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들이 없는 사이에 (2)
실리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확고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 이상을 배워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군요.”
레티시아는 안도했다.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것들의 성취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에 마음이 나아졌다.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배운 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슬픈 것이다.
실리가 의외라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렸다.
그리고는 말을 뱉었다.
“지금 배우는 것도 적지 않은데 괜찮은 것입니까?”
“새로운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저의 세상도 넓어지는 것 같아서 좋아요.”
배우면 배울수록 세상이 넓어진다.
실리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시녀장님은 너무 엄격해.
—그러니까 숨이 막힌다니까.
—배우라는 것은 어찌나 많은지 머리가 아프다니까.
—적당히 해야 진도를 따라가지. 너무 힘들어.
아랫사람들은 자신을 무서워했고 불편해했다.
—야, 그래도 참아. 양녀가 되어야 나중에 잘 먹고 잘살지.
—그래. 어디 나도 귀족영애가 한번 되어 봐야지.
—진짜 드러워도 참는다.
그들은 자신을 위로 올라갈 발판쯤으로 여겼다.
—역시 안 되겠어.
—어느 귀족 영애가 이런 것들을 배워?! 우리가 왜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하냐고!
—경제학, 귀족 상속법, 평민처벌법 등 매주 보는 쪽지 시험도 너무 힘들어.
—나는 포기하려고 해.
—나도 그럴려고. 같이 실리 시녀장님께 말하자.
기꺼이 발판이 되어 줘도 수많은 경쟁에 버거워했고 좌절했다.
포기하며 사라졌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 인재를 길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공적을 세워서 위로 올라갈까?
—평민에서 실리님의 양녀로, 양녀에게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지. 어머니의 마음에 들어야 해.
—어머니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움직여야겠지. 멋대로 움직였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 손해는 내가 짊어지니까.
그러나 그중에 인재로 거듭나는 이들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독한 이들’만이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그 인재 중 누구도 레티시아처럼 배움을 갈망하며 행복해하지 않았다.
가르침을 준다고 하여도 순수한 호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이 몽글몽글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 * *
“시녀장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이 또렷해졌고 그 앞에는 레티시아가 있었다.
“시녀장님?”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군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낯선 경험과 감정에 평소답지 않게 딴 생각에 빠졌다.
자신의 주인이 내린 명령을 따르기도 바쁘다.
그런데 정신을 팔다니!
실리 자신이 생각해도 주책이었다.
“어떤 것들부터 배울지, 어느 수준에서부터 배울 지부터 확인을 해야겠지요.”
실리가 서랍에서 종이들을 꺼냈다.
그것은 시험지였다.
문제가 많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장수였다.
“먼저 수준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니 편히 하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2시간 드리지요.”
“네, 알겠습니다.”
레티시아는 부담스러운 문제 수를 지닌 시험지를 담담하게 받았다.
그리고는 실리 시녀장 책상 옆에 있는 다른 책상으로 향했다.
그곳의 의자에 차분히 앉았다.
그녀는 집중하여 문제들을 읽었고 신중하게 답을 써냈다.
‘여러 분야의 문제가 있는데 조금씩이지만 쓰고 있다고?’
서술형 문제들이었다.
객관식은 찍어서 맞출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읽으면서 고민은 하되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쓰는 것인지 몰라서 막 쓰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레티시아는 어떤 문제에서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답을 써내려 갔다.
어떤 문제에서는 고민을 좀 하는가 싶었다.
그러면서 이게 맞나 하는 얼굴로 자신감 없이 답을 썼다.
어떤 문제에서는 정말 모르겠다는 좌절감을 한껏 드러냈다.
그 표정을 보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실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네.”
2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실리의 공지가 들리자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험지를 그녀에게 줬다.
아이의 나이를 감안하여 문제를 쉽게 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온전히 어른의 입장이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실리는 그것을 고려해야 채점할 생각이었다.
반면에 레티시아는 침을 삼키며 그 결과를 기다렸다.
‘망했다.’
어려웠다.
아는 문제도 있었지만 애매하고 모르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바라는 수준이 너무 높음에 다시는 여기에 오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자신의 수준이 낮아서 란델리노의 벗 자리에서 쫓겨날지 몰랐다.
‘그래도 친구였는데 작별인사는 하게 해주겠지. 설마 바로 이별하게 하겠어?’
작별인사를 할 기회는 줄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성격상, 그냥 바로 떠나게 하고 다시는 불러주지 않을 수 있지.’
레티시아는 작별인사는 포기하기로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성격을 떠올리니까 체념도 쉬웠다.
그녀의 높은 기준과 수준을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의외입니다.”
“네?”
바로 탈락이라고 말할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실리의 목소리에는 호감을 포함하고 있었다.
“문제에 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쓸 수 없는 답들이 있더군요.”
“아는 문제가 나와서 안도했어요.”
레티시아는 해맑게 대답했다.
모르고 애매한 문제들 사이에서 아는 문제가 딱! 보이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모른다.
그 순간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깊이는 부족하지만 의외로 아는 분야들이 많더군요.”
“맞아요. 깊이 알기에는 제가 부족해서요.”
레티시아는 소설 작가가 꿈이다.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으로 쌓아 둔 습작들이 많았다.
그 습작들은 그녀가 해 온 노력의 산물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지식도 많아야 한다.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법률지식이, 기사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전쟁지식이,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의학지식이 필요하다.
레티시아는 주인공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러나 법도, 전쟁도, 의학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알아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러다 보니까 좋아하는 부분이 아닌 이상에는 소설 쓰기에 필요한 부분만 알고 넘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뭔가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기분이 들게 했다.
칼을 들었으면 당근이라도 베어야 할 것이 아닌가!
“법률지식도 있고, 의학도 좀 아는 것 같고요. 어려운 분야인데 말입니다. 스스로 익히기 어려웠겠습니까.”
“맞아요. 정말 어렵더라고요.”
“정말 장하군요.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레티시아가 듣기에 실리의 말은 자신의 지식과 자신이 경험한 어려움을 인정하는 듯했다.
그래서 서슴없이 실리에게 눈을 반짝이며 한결 편해진 얼굴을 보였다.
* * *
그동안 그녀는 노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재미도 없는 것을 왜 읽니?”
“내 꿈을 위한 노력이지요. 알면 알수록 이야기할 것이 늘어나니까요.”
“겨우 취미에 그렇게까지 시간 낭비하지 마.”
“왜 그런 말을 해요? 저는 취미가 아니라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것인데요.”
“여인이 작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왜요?”
“뛰어난 사내들이 이미 작가로 있고 곧 작가가 될 것인데 굳이 여인을 선택할 이유가 없지.”
그녀가 소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그 꿈을 위한 노력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여인과 사내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여겼다.
여인도, 사내도 같은 사람인데 어찌하여 여인을 하찮게 낮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편협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 * *
레티시아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수많은 타인에게 자신의 노력을 부정당했다.
의욕이 꺾일 뻔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한 번의 인정으로 그녀는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을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실리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부모님이랑 이모님 빼고 처음이에요. 모두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하거든요.”
“라스타 왕국은 많이 바뀌었으나 알펜 왕국은 아직 아니었지요.”
실리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레티시아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레티시아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실리는 책상에 앉아 있고 레티시아는 서 있었다.
아무리 다가간다고 한들 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실리는 움찔했다.
마치 자신을 갑자기 만져서 놀란 것처럼 말이다.
“여인이 지식이 생기면 목소리를 높이고 드세어지며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게 된다는 기적의 논리가 아직도 있는 시대니까.”
실리가 이를 갈았다.
못생긴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와 그런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자신의 편을 들었기에 더욱 맞았던 것이 기억났다.
어디 감히 남편에게 대드냐며 더 화를 내고 때렸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더욱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내가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나?’
레티시아는 이 갈리는 소리에 흠칫했다.
자신의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싶었다.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원래 서 있던 곳에서 앞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책상과 거리가 가까웠다.
그녀는 얼른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뒷걸음질했다.
윗사람의 책상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앞에서 무언가 승인을 받거나 허락을 구하고 있음이다.
그런 상황에서 허락도 없이 움직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났다.
앞으로 간 몇 걸음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은 웃기기는 하다.
그렇지만 워낙 원칙을 중요시하는 분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 모습을 실리는 눈에 담았다.
단지 눈치 채지 못한 척했을 뿐이다.
그녀는 아까의 이 갈림이 없었던 사람처럼 우아하게 말했다.
“영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이 되었습니다. 분야별로 영애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준비해 놓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수업하면 되는 것일까요?”
“준비와 날짜가 정해지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네”
레티시아가 야무지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잠시만.”
“네?”
실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는 돌발행동을 했다.
실리는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던졌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물론 이유는 말하라고 한다면 있었다.
레티시아가 또래와 비교해서 월등히 뛰어나서.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보여줬던 호의가 낯설어서.
레티시아가 세상의 편견을 이유로 배움을 포기하지 않아서.
레티시아가 거리낌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온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이유는 만들려고 하면 많았다.
온갖 이유를 다 만들어서 붙일 수 있었다.
실리는 궁금했다.
너무나 추해서 죽어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외모를, 추한 외모로 몸조차 팔 수 없었던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볼까?
레티시아의 얼굴이 굳었다.
실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 기대감은 마음을 더 우울하게 했다.
그리고 의외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실리는 멍하니 레티시아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