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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30화 (130/221)

130화 대우해주면서 외면하는 이유

아그리피나가 한숨을 옅게 쉬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재미를 위해 놀아줘야 했다.

이리도 눈을 반짝인다는 것은 좋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으니까.

“빅토르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첫 번째 사람이었다는 타이틀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칭호에 비해 그가 그분에게 받은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다섯 뱀의 부단장 자리와 다섯 뱀에 속하는 ‘검은 뱀’의 단장 자리입니다.”

“어머니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가 부족한 자리인지 처음 알았네?”

란델리노가 비아냥거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들었다면 분노하며 쫓아냈을 발언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 자신의 병사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는 충분히 매력적인 보상이었다.

“처음에 빅토르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거잖아. 그만한 자리를 줬다고 판단하셨을지도 몰라.”

“첫 번째 가신으로 대우를 해주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빅토르님이 없었다고 해도 현재는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그리피나는 담담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분의 성정상, 대체할 인력을 구하셨을 것이니까요.”

“그것이 빅토르가 부단장에 머무는 이유라는 것이야?”

“네. 그리고 부단장이라고는 해도 로빈 단장님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단장 자리에 있는 ‘검은 뱀’에서나 영향력이 있다고 듣기는 했어.”

로빈은 기사단 세력을 정치적 세력 확장에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예로부터 강한 권력은 강력한 병권을 기반으로 구축이 되었다.

로빈의 행동은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자식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주고 싶은 것이다.

로빈은 아들의 성공에 카엘족 모두의 미래가 달렸다고 여겼다.

로빈은 자신의 자식이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야 카엘족이 안위가 보장된다고 확신했다.

란델리노 입장에서는 불행이지만 로빈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생각하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사사로이 기사 세력을 이용해도 그녀가 조용히 있는 이유였다.

“부단장으로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인물로 평이 좋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뭔가를 행하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나를 지지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겉으로 보기에 빅토르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누군가의 지지 호소에 쉽게 움직이지 않으리라.

그것이 가능했다면 지금 누구의 세력 안에 들어가야 했다.

여기서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미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이지 않은가?

어찌하여 누군가의 세력에 들어가야 하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세력은 거대했다.

사람들은 각자가 생각이 달랐고 그 성향에 따라 뭉치게 되어 있다.

또한 무엇이든 거대해지면 그 관리를 위해서 나눠지게 되는 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같은 세력 안에서도 나름의 파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성향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이득에 따른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맞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세력은 견고하지만 그 안에 대립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알아. 그 정체 모를 후계자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겠지.”

페루제 공작부인 세력 안의 파벌은 2곳이다.

로빈과 로빈의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그들을 반대하는 세력.

그들은 벌써부터 루비로즈 가문의 미래를 걸고 싸우고 있었다.

반대세력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로빈이 카엘족이고 그 아들은 카엘족의 특징인 붉은 눈을 가지고 있음을 말이다.

아무리 비밀로 하려고 해도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그 후계자 후보를 견제할 대항마가 없어서 아직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그 대항마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적극적으로 나서겠지.”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뜻을 반대하는 그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만 노력해서는 아니 되었다.

다수의 뜻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드러내야 했다.

어머니에게 고민할 계기라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 반대세력에 저희를 어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과 연이 닿아야 합니다.”

“그래서야.”

“그래서라고요?”

“그는 중립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야. 다르게 생각해 봐.”

아그리피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졌다가 펴졌다.

저 작은 영식의 생각을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가 빅토르 부단장을 선택한 것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음이다.

“그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 이유는 세간의 생각과 다를지 몰라. 그가 완전한 어머니의 사람이라서라면?”

“굳이 미래의 루비로즈, 미래의 권력을 두고 싸우지 않을 정도로 페루제 공작부인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방향이었다.

빅토르 부단장을 신뢰하고 있거나 개인적으로 가깝게 여기는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젊은 시절, 어떤 사건을 계기로 총애를 잃었다는 말이 돌았다.

란델리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나도 어머니와 그 사이에 있던 사건에 대해서는 보고받았어.”

“그 일을 아시면서 그리 말하시는 것입니까?”

정말 그 사건을 아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그는 아그리피나의 궁금함을 풀어줄 용의가 넘치게 흘렀다.

“알아. 어머니와 빅토르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소한 소문이 돌았다지.”

“그 소문에 화가 난 부인께서 빅토르님의 등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쳤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알지. 그것도 귀족들을 초대한 연회에서, 참석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랬다는 것도 알아.”

페루제 공작부인과 빅토르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냈다.

남남이거나 여여였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아쉽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여인이고 빅토르는 남자였다.

아무리 주군이라고 해도 여성.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

상대는 카엘족이라고 해도 훤칠한 기사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았다.

오히려 카엘족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영애로 비련함을 느끼게 해줬다.

문제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런 소문이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처신을 하면 자신이 그런 추문에 휩싸이느냐며 소리치셨다고 하죠.”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말리고 말려서 겨우 진정했다니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알 만해.”

귀족은 귀족다워야 한다.

우아하고 정숙한 완벽한 귀족.

그것을 원하는 페루제 루비로즈에게 그런 작은 소문도 흠이자 치욕스러운 상처였다.

“어머니답기는 하지. 그 이후로 그딴 소문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누가 자기 치정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때린단 말입니까.”

그렇게 빅토르가 기절할 때까지 때리고 난 뒤에 그와 그녀 간에 추잡한 소문은 돌지 않았다.

진짜로 다정한 사이였다면, 특별한 사이였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것도 다수가 보는 앞에서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매 맞는 기사라니!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그 소문은 헛소문으로 다수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빅토르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지.”

“페루제 루비로즈의 측근 자리를 포기하기에는 하찮은 일이죠.”

아그리피나는 그 사건을 하찮은 일로 치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사자에게는 치욕스럽고 민망한 일로 치부할 일을 말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측근 자리는 그런 일도 참게 만들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일로 어머니는 추문에서 벗어났지. 그리고 빅토르는 그에 따른 벌을 받고 계속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어.”

“빅토르를 그 일을 명분으로 쫓아내지 않기 위해서 그리했다는 말씀입니까?”

빅토르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최측근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많았다.

카엘족 기사 하나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시는 분의 명예를 훼손하는 기사를 쫓아내라! 얼마나 명분도 좋은가!

“그리고 어머니는 그 일로 측근치고는 관심에서 좀 멀어진 것처럼 행동하셨지. 모두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처럼”

“그동안 칭호에 비해 대우가 낮았던 것도, 그에게 관심을 덜 줬던 것도 모두 빅토르 부단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그날 이후로 빅토르가 내부적으로 공격당하는 일은 없었잖아.”

란델리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 한 번 내 말에 반박을 해보라는 도발처럼 보였다.

그녀는 침묵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그의 말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아그리피나는 당황스러웠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그리피나가 짜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사랑은 아니겠죠?”

“사랑은 아니겠지. 그게 사랑이라면 이 세상에 사랑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될까?”

“역시 그렇죠.”

물론 사랑은 확실히 아니다.

세상 어디에 사랑하는 상대를 덤덤하게 볼까!

어떤 때는 날카롭기까지 했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 거부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킨십다운 스킨십도 한 적이 없었다.

들은 적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만지고 싶은 것은 당연하거늘,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가 생각한 후계자 후보를 반대하는 이들의 지지도 필요하지. 그러나 어머니가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이의 뜻을 더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어?”

“다수의 조잘거림보다 가치가 있는 하나의 말이 더 무거운 법이지요.”

그녀는 란델리노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왜 하필 빅토르 부단장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란델리노는 최고의 선택을 해냈다.

자신조차 몰랐던 빅토르의 가치를 찾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잡은 란델리노라는 줄이 튼튼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솔직히 페루제 공작부인이 추천한 로빈 단장은 뭔가 음흉했다.

자기 마음을 잘 감추는 사람은 그 안의 불순한 의도를 잘 감추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검술 스승이 되었다면 꺼림칙함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공작부인에게 영식을 후계자로 택하게 할 만한 발언을 하도록 만들어야겠군요.”

“최대한 다가서 달콤하게 굴려고 해. 남들이 친아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친해져야지.”

“그분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군요.”

“벨로나 영지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알아와.”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좋아.”

아그리피나가 방을 나서고 란델리노는 책을 읽었다.

자신을 낳아 준 여인이 남기고 간 유품이었다.

그림책을 펼치며 미소를 지었다.

“계획한 것이 하나하나 이뤄지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어머니가 자신의 계획을 이루면서 느끼는 승리감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승리감을 계속 맛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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