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카엘족 출신의 조카 VS 의붓아들
평범한 귀족가문의 자제였다면 루비카 남작의 일갈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란델리노가 누구인가?
혈통으로 보자면 용맹한 영웅들을 배출한 벨로나 공작가문의 적통이다.
살아온 환경으로 보자면 페루제 공작부인의 가르침 아래에서 야망을 키웠다.
평범하지 않은 혈통과 가정환경은 그를 남다르게 만들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치 왜 나에게 자격이 없느냐는 듯이 말이다.
“남이라고 할지라도 제가 더 자격이 있지요.”
“뭐?”
루비카 남작이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가문의 핏줄이 아닌데 저리도 뻔뻔하게 자신에게 자격이 있다고 하는 꼴이라니!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과 말투에 입을 달싹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때, 란델리노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의붓아들이 카엘족의 핏줄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찌 알았지?”
“아무리 견고한 비밀도 세월 앞에서는 서서히 무너지는 법이지요.”
루비카 남작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마치 알면 안 되는 것을 상대가 알아버려서 난감해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란델리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정해 놓은 후계자 후보에 관한 정보를 가져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는 방심하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는 이들이 방심했을 뿐이다.
세월이란 사람을 안주하고 마음을 풀리게 하니까.
“아니면 그분께서 더는 감추지 않기로 하신 것일지 모르지.”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면 어머니가 더는 감출 수 없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십 년, 수십 년을 감추는 것이 가능했다면 자신의 경쟁자는 오래전에 모습을 드러냈으리라.
루비카 남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지.”
“둘이서만요?”
“듣는 귀는 적을수록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란델리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루비카 남작과 란델리노의 ‘진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있는 곳에서 미주알고주알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란 상황과 사소한 계기로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까.
지금의 아군이 훗날의 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주변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거라.”
“너희도 마찬가지다.”
“예.”
루비카 남작과 란델리노는 말을 이끌고 천천히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루비카 남작의 손가락이 향했던 곳에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렸다.
마침 서로를 마주보는 바위가 있었다.
루비카 남작이 하나의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남은 바위는 란델리노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봤다.
“벨로나 백작.”
“란델리노 백작이 더 좋기는 하지만 루비카 남작 각하의 입장도 알고 있으니 넘어가죠.”
란델리노는 자신이 벨로나 공작 가문과 루비로즈 백작 가문을 이을 인물이기에 란델리노 백작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것을 루비카 남작은 거부했다.
그가 루비로즈 백작 가문을 이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능구렁이 같은 늙은 남작을 상대하면서도 란델리노는 여유로웠다.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다니 고맙군. 그런데 그대는 정작 그대의 입장을 너무 모르는 것 같군.”
“저는 제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루비카 남작의 비아냥에도 란델리노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정도 비아냥은 그의 마음에 흠조차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비카 남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것을 젊은이의 패기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젊은이의 철없음으로 봐야 하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
“그대가 루비로즈 백작가문을 이을 수 없는 이유를 말해 주지.”
“경청하겠습니다.”
란델리노의 야망을 불가능하다고 말하려고 하는데도 그 얼굴은 그대로였다.
여유가 가득한, 뻔뻔한 미소였다.
“먼저 루비로즈 백작각하께서 아직 정정하시지.”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시지요.”
루비로즈 백작은 라스타 왕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 다니며 지내고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돌아온 이후로 말이다.
영지에 있다가는 딸에게 죽임을 당할까 싶어서 도망 다니며 사는 것이었다.
벨로나 공작과의 혼인 문제로 잠시 영지에 돌아왔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챙겨서 루비로즈 영지를 벗어났다.
“루비로즈 소백작께서 아직 젊으시고 언제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삼촌께서는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죠. 어머니 성정에 사생아는 어림도 없고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가문이 귀족답게 고결하고 그 안에서 위계질서를 단단하기를 원했다.
사생아는 귀족의 고결함을 더럽히는 존재였으며 방계들에게 하극상의 명분이 되었다.
사생아의 후계자 자격을 부정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귀족 사회는 사생아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가문의 후계자가 가주의 총애로 사생아에게 밀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며 더러운 핏줄이 가문의 혈통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핏줄에게 자기 뒤를 맡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이다.
사생아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달랐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라스타 왕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되면서 달라졌다.
사생아가 가문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일 자체가 사라졌다.
사생아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겠다고 나대다가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혼인은 곧 하시지 않겠나? 언제까지 그분께서 소백작님을 두고 보시겠나?”
“그렇군요. 혼인한다고 치지요. 아이가 태어났다고 치지요.”
루비카 남작의 말이 맞았다.
혼인은 귀족이 해야 할 의무였다.
그것을 지금까지 하지 않아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의 동생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 신경을 쓰라며 혼내지 않았다.
결혼은 네가 하고 싶은 때에 하라고 놔두는 모양새였다.
좋게 말하면 동생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관하는 것이었다.
란델리노의 목소리 톤이 점점 낮아졌다.
그는 웃었다.
아까의 미소와 달랐다.
눈빛이 서늘했다.
살기가 가득한 눈빛과 웃음의 조화는 소름을 돋게 했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눈에 만족스러울까요? 그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루비카 남작은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께서 그럴 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음…….”
그가 생각해도 자신이 모시는 분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죽일 사람이었다.
자신의 오라버니들을 죽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조카라고 죽이지 못할까.
자신의 아버지조차 언제든 명분만 있으면 죽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조카를 죽일 명분이 있는데 살려둘까.
란델리노는 명확하게 모든 것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어쩌면 루비카 남작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말장난을 하시지요.”
“말장난이라니 섭섭하군.”
“어머니가 삼촌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애당초에 사생아 동생의 아들을 후계자 후보로 점찍지 않았겠죠.”
“진짜로 장난을 그만둬야겠군.”
시험은 여기까지다.
장난도 여기까지다.
란델리노는 어중간하게 알면서 야심을 품은 것이 아니다.
알 것은 제대로 알고 계산하면서 야심을 이루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대화다운 대화다.
한 왕국을 지배하는 귀족가문의 패권을 누가 가질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분께서는 천박한 것을 싫어하시네.”
“어머니는 천박한 것을 싫어하지요.”
“사생아를 싫어하는 것도 천박한 과정으로 태어나서야.”
사생아.
유부녀 혹은 유부남이 정식 혼인관계가 아닌 다른 상대와 낳은 자식이다.
에클레시아의 신실한 독자인 그녀는 간통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배우자를 배신하는 더러운 행위는 전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불륜은 일반 백성들도 잘못임을 아는 짓거리다.
하물며 귀족이 그런 짓을 하다니! 얼마나 격이 떨어지는가!
게다가 남편의 바람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어머니에게 너무 큰 심적 고통을 줬다.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봐야 하는 부부이거늘.
루비로즈 백작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딸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루비카 남작은 암담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 사생아의 아들을 굳이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로 염두에 둔다는 것은.”
“그 정도로 탐이 나는 인재라는 것이겠지요.”
“그래. 자신의 신념을 잠시 외면할 만큼 자질이 뛰어나다는 뜻이지.”
루비카 남작은 인정했다.
그 아이는 뛰어났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있었다.
상대를 지배하면서도 넓은 아량을 베풀 줄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카엘족이다.
붉은 눈을 지닌 불온한 일족이다.
아무리 교황이 그들의 죄를 사했다고 해도 이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이념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루비카 남작도 그러했다.
그는 소백작을 이유로 계속 그 아이를 반대했다.
게다가 루비로즈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단순히 가문을 잇는 것이 아니었다.
카엘족 아이가 루비로즈 백작이 된다면 라스타 왕국을 카엘족에게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비주류로 배척을 봤던 일족이 순식간에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루비카 남작은 그들이 지배자가 되어서 그 칼날을 누구에게 향하게 할지 두려웠다.
“물론 그의 경우는 다르기는 하지.”
“사생아의 아들이 다를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생아가 그분과 아주 친하다네.”
“어머니가 사생아와 친했다고요?”
“그렇다네.”
란델리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무 놀라서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았다.
솔직히 어머니가 사생아와 친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보고를 받고 비웃었다.
누가 봐도 사생아의 아들을 후계자로 올리기 위한 근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생아이기는 하지만 친자매와 같은 사이다. 그런 자매의 아들을 후계자로 올린다.’
이러한 그림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자신의 조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만든 소문이 아니었습니까?”
“많은 이들이 그리 생각하는데 그 소문은 진실이야.”
루비카 남작의 단단한 눈빛은 그것이 진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계산 밖의 일이었다.
란델리노는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와 사생아 자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천박한 것을 싫어하는 어머니가 어떻게 사생아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곧 이해할 만한 이유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서 그 사생아의 어미와 친자매처럼 지내셨지.”
“할머니께서 그 모녀를 받아들인 것이군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군.”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면 목숨을 걸고 반대를 했을 것인데 말이야.”
“정말 아쉬운 일이군요.”
루비카 남작은 과거로 돌아간다면 필사적으로 반드시 막았을 것이라며 후회했다.
란델리노는 루비카 남작이 과거에 그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