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아버지의 은인
실리는 레티시아가 한 말을 자신의 삶에서 평생을 들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남긴 마음은 가슴 깊이 남아 있어요.”
“그의 마음은 남아 있다고요?”
자신을 똑바로 봐줄 누군가는 페루제 공작부인뿐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실리의 능력과 노력을 봐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외모를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으니까.
과거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실리에게 말했다.
가면을 벗고 다녀도 된다고 말이다.
그 명령은 ‘실리’라는 사람이 가면을 벗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이라는 것이 기에 그 추한 얼굴을 드러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실리는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세상에는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실리라는 사람을 바라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군요.”
“네. 오만할 수 있으나 저는 그리 살아보려고 해요.”
주변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을 믿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믿겠다는 의미였다.
그 각오가 흔들릴 수 있다.
그 다짐이 변할 수 있다.
그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그것을 이루겠다는 말이 오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어려웠다.
“그로 인한 흔들림을 이겨 내고 해내려고 노력하려고요.”
외관이 아니라 그 상대 자체를 보겠다는 말은 실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알겠습니다.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면 나중에 수업이 정해지면 그때 만나지요.”
“네, 그러면 그날을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레티시아가 예법에 딱 맞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실리가 가면을 벗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팔로 눈을 가렸다.
그곳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티시아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눈빛이, 자신의 말이, 자신의 진심이 실리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들었는지 말이다.
“내가 이렇게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올 줄이야.”
생각도 못한 말에 실리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 생각 중에 하나는 확실했다.
레티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인 후원자를 얻었다.
실리는 레티시아의 우군이 되어서 그녀를 뒤에서 도울 것이다.
앞에서도 돕고 말이다.
“내가 받은 만큼 상대에게 갚아주는 것이 도리겠지.”
이는 페루제 공작부인도 레티시아에게 얼마든지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리의 조언 혹은 제안을 받아들여서 도움을 줄지도 몰랐다.
레티시아는 엄청난 배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냈다.
대단한 일이었다.
* * *
레티시아가 탄 마차가 집 앞에 멈췄다.
한 사내와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집안이 아니라 밖에서 말이다.
“다녀왔습니다.”
“레티시아. 왔니? 때마침 잘 왔구나.”
“네?”
“이분들이 레티시아를 만나고 싶다고 오셨어. 기다리다가 이제 가려고 했는데 네가 왔구나.”
어머니의 말에 레티시아의 고개가 사내를 향해 움직였다.
그는 레티시아를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부정적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어른이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잘못한 것도 없었기에 레티시아는 가슴을 펴고 그를 올려다봤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네가 레티시아구나. 반갑다.”
“네, 반갑습니다.”
“다시 들어오세요. 아이랑 할 말이 있잖아요.”
레티시아의 어머니는 이미 그들에게서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본래 레티시아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그녀는 레티시아가 진중하게 그들의 말을 듣기 원했다.
“아닙니다. 레티시아 양과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레티시아만 괜찮다면요. 어떻게 생각하니?”
“저는 괜찮아요.”
레티시아는 어머니가 흔쾌히 자신이 그들과 산책하는 것을 허락하자 안심했다.
적어도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 나쁜 것은 아님이다.
계산을 마치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면 어디까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저기에 정원공원이 있어요. 거기가 딱일 것 같아요.”
정원 공원은 백성들을 위해 조성된 공원이었다.
레티시아의 집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어서 가족끼리 자주 나들이를 갔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러면 좋죠. 손잡고 갈까?”
“좋아요!”
사내는 레티시아의 활기찬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영애에 관해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들었어요. 정확히는 서신을 받았다고 표현해야겠지.”
“아버지요?”
레티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그 아버지라는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이의 옷은 상당히 좋은 옷감으로 지어졌다.
일반적인 환경의 사람이 아님이다.
부유한 인물의 아버지라면 그도 상당히 부유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을 안다는 듯이 그는 레티시아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화상을 입은 할아버지지. 영애가 은인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분이고 말이야.”
“은인 아저씨! 그분에게 가족이 있는지 몰랐어요. 장례식에서도 없으셨고요.”
“네가 왔을 때에 잠시 자리를 비웠거든. 다른 자식들은 멀리 있어서 오고 있는 중이었고.”
화상으로 얼굴은 흉해졌으나 마음은 누구보다 고결했던 할아버지였다.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불효막심한 아들이야. 좀 더 자주 만났다면 좋았을 것인데 죄송할 따름이지.”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지도 서신에 그리 쓰셨어. 영애가 매일 찾아와서 말벗이 되어 주니 고맙다고.”
레티시아는 왜 이제야 아버지를 찾아왔냐고 말하지 못했다.
아들이라는 사내는 울음을 겨우 참는 듯한 눈빛으로 앞을 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파하는지 느껴졌다.
“아버지는 신관이었어. 과거에 추기경까지 하셨단다.”
“정말로요? 전혀 몰랐어요.”
추기경은 어마어마한 위치의 신관이었다.
세상에 12명만 추기경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교황과 같은 추기경을 제외한 모든 신관들이 허리를 숙여야 하는 존재였다.
평생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고귀한 자리에 있던 인물이었다.
레티시아는 신관은 혼인할 수 없는데 자식이 있다는 말에 눈이 커졌다.
충격은 곧 진정이 되었다.
추기경을 아버지라 부른 이유는 숭고했으니까.
사내는 레티시아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할 만한 주제도 아니었다.
“그분은 스스로 추기경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신에 몇 가지 권리를 하사받았어. 그 권한을 오진 고아들을 위해 쓰셨지. 그 고아 중 하나가 나야.”
“그런 분이 어째서?”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고결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탐욕스러운 추기경들 사이에서 홀로 깨끗하다니!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그분을 보았겠는가!
특히 지금의 교황은 그를 아주 싫어했다.
온갖 견제에 추기경 자리를 물러났다.
교단 내에 분열을 가져오는 것보다 선행을 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추기경 중 할아버지의 이름은 없었고요.”
“그분은 공식적으로 기록에서 지워진 분이었거든.”
평생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추기경.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그 업적이 널리 퍼질 만도 한데 세상은 조용했다.
그뿐인가?
동네에서 배척받기까지 했다.
“어째서 이 동네에서 그렇게 살다가 가셨냐고?”
“아, 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잘 자라고 있던 어느 날이었지.”
그는 당시를 떠올리는 것이 가슴이 아팠는지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걸었다.
“고아원에 불이 났어. 아버지는 그곳이 46명의 아이들을 대피시켜서 살렸고 직접 불길을 뛰어들어서 4명의 아이들을 구했지.”
“엄청 존경스러워요.”
과거의 은인할아버지도, 죽기 전의 은인할아버지도 부끄럼 없이 살았다.
그의 얼굴에 있는 화상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내어준 대가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50명의 아이들의 목숨을 구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구하지 못한 10명의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10명의 아이들이 가슴에 박히셨나 보네요.”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셨어요. 50명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은퇴하셨지.”
한번 신관은 죽을 때까지 신관이었다.
그렇지만 신관도 사람이다.
건강 같은 이유로 신관 업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신관들은 ‘신관’이지만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그래서 ‘은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의 아들은 레티시아를 보며 떠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이었다.
자식들을 따로 부르는 분이 아니었기에 의아했었다.
무슨 큰일이 있나 싶어서 급히 달려갔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정정해 보였다.
그는 자식에게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차를 내왔다.
“미안하다고 하더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그동안 나는 내가 배척을 받는 것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도 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곳이 아니라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했을 것이에요!”
그는 그동안 자신의 아버지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외롭게 살아가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서신에도, 내뱉는 말에도 좋은 말만 했으니까.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으니까.
“나는 내 죄로 인한 벌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티시아 그 아이가 사과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서신에 매일 찾아온다는 여아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느 날부터 서신에 언급되기 시작한 여아 레티시아.
처음에는 짧게 나왔던 내용이 점점 길어져서 어떤 서신에는 그 아이 이야기만 써져 있을 때가 있었다.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며 행복해하던 당시의 아버지가 떠올라서 좋았다.
“그래. 매일 피해 다녀서 미안하다더구나.”
“아이는 어른들을 보고 배우니까요.”
그들은 레티시아가 어른들의 말에 따른 것뿐임을 알았다.
아이는 무지하다.
그래서 어른들이 잘 이끌어줘야 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아이의 삶이 결정이 될 것이니까.
바르지 못한 길로 안내해서도, 외면하고 방치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그 아이가 말하더구나. 내가 한 아기의 삶만 구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지요.”
“내가 그 아기와 그 아기를 사랑한 사람들의 삶도, 훗날 그 아이를 사랑할 사람들의 삶을 구했다고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이라 여겼다.
아기를 잃었으면 아기의 목숨은 물론이고 그 아비의 마음은 죽을 것처럼 찢어졌을 것이니까.
“그러나 정작 당신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기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당신도 자격이 있다고 하더구나.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했다.
삶이 늘어난다는 것은 사랑을 받을 기회도 늘어남이다.
레티시아는 그들도 사랑받을 기회를 얻은 것처럼 당신도 사랑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신관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만 생각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삶이었다.
그것은 일생 누구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다.
신관은 타인을 위하는 존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