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다른 과정과 같은 결과
신관도 사람임을 잊었다.
그의 아들조차 말이다.
추기경까지 올랐던 위대한 분이어서 괜찮을 줄 알았다.
아무리 위대한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사람인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닌데도 몰랐다.
“아버지…….”
“10명의 아이를 구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괴롭다. 그러나 적어도 나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니까 마음의 괴로움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야.”
“…….”
“그리고 자연스럽게 웃게 되었지. 그 아이가 찾아올수록 말이야.”
아들조차 깨닫지 못한 아버지의 외로움을 어린 여아가 알게 해줬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줬다.
“나중에 그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네가 도와다오. 내가 살아 있을 때에 그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해주겠지만 내가 없다면 네가 대신해야 해.”
“아버지! 어찌 그런 말을 하세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죠.”
“그래. 오래 살아야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빛은 단호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그 어떤 태풍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약속해라. 반드시 그리 해주겠다고. 그 아이는 내 마음을 치유해 준 은인이다.”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다음날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다음날에 돌아가시리라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날에 그는 누구보다 밝고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마음속의 마지막 짐을 해결해서 편히 가실 수 있었을지 모른다.
* * *
“공원에 도착했어요.”
“그렇구나.”
그의 시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레티시아를 따뜻하게 봤다.
“아버지는 죄책감에 힘든 세월을 보내셨다.”
무릎을 굽혀서 레티시아와 시선을 맞추고 양어깨를 다정하게 붙잡았다.
“네 덕분에 아버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정말 고맙구나.”
“저야말로 할아버지가 계셔주셔서 정말 즐거웠어요.”
“여기 이것을 가지거라.”
“이것이 무엇인가요?”
그가 품에서 어떤 봉투를 레티시아에게 줬다.
서신이 들어있는 듯했다.
레티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자신에게 이런 것을 주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네가 너의 꿈을 아무런 걱정 없이 펼쳤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거다. 집에 가서 보렴.”
“제가 이것을 가져도 될까요?”
레티시아는 뭔가 자신이 받기에 과한 것일지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자기 위치보다 과한 것을 받으면 나중에 고생하는 법이었다.
레티시아는 여러 소설을 통해서 그것을 간접 경험했다.
“아버지가 꼭 네가 받기를 원했단다. 제발 받아주렴.”
“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그들은 다시 레티시아 집 앞까지 돌아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맞이했다
“레티시아”
“엄마!”
레티시아가 폴짝거리며 자신의 어머니를 안았다.
그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정말 고마워하셨습니다.”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할 따름인 것을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버지는 정말 좋은 마음으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들은 간단하게 말을 나누고 헤어졌다.
“오늘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레티시아도 잘 지내렴.”
레티시아는 어머니와 집으로,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말이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받은 봉투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헉!”
그것은 엄청난 농지 소유권 및 수확물 판매권이었다.
추기경을 자리를 스스로 내려온 것에 교황이 준 나름의 위로 선물이었다.
평생 거기에 나온 곡식을 판 돈으로 편히 살 수 있는 농지.
너는 다른 것은 걱정하지 말고 꿈을 향해 나아가라는 은인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레티시아가 자신이 받은 것에 놀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은인할아버지의 아들은 베른 공작령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새로운 추기경께 인사를 드립니다.”
“그래. 그대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게.”
“물론입니다.”
공교롭게 아버지의 죽음과 추기경의 죽은 시기가 비슷했다.
그는 과거 아버지가 있던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것도 중년의 나이에 말이다.
최연소 추기경의 탄생이었다.
“저 탐욕스러운 교황을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에 있으리라.”
훗날 최연소 교황이 되는 인물이었다.
레티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차기 교황과 연이 닿게 된 것이다.
남들은 인연 한번 만들어 보겠다가 악을 쓰는 것을 너무 쉽게 이뤘다.
* * *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레티시아는 비슷하면서 달랐다.
페루제 공작부인도 실리의 마음을 얻었다.
레티시아도 실리의 마음을 얻었다.
그런데 달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를 철저하게 수단이자 일종의 투자대상으로 봤기에 다가갔다.
수단을 잘 쓰기 위해 수단의 복수를 방관하며 침묵했다.
레티시아는 실리를 실리라는 사람 자체로 봤기에 다가갈 수 있었다.
실리라는 사람은 모두가 외면할 정도로 못생겼어도 가치가 있다고 해줬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교황의 마음을 얻었다.
레티시아는 다음 대 교황의 마음을 얻었다.
그런데 달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교황의 욕망을 건드렸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고 지금보다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이었다.
레티시아는 순수한 선의와 반성으로 차기 교황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다가가던 모습과 당신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은 차기 교황의 아버지를 구원해 줬다.
두 여인은 결과는 같았다.
그 과정은 철저하게 달랐다.
한 사람은 오직 사람 안의 욕망을 이용했다.
다른 한 사람은 선의와 올바름으로 사람을 이끌었다.
판이한 과정에도 결과가 같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 * *
아무리 붙잡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시간은 흐른다.
아이가 소년이 되는 시간이, 아이가 소녀가 되는 시간이 지났다.
란델리노도 레티시아도 성장했다.
그리고 란델리노는 잠시의 멈춤도 없이 노력했다.
“명중하셨습니다! 영식!”
“활을 정말 잘 쏘는군.”
“과찬입니다.”
란데리노는 어느 노귀족과 사냥을 함께 하고 있었다.
사냥터에서 다른 그룹과 함께 사냥을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냥만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개인적인 소개도 생략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사냥을 하다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니 정말 좋습니다.”
“그러게 말이네.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노귀족은 노련하게 활을 쏴서 사냥감을 활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겉모습과 그럴싸해 보였던 모양이다.
“사냥하다가 이렇게 다른 그룹과 함께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어서 기대했습니다.”
“그런가? 젊은이가 별것을 다 기대하는군.”
이에 반응하듯이 란델리노도 눈에 보이는 노루에 정확하게 활을 쐈다.
“그 상대가 라스타 왕국에서 입김이 좀 있으신 분이라 더 그런 것이겠죠.”
“라스타 왕국에서 내가 입김이 있다고?”
노귀족은 달리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활도 내려놨다.
그가 날카롭게 란델리노늘 봤다.
어디 하나 놓칠까 구석구석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곧 크게 웃었다.
“이거 보니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아닌가 보군.”
“루비로즈 가문의 가신 가문이 아닙니까? 그것도 제일 먼저 어머니의 편이 된 가신 가문이지요. 루비카 가문의 가주이시여.”
상대의 웃음에 화답하듯이 란델리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눈웃음은 덤이었다.
“보통 능구렁이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한 방 먹었군요. 그분의 아드님다워요.”
“제가 누군지 알면서 모른 척하고 사냥에 합류시켜 주신 것을 보면 저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루비카 남작 가문.
현재의 루비로즈 백작이 아닌 페루제 루비로즈를 따르기로 제일 먼저 결정한 가문이었다.
그래서 가신 가문 내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가문이었다.
누군가는 겨우 가신 가문이라고 하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스타 왕국의 최고 가문이 루비로즈 가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라.
라스타 왕국 내의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굳이 서열을 따지면 루비카 남작 가문의 서열은 20위 안에 들지 모른다.
가신 가문의 서열이 그만큼 높을 정도로 루비로즈 가문은 엄청난 가문이 되었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손으로 그리 만들었다.
란델리노는 반드시 루비카 가문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어머니에게 영향력이 있는 발언권을 행사할 가문을 포섭해야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루비카 남작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란델리노도 마찬가지였다.
란델리노도 상대가 루비카 남작인 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다가갔다.
루비카 남작은 그런 란델리노의 의도를 알면서 상대가 모른 척한 것이다.
“그래. 왜 이렇게 정체까지 숨기고 나에게 다가왔나?”
“남작께서 어느 날부터 없던 취미를 만드신 이유와 같죠.”
루비카 남작은 사냥에 취미가 없었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저택에서 정원 관리하는 것이 취향에 더 맞았다.
그 정도로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일부러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행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3일이면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을 꾸준하게 사냥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니 생각은 달라졌다.
모두가 사냥을 정말로 좋아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오호?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군.”
“저와 우연을 가장해서 만날 명분이 필요했으니까요.”
루비카 남작의 눈이 야살스럽게 웃었다.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눈빛으로 물어보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대와 만나야 합니까? 벨로나 백작.”
“란델리노 백작이라고 불러주시지요.”
란델리노가 담담하게 자신의 호칭을 정정하도록 요청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단호함이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대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적통이지. 예우 경칭으로 벨로나 백작이라고 불러야 맞겠지.”
“나는 벨로나 공작가문. 루비로즈 백작가문. 이 두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니까요.”
루비카 남작의 호탕함도, 야살스러움도 사라졌다.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뭐라고 했나?”
“두 가문의 작위를 모두 내가 잇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히 타국의 귀족이! 루비로즈의 핏줄도 아닌 놈이! 그딴 말을 해?!”
그의 일갈에는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느껴지게 했다.
이까지 갈았다.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살기가 피부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루비카 남작의 사람들도 란델리노의 사람들도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손을 검집에 가져다댔다.
“나의 주인은 페루제 루비로즈님이다. 그러나 네놈은 일개 의붓아들에 지나지 않아. 그런 놈이 감히 그런 말을 내뱉어!”
루비카 남작이 란델리노의 정체를 알면서도 하대를 했던 이유였다.
그는 루비로즈 가문의 가신이자 라스타 왕국의 백성.
란델리노는 왕펜 왕국의 공작가문 일개 자제에게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대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는 란델리노를 자신이 모시는 분의 아들이 아니라 법적인 아들에 지나지 않는 ‘타인’으로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