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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9화 (129/221)

129화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

페루제 공작부인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빅토르의 생각을 물어보자구나. 본인이 원치 않을 수 있으니까.”

“알겠어요. 빅토르 부단장님 안녕하세요. 어머니를 옛날부터 따르셨다고 들었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빅토르의 의사를 물어보자 하고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검은 뱀’의 수장과 란델리노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은 모르는 것처럼 란델리노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로빈과 다르게 란델리노는 서슴없이 빅토르에게 다가갔다.

“저야말로 영식의 검술 스승이 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빅토르, 고마워요.”

란델리노는 격하게 행복해하며 빅토르를 껴안았다.

의외의 반응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미약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돌아갔다.

로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수업하기를 원하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그러나…….”

빅토르의 물음에 그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너무 배우고 싶으나 지금은 배울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에 느껴질 아쉬움을 잘 연기해 냈다.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네, 여기서 사귄 친구들이 있거든요. 떠나기 전에 자주 만나려고요.”

“그렇군요. 그러면 벨로나 영지에 돌아가면 그때부터 수업을 시작하지요.”

“그렇게 할게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참으로 오묘하다고 느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면처럼 보였다.

검술 스승을 결정하고 란델리노는 훈련장을 떠났다.

공부를 위해 자신의 방으로 간 것이다.

* * *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가 사라지자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깊은 분이시네.”

“그렇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주군께서 괜히 영식을 아들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었어.”

“그분의 아들이 될 만한 자질을 지녔음이야.”

그들은 란델리노에 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들과 그는 접점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기사들은 란델로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생각해 줘서 소드마스터에게 배울 기회를 포기하다니 놀랐어.”

“나는 놀람을 넘어서 감동까지 했다니까.”

“솔직히 주군의 아들이 원한다면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입장이기는 하지.”

“게다가 소드마스터의 가치를 알고 존중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

“소드마스터는 우리 모두의 목표라서 더 그랬어. 존중받을 목표라는 생각이 들었잖아.”

“맞아.”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소드마스터의 가치를 알고 물러날 줄 알았다.

자신들이 목표로 삼는 경지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마치 자신들이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음이다.

란델리노가 오늘과 같은 배려와 깊은 생각을 일관되게 보여준다면 다섯 뱀 안에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이 흐름은 좋지 않다.’

반면, 로빈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쉽게 검술 스승이 되리라 믿었기에 예상밖의 일이었다.

자신이 검술 스승이 되면 최대한 ‘다섯 뱀’의 기사들과 교류를 막으려고 했는데, 어렵게 되었다.

도리어 이 일을 계기로 기사들의 호의를 샀다.

무력을 담당하는 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작은 주춧돌을 세운 것이다.

그 작은 주축돌이 나중에 무엇을 세울 기반이 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로빈이 작게 혼잣말했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해.”

로빈은 위기감을 느꼈다.

아이를 상대로 과했다.

그러나 본능은 알았다.

란델리노가 자신의 아들을 방해할 존재임을 말이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빅토르와 집무실로 향해갔다.

“어찌하여 받아들였느냐?”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지.”

거부할 수 있었다.

거부하는 것이 맞았다.

자신이 빅토르의 의사를 물은 것은 거부하라는 뜻이었으니까.

로빈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 맞았다.

그 인물에 빅토르는 없었다.

“그 아이가 로빈을 거부했어.”

“소드마스터의 가르침을 거부했다고요? 어린 아이라면 누구라도 동경하며 받아들일 일인데 말입니다. 과연 주군의 아들이십니다.”

“그래. 나의 아들답지. 그런데 지나치게 비상해.”

비록 란델리노가 어린 아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뛰어났다.

과한 생각이지만 그동안의 행보를 떠올려라.

빅토르를 검술 스승으로 삼은 것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아직 모를 뿐이다.

“알렉산드로의 존재를 모를 것인데 마치 아는 것 같다는 망상이 잠시 들 정도로 말이야.”

“주군의 조카를 주군의 아들이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소름 돋게 진실에 다가갔다.

란델리노는 꿈을 통해서 회귀 전의 삶을 일부 봤으니까.

천하의 페루제 루비로즈라고 해도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그럴 리 없는 일에도 가능성을 두고 생각한 결과였다.

물론 그것이 말이 너무 되지 않아서 망상으로 치부했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지만 내가 알려 주지 않는 아이를 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

“과한 걱정이십니다. 아이는 아이로 봐주시지요. 저희도 어린 시절에는 순수하지 않았습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빅토르를 바라봤다.

참으로 한결같았다.

자신을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도 자신을 위해 손을 피로 더럽혀도 이 눈빛은 굳건했다.

이래서 빅토르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한낱 어린아이의 감시를 맡으라고 명령을 내릴 수 없었으니까.

“우리도 순수했다…….”

“네. 저희도 순수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대뿐이지.”

빅토르는 자신과 과거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순수함을 기억하는 유일한 벗이었다.

빅토르는 일개 영애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따랐다.

힘다운 힘이 없는 자신을 위해 나서준 첫 번째 사람이자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더러운 일을 맡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있도록 해준 1등 공신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그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빅토르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변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대뿐이지.”

“아닙니다.”

“아니, 그때의 나를 아는 사람 중 그때의 나를 순수하다고 말하는 인물은 없어.”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어린 나이에도 그녀는 달랐다고, 뭔가 달랐다고 말이다.

그 당시에는 아름답고 순수했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남들과 달랐다고 말했다.

오직 빅토르만 우리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신 것이지요. 분명히 저처럼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인의 천진함을 말입니다.”

“그대가 그리 말하면 그런 것이겠지.”

빅토르의 안에 있는 자신의 순수성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들조차 의심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감시까지 하는 불신을 보여주기 싫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피식 웃었다.

참으로 이중적이지 않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의 손을 피로 물들이게 했다.

‘검은 뱀’에 있으면 온갖 정보를 알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비열한 결정을 했는지도, 얼마나 추악한 결정을 했는지도 안다.

그런데도 직접적으로 그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것은 과거로 충분했다.

더는 싫었다.

그녀는 그에게 란델리노를 감시하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그래, 알았다. 아이에게 과한 경계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다. 잘 가르쳐다오.”

“물론입니다.”

결국은 한걸음 물러나서 빅토르의 의사를 따랐다.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못할 것이다.

자신을 이리 물러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상대가 빅토르라는 것은 더욱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데 능숙했다.

또한 외면하고 방관하는 것도 잘했다.

“그러면 집무실에 들어가서 그대의 보고를 듣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문이 열렸다.

그들이 들어가고 소리가 들렸다.

딱!

문이 닫혔다.

* * *

“으흥~ 흠~ 흠~”

란델리노는 자신의 방에서 콧노래를 불렀다.

조금 위기가 있었으나 원하는 것을 이뤄 냈다.

어머니는 결단코 빅토르에게 자신을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지 못하리라.

빅토르가 어머니를 배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머니도 빅토르를 놓지 못한다.

“참으로 이상한 관계였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 둘이 연인이라는 것은 어두운 밤에 달이 아닌 태양이 뜨는 것과 같았다.

불가능했다.

어쩌면 빅토르는 사랑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확언하건대 어머니는 아니었다.

만약 빅토르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비참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를 철저하게 자신의 기사로 대했으니까.

어머니는 그에게 사랑의 말을 속삭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연인으로 할 그 어떤 것도 말이다.

“빅토르와 어머니가 연인이라는 말은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소리라는 말이 있었지. 꿈속이라도 그들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말이었어.”

세간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빅토르와 어머니는 주군과 기사의 사이였다.

남자와 여자인데도 사람들은 그 둘을 전혀 엮지 않았다.

그 정도로 어머니는 그에게 차가웠다.

다른 가신들보다 더 선을 그었다.

“사랑은 아니었을지언정 소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어.”

꿈속에서 빅토르의 죽음을 봤다.

왜 죽었는지는 모른다.

죽은 그를 보게 된 어머니를 봤을 뿐이다.

담담해 보였으나 평소와 달랐다.

어머니의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그것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상대에 관한 증오이자 혐오이자 분노였다.

꿈에서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어머니는 빅토르를 귀하게 여겼다.

그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귀하지 않은 척하며 감춘 것인지도 모르지.”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그 소리에 대답했다.

“들어와.”

“검술 스승을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피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아그리피나였다.

그녀의 말에 란델리노가 즐겁게 웃었다.

반대로 아그리피나는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빅토르 부단장님을 선택하셨더군요.”

“벌써 너에게도 소식이 들어갔네. 역시 정보력이 빨라.”

란델리노의 능청에도 그녀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응? 왜?”

란델리노가 아그리나의 말에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마치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대충은 예상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직접 듣는 것과 추측하는 것은 다르지 않는가.

아그리피나가 약간 짜증이 섞인 눈으로 란델리노를 바라봤다.

란델리노가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되물어본 것임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곧 짜증은 사라지고 진정이 되었다.

알고 있음에도 빅토르를 선택했다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니까.

“알고 계시면서 굳이 물으시다니요.”

“피나와 나의 생각이 일치하는지 궁금해서?”

이럴 때보면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그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그는 일반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엄청난 야심을 숨기고 있는 아이였다.

자신이 모시는 분은 무서운 아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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