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37화 (137/221)

137화 사생아 동생에게서 태어난 조카 VS 의붓아들

란델리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총애하는 동생이 낳은 조카과 의붓아들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네요.”

“알펜 왕국에서는 제법 세력을 모은 듯하지만 라스타 왕국에서는 어려운 일이지.”

루비카 백작은 란델리노가 라스타 왕국에도 지지 세력을 모으려고 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처참하게 실패했음도 말이다.

그래서 실패의 이유가 페루제 공작부인과 사생아 동생의 사이가 좋아서임을 알려 준 것이다.

“어쩐지 다들 기겁을 하더군요.”

“자네가 연을 만들려는 귀족들은 그분과 그 사생아의 사이를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하루, 하루가 귀한데 허투루 보냈습니다.”

란델리노가 씁쓸해하며 말했다.

꼬아서 생각하지 않고 보고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 것이니까.

진실을 진실로 보지 못하니까 일이 꼬인 것이다.

만약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했다면 처음부터 루비카 남작을 만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처음에 오판을 했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야 하니까 가신 가문이 귀족들과는 접선하지 않았던 것인데 말이다.

어머니의 경계를 걱정하여 몸을 사리면서 움직인 대가는 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니 되네.”

“어찌해서요.”

“자네는 성격을 보아하니 직접 움직이면서 은밀히 귀족들을 만난 일도 많았을 것 같네만.”

“사람 하나 보내서는 제 사람을 만들 수가 없다고 봤습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라스타 왕국에서 당신과 관련된 소문이 좋아.”

“저에 관한 소문이요?”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페루제 루비로즈의 아들’이 직접 왔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니까.”

비밀리에 란델리노와 만났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알려진다면 난처해지는 것은 란델리노만이 아니었다.

그런 은밀한 만남을 받아들이고 만난 상대도 난처해졌다.

아니, 난처함을 넘어서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란델리노와 그 상대에게도 벌을 내릴 것이었다.

란델리노는 그나마 알펜 왕국의 소속이니까 그나마 나았다.

반면에 란델리노가 만난 상대는 라스타 왕국의 귀족.

라스타 왕국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영역이었다.

그만큼 그 벌로 인한 여파는 어마할 것이다.

감히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 문제에 개입하려고 했으니까.

루비로즈 가문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려고 했으니까.

그 벌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리라.

“어머니를 위할 줄 알며 겸손하고 학식과 예법을 갖춘 완벽한 영식이라도 말이야.”

“다행이군요.”

“페루제 루비로즈가 선택한 아들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격을 높게 만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니까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지.”

“훗날 판세가 바뀔 계기 하나만 있으면 되겠군요.”

“순식간에 세력을 넓힐 수 있을 것이야. 마침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쉽게 다가올 것이야.”

루비카 남작이 손가락을 접어서 하나만 세웠다.

“그 계기를 만들기 전에 그대가 해야 할 일이 하나가 있어.”

“무엇입니까?”

“메디치아 아카데미를 아는가?”

“어머니가 메디치 백작령에 세운 아카데미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개교는 하지 않았고요.”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관해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겠지. 그곳에 관해 설명해 주겠네.”

“말씀해 주십시오.”

“메디치아 아카데미는 중등 아카데미와 고등 아카데미로 나눠져 있네.”

그가 손가락 하나를 펴서 2개를 세웠다.

“중등 아카데미는 13—18세까지의 아이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곳이고 고등 아카데미는 19—22세까지의 청년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곳이지.”

“보통 귀족들은 아카데미에서 13—18세까지 교육을 받거나 가정교사에게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는데 특이하군요.”

“역시 기본적인 눈치는 있군. 맞네. 일반적인 아카데미는 아니지.”

“어떤 아카데미입니까?”

“중등 아카데미는 13—18세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곳이지. 그리고 그곳에서 상위성적 30% 안에 드는 학생들은 원한다면 무조건 고등 아카데미에 진학할 수 있네. 입학시험 없이 말이야.”

“고등 아카데미가 중요한 곳이군요.”

“그렇지. 고등 아카데미는 그분의 신념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신분과 출신 상관없이 뛰어난 인재는 그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

란델리노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인재는 신분과 출신 상관없이 과감하게 썼다.

언제나 인재가 없다며 한탄했으니까.

인재라면 무조건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카엘족 출신인 로빈이 기사단 단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아끼는 사생아 동생의 남편이라고 해도 카엘족 출신인 것을 꺼려졌다면 결단코 크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루비카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곳이네.”

“온갖 인재들이 거기로 몰려들겠군요. 그만한 혜택도 줄 것이고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인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 인재들이 자신에게 승리를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인재들이 가문을 번영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인재들이 왕국을 평안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인재들이 에클레시아의 수호를 도울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인재들이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백성들을 아껴서가 아니다. 그 백성들이 뭉쳐서 가문을 위협할까봐 그랬다.)

그 노력에 부응하듯이 인재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몰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 불만은 직접 그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까지 하도록 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나 아주 큰 혜택이지. 라스타 왕국은 관료 등급을 개편하여 12급으로 나눠졌네. 숫자가 적을수록 높은 자리지.”

“라스타 왕국의 관료체계 변경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역시 많이 준비를 하고 있었군.”

“기본이지요.”

“그래. 루비로즈 가문을 얻기 위해서 그 정도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 것이지.”

루비카 남작이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침묵했다.

아마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좌절감일지 모른다.

모시는 분이 그리는 세상을 자신은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루비카 남작은 곧 다시 정신을 차린 듯이 입을 열었다.

“말이 다른 쪽으로 샜군.”

“…….”

“앞으로 고등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이들은 7급이나 6급 관료에 배정되어서 나랏일을 하게 될 것이야.”

“관리일을 시작하자마자 중간급 관료라니 엄청나게 빠르게 출세 가도를 달리겠군요.”

“메디치아 고등 아카데미는 라스타 왕국의 권력 실세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가 될 것이야.”

“설령 고등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해도 고위관료가 될 동창생과 얻게 되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군요.”

“간접적으로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중등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는 중요성이지.”

중등 아카데미만 나온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영지가 있는 가문을 잇기 위한 후계자들은 중앙정치에 선이 있어서 정치에 배제되지 않을 수 있었다.

영지가 없는 가문의 후계자들은 관료로 승승장구하면 될 일이고 말이다.

영지가 있는 이들이 있으나 정계에 힘을 쓰지 못하는 귀족들이 있다.

믿을 자원은 오직 자신뿐인 관료들 혹은 예비관료들이 있다.

학연이라는 공동분모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할 것이다.

고등 아카데미에 갈 성적이 안 되거나, 갈 상황이 아닌 이는 훗날 관료가 될 동창생, 후배 등을 지원해 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통해서 중앙정치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연을 맺은 관료들도 나쁘지 않았다.

뒤에서 해주는 지원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 수 있으니까.

영지도, 자산도 없는 관료도, 중앙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없던 귀족도 만족할 만한 관계인 것이다.

“평민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일 것이고요.”

“라스타 왕국을 근거지로 둔 루비로즈 가문을 잇기 위해서, 가문을 이은 후에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입학을 해야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정치를 평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평민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귀족자제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메디치아 중등 아카데미와 고등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졸업하게 된다면 누릴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지만 제 나이가 15살입니다. 개교를 한다면 13살부터 입학을 시킬 것인데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이례적으로 이번에 1기 학생은 16세, 중등아카데미 4학년부터 입학을 시킨다고 하더군. 그 다음에 13세부터 입학을 시킬 예정이라고 들었어.”

“그 아이에게 1기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을 주기 위해서군요.”

내년에 개교하는 메디치아 중등아카데미, 1기 입학생이 졸업하면 개교할 메디치아 고등아카데미.

메디치아 중등아카데미, 고등아카데미의 1기 졸업생이 된다면 선배가 없는 것이다.

오직 후배만 있는 상황.

선배라는 이유로 상대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어머니의 안배를 생각하면 그 카엘족 조카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맥은 인맥대로 취하되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했으니까.

경직되어 있는 관료사회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대드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하는 행위였다.

적어도 란델리노의 사촌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모두가 그의 동창생이며 후배일 것이니까.

페루제 루비로즈가 아끼는 조카임을 감안하면 그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두를 내려다 볼 것이다.

미래의 권력자들 위에 설 계기를 참으로 쉽게 만들어 줬다.

그것도 아들이 아니라 사생아가 낳은 조카를 위해서 말이다.

자신의 사촌이라는 녀석은 알까?

어머니가 그 녀석을 아낀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증오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루비카 남작은 보았다.

란델리노 자신도 모르게 힘을 쥐고 있는 주먹을 말이다.

얼마나 분통해하는지 옅게 떨리는 주먹이 느끼게 해줬다.

“나와 나의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싶다면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네.”

“하나는 메디치아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겠군요.”

“그렇지. 메디치아 중등 아카데미를 입학하여 고등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는다면 라스타 왕국에서 권력을 가질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이니까.”

메디치아 아카데미 입학은 결단코 쉽지 않다.

란델리노는 입학시험을 치룰 자격조차 없었으니까.

라스타 왕국의 관료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다.

알펜 왕국의 사람이 입학시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란델리노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적통 아들이지 않은가.

그의 입학을 허락하는 것은 타국 백성이 라스트 왕국을 손에 쥘 초석을 마련해 주는 꼴이었다.

란델리노가 메디치아 중등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루비카 남작은 란델리노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한 것과 같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제가 입학할 명분을 마련해야겠군요.”

“가능하겠는가?”

루비카 남작은 생각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여인이다.

여인의 몸으로 루비로즈 가문을 집어삼켰다.

여인의 몸으로 라스타 왕국 남부 최고의 지배자가 되었다.

여인의 몸으로 라스타 왕국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여인의 몸으로 라스타 왕국을 부국강병하게 했다.

여인의 몸으로 라스타 왕국의 수많은 악법을 없애고 개혁을 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일을 해냈다.

사내조차 하리라 여기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 페루제 루비로즈의 후계자가 되는 일이다.

그 후계자가 되려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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