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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31화 (131/221)

131화 그들이 없는 사이에 (1)

페루제 공작부인은 수도에서 일상인 것처럼 한 일이 있었다.

벨로나 영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꾸준히 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어떤 여인과 산책을 했다.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가 멋있게 관리된 곳이었다.

그녀는 상대에게 황송해하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왕비마마, 이렇게 매번 저를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이리 와 주니 하루, 하루가 즐겁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다니 무슨 뜻인가?”

페루제 공작부인와 왕비는 친해졌다.

왕비는 그녀를 편하게 대했다.

진짜 벗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의 말에 왕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자신은 그녀를 만나서 즐겁기만 하거늘 어찌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인가?

혹시 누군가가 눈치를 준 것인가?

눈치를 준다면 줄 사람은 하나였다.

국왕!

아무리 국왕에게 밀리지 않는 페루제 공작부인이라고 할지라도 왕실의 방문은 왕과 왕비의 영역이었다.

“제가 뻔뻔하게 너무 자주 오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불편했었거든요.”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일생에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적이 없었네. 그런 생각은 하지 말게.”

“왕비마마.”

페루제 공작부인이 감동한 것처럼 왕비를 불렀다.

왕비는 이를 갈았다.

분명히 자신의 남편인 국왕이 그녀를 견제한 것이 분명하다.

여전히 그는 아내인 자신을 무시했다.

자신이 그녀를 만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다.

건국제 연회의 일이 있고 난 뒤에 왕비는 자신의 상황이 변할 것이라 믿지 않았다.

국왕이 왕비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같을 것이니까.

다른 정부들도 쫓겨난 그것처럼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하나 쫓아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고 여겼다.

“오히려 자네가 벨로나 영지로 떠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허하네. 부디 자주 나를 만나러 와 주게나.”

“왕비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래야죠. 마마와의 시간이 저에게도 너무 소중하답니다.”

그러나 그 예상은 틀렸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왕비인 자신을 무시하는 정부들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도망치기 바빴다.

왕궁에 온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허겁지겁 달아나는 정부도 있었다.

그녀라면 왕궁에서 쫓겨난 여인처럼 인생을 망쳐버릴 수 있었으니까.

국왕조차 구해주지 못한 것을 듣지 않았는가.

페루제 공작부인은 국왕도 어찌할 수 없는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그들을 해할 수 있었다.

정부들은 그리 생각했다.

“영지로 돌아가지 말고 나와 있으면 얼마나 좋아.”

“저도 그러고 싶으나 가문의 안주인이 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요즘은 날파리들이 날아다니지는 않습니까?”

“요즘 날파리들이 눈에 띄지 않아서 눈을 찌푸릴 일이 없네.”

페루제 공작부인과 왕비는 정부를 날파리라고 칭했다.

그들만의 작은 암호였다.

왕비는 정부들을 날파리라 칭하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그들을 하찮게 만드는 별칭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정부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무서웠다.

그녀의 눈치를 봐서인지 정부들은 몸을 사렸다.

몸을 사린만큼 왕비와 마주치는 빈도는 확실히 줄었다.

우연히 왕비를 만나게 되어도 피하려고 했다.

그녀를 무시하기 위해서 다가왔던 과거와 달랐다.

왕비의 뒤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왕비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왕비마마, 조금만 참으십니다. 마마의 아드님이 왕좌에 오르는 날에 모든 수모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이가 없으면 그리되겠지. 그대 말처럼 그때를 기약하며 견디겠어.”

그녀는 왕비와 헤어질 때면 하는 말들 있었다.

지금의 국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왕비는 참아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들이었다.

“영지로 돌아가도 서신을 주기적으로 보내겠습니다.”

“그 서신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네.”

왕비가 지금은 그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뉘앙스의 말들을 한 번, 열 번, 백 번, 천 번 듣게 된다면.

그리고 읽게 된다면 국왕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까?

여인은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저버릴 결심을 할 때가 언젠가 오지 않겠는가.

왕비에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그런 생각이 생긴다면 재미가 있을 장난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왕비와 인사를 나누고 왕궁을 나섰다.

그녀는 왕궁을 나서면서 작게 말했다.

“대비마마와도 관계는 아주 좋아졌고 나랑도 괜찮아. 이대로 관리를 하면 될 것 같군.”

만족감이 느껴지는 혼잣말이었다.

* * *

벨로나 영지로 돌아가야 할 때가 도래했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모두 벨로나 공작부부와 란델리노를 배웅 나왔다.

“그동안 수고했네.”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간단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마차와 기사들이 저택을 떠나 수도를 나왔다.

* * *

벨로나 공작일가가 수도에 있는 동안, 레티시아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실리 시녀장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티시아는 집무실로 보이는 방으로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녀는 그 집무실을 구경했다.

보통 품질이 아닌 것이 확연해 보이는 가구들이 있었다.

또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서적들이 있었다.

사뿐사뿐 살펴보는데, 갑자기 시선이 책상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어떤 서류들이 있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예산지출 내역이었다.

“이거 이상한데?”

“무엇이 이상합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레티시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였다.

“방을 구경하다가 함부로 서류들을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기밀정보도 아닌 것을요.”

본디 손님인 레티시아가 시녀장인 실리보다 높은 것이 맞았다.

그것이 원칙이라도 할지라도 그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최측근이었기에 예의를 다했다.

게다가 실리는 엄연히 귀족이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실리를 윗사람으로 대했다.

실리는 레티시아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님이었기에 예의를 차렸다.

“오히려 궁금하더군요. 무엇이 이상합니까?”

“그것이 말입니다…….”

레티시아가 말을 흐리려고 했다.

이대로 넘어간다고 해도 레티시아 자신은 엄연히 벨로나 공작 가문의 내정서류를 본 것이었다.

공작 가문과 관련이 없는 제삼자가 서류를 본 것으로 부족해서 훈수까지 둔다니.

분수에 맞지 않았다.

그 생각을 실리는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문제를 바로 잡아준다면 고마운 일이지요.”

“정말 그리 생각해 주시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 마치 웃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목소리에 어떤 말이 나올지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를 보십시오.”

“이것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제가 가리킨 지출 목록을 보면 세부사항도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목록은 그에 따른 설명이 있지요.”

실리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비품 등은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목록만 보고 알기는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다섯 뱀 기사단의 무기관리를 위한 특수 약제를 구입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기에 적힌 특수 약제의 종류를 보면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의아한 것이라고요?”

“특수 약제 간의 배합에 따라 그 효과가 배가 되기도 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 적힌 것들을 배합하면 그 효과가 감소하게 된다고 알고 있어요. 오히려 무기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실리가 멍하니 레티시아를 바라봤다.

실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불순한 무리를 찾아내라고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수상함을 느낀 실리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문의하여 알아낸 사항이었다.

그런데 레티시아는 그것을 바로 눈치챘다.

오직 본인의 지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깊은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분야에 관심이 있어야 가능했다.

어린 레티시아의 능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까?”

“저희 부모님이 출판사를 하실 때는 이것저것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들을 기억합니까?”

“전부는 아니고 일부는요.”

“일부라도 기억하고 있다니 대단하군요.”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었거든요.”

레티시아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것이 귀엽게 느껴졌다.

가면에 가려진 입가는 미소가 나타났다.

만약 이런 아이가 자신의 곁에 있다면 더 효율적으로 공작부인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가르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실리는 그리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처럼 책을 읽었나요?”

“그때보다는 덜 읽어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읽으려고 하고 있어요.”

레티시아는 과하게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과하게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객관적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편안한 말투로 상대를 배려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들었다.

과한 기대감을 주지 않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또한 상대가 레티시아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레티시아의 능력에 관하여 신뢰감을 선사했다.

“영애께서 걱정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조치를 취하도록 명령을 내렸거든요.”

“역시 그러셨군요. 제가 괜한 말을 꺼냈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 결정에 확신이 들어서 만족스러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티시아가 훈훈하게 웃다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여기에 오기 전까지 내내 궁금해했던 것을 물어야했다.

“그런데 실리 시녀장님, 어찌하여 저를 부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공작부인께서 저에게 내리신 명령이 있습니다.”

“명령이라니요?”

레티시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리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과 관련된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자신과 실리 시녀장님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너무 뜬금이 없었으니까.

“그분께서는 영애가 교양과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물어도 될는지요.”

“그분은 자신의 아들이 격에 맞는 이들과 친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아…….”

그 말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자신은 친구인 란델리노와 수준이 맞지 않는 아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부족함을 대놓고 듣게 되어서 민망하고 창피했다.

아까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자신의 성취가 부족했던 것인가 싶었다.

자신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공작부인께서 보내주신 교사들께 배운 것으로는 부족할까요?”

“그것은 그냥 귀족으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인 것이지요.”

레티시아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소개시켜 준 교사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수준 높은 강의는 그녀의 지식과 능력을 더욱 높게 만들었다.

또래 중에 그녀만큼 귀족적인 영애는 없을 것이다.

지식도, 예법도 그녀는 빠르게 배웠다.

교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실리 시녀장에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에게도 그것은 귀족이라면 응당 익혀야 할 기본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귀부인들, 영애들이 들었다면 기겁할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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