 들었네.”
그 소드마스터는 운이 좋았다.
그의 누나를 산 범죄조직은 불운했다.
하필 그들은 루비로즈 영지에 있었다.
“마침 범죄조직 소탕작전을 수행하던 루비로즈 기사들에게 구출되었지. 죽기 직전에 구출이 되었는데 그때 기사를 꿈꾸게 되었다고 했어.”
천박한 것을 싫어하는 페루제 루비로즈.
허가를 받지 않은 포주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성매매를 금지하지 않지만 정식으로 등록을 하고 세금을 내도록 하고 있었다.
그들은 범죄조직인 것도 문제이지만 정식등록을 하지 않은 본보기로 처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같이 왔던 그분을 보고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하네.”
“…….”
란델리노는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후계자를 반대함에도 그를 살려 둔 이유를 말이다.
결코 그는 어머니 자신만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기에 살려 둔 것이다.
그 충성심은 진실이라 판단했음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꿈속에서 그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라스타 왕국의 소드마스터는 오직 공식 인정된 자들뿐이었다.
소드마스터가 더 추가가 된 기억은 없었다.
이것을 미뤄볼 때, 그가 로빈이나 그의 아들에게 제거 당했다고 생각해야 맞았다.
“세세하게 잘 아시네요.”
“좋은 술친구거든.”
루비카 남작이 높은 톤으로 말했다.
좋은 술친구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찰나였다.
곧 진지한 말투로 돌아갔다.
“내가 그와 술친구라고 해서 그대를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게.”
“물론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권력의 판도와 관련된 일이다.
란델리노를 지지하는 것을 친분을 이유로 제안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루비카 남작조차 아직은 그와 손을 잡지 않았다.
손을 잡는 것은 두 가지의 일을 완수한 뒤에야 이뤄질 것이다.
란델리노의 진지한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시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누군지도 모를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어머니라도 어려운 일이지요. 조금이라도 힌트를 주십시오.”
“그것 정도야 해줘야겠지.”
“감사합니다.”
루비카 남작이 큰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란델리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응대했다.
주군의 아들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것이 자존심 상할 만도 한데 말이다.
그는 만남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루비카 남작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 그가 란델리노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를 하대하는 것은 란델리노 자신이 아직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 뛰어드는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했음을 뜻했다.
자신이 부족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에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에 짜증이 나지 않았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경은 이겨 낼 수 있었다.
그 과장에서 벌어지는 굴욕과 창피함은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 란델리노에게 이것은 ‘겨우 이런 일’에 불과했다.
오히려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행운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섯 뱀 기사단의 총단장은 로빈이지. 로빈이 장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렇지요.”
란델리노가 루비카 남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르가 있는 검은 뱀을 빼고는 나머지 기사단들은 로빈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래서 군사적 세력지지가 필요함에도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기사단은 아버지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웠다.
누가 보아도 자신은 아버지의 미움을 받는 아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안에 그자의 사람이 있네. 다섯 뱀의 단장 중에서 찾아보게.”
“작은 힌트를 원했는데 큰 것을 주셨습니다.”
“그만큼 자네에게 거는 것이 있다고 여기게.”
“반드시 해내지요.”
란델리노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큰 정보였다.
다섯 뱀 기사단 내에 로빈을 반대하는 인물이 단장을 하고 있다니!
개별적으로 군사적 세력을 키워야 하나 고민했는데 해결이 되었다.
이것은 어머니의 기사단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다섯 뱀을 로빈과 그 아들의 세력이 아니라 란델리노의 세력이 될 반석을 마련할 가능성이었다. 반드시 잡아야했다.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며 있지.”
“그때가 되면 정식으로 만남을 청하겠습니다.”
“그리하게.”
란델리노가 루비카 남작이 말한 두 가지를 이룬다면 이런 식으로 몰래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도 당당하게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 후보 중 하나로 사람 앞에 나설 수 있게 된다.
란델리노가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다면 그 의미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라스타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로 페루제 공작부인이 허락했다는 뜻이니까.
후계자감으로 고려 중이라고 추측할 만했다.
그렇게 되면 라스타 왕국의 권세가들이 모두 그를 주목하게 될 것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들을 배제하려고 해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리라.
* * *
아들이 루비카 남작과 밀담을 마쳤을 때, 페루제 공작부인은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고 앉아 있었다.
“와인의 품질이 참으로 좋군.”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마음에 들으셨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인데 감사하기까지 하겠는가.”
그녀는 한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초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초대를 받지 않았음에도 그냥 온 것이다.
왜냐고?
이유는 단순하다.
가고 싶었으니까.
“어휴, 그러니까 공작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암요, 맞습니다.”
“그럼요. 공작부인의 안목을 넘어설 인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작부인과 함께 있으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에 있는 부인 중 누구도 그녀의 방문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아부를 떨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몇 년 간 페루페 공작부인은 북부 사교계에서 정점을 넘어서 절대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야말로 북부 사교계의 태양왕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무례하다고 생각할 일이 그녀에게는 허락되었다.
그 무례 중 하나는 그녀는 초대받지 않은 모임이나 파티에 멋대로 오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북부만큼은 아니지만 영향력이 엄청났다.
굳이 비유하자면 북부에서는 사교계의 황제라면 타 지역에서는 공작이라고 할까나.
“그러고 보니까 저 부인의 표정이 왜 저리도 좋지 않은가?”
“아! 죄송합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당장…….”
당장 쫓아내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초대받고 온 사람인데 그러면 쓰나. 걱정이 되어서 그러네.”
“그러시군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공작부인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떤 부인이 한 손을 들었다.
주최자인 부인은 그녀를 슬쩍 째려봤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곁에 있을 기회를 빼앗으려는 요망한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