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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8화 (128/221)

128화 계획대로 된 자와 계획이 어긋난 자

기사들은 란델리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언짢음이 있었다.

감히 소드마스터를 거부한 저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시선에 주눅이 들만도 했다.

일정 경지 이상을 이룬 기사들의 기세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란델리노는 여유가 넘쳤다.

당혹스럽기는 했으나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어머니가 로빈을 추천할 것을 꿈을 통해서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존재라니?”

“소드마스터는 무의 극의에 도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물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분위기는 빠르게 편안해졌다.

기사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는 모든 기사가 이루고 싶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를 가져다줘야 할 책무가 있었다.

수많은 위협에서 주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수많은 기사를 훈련시키고 더 강하게 만들 도리가 있었다.

그것들을 다 이루기 위해서는 하루를 바쁘게 보내야 했다.

검술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아이에게 그 시간을 할애하기에 로빈은 바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아들을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은가.

그는 하루 중 허투루 쓰는 시간이 없었다.

“비록 제가 소드마스터는 아닐지라도 그 어깨에 지고 있는 것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가 해야 할 일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소드마스터를 스승으로 두는 것이 과하다는 것이냐? 이 페루제의 아들임에도 말이야.”

그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소드마스터의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로빈을 검술 스승으로 붙여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저는 어머니의 귀한 아들이지요. 그러나 제가 그의 시간을 빼앗는다면 제가 어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네가 왜 잠을 잘 수 없는지 모르겠구나.”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소드마스터에게 검술을 배운다는 이유로 흥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란델리노는 다른 의미에서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로빈의 가르침으로 더 강해질 수 있는 기사들입니다. 제가 그의 시간을 가져가면 갈수록 저는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들이 강해질 기회가 저로 인해 사라지는 것입니다.”

“…….”

“제발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생각해 보면 란델리노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아무리 주군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소드마스터를 검술 스승으로 쓰는 것은 과했다.

검을 처음으로 든 아이에게 목검이 아니라 미스릴 명검을 쥐여 주는 꼴이었다.

소드마스터를 거부한 이유로 합당했다.

그런데 란델리노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주 쐐기를 박았다.

다른 기사들이 소드마스터에게 배움을 청할 기회를 빼앗기 싫다며 그들을 위하는 말을 했다.

적대적이던 기사들의 시선이 호의로 바뀌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억지로 로빈을 검술 스승으로 삼는다?

그 의도를 수상하게 여기게 된다.

혹은 주군인 자신이 기사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계산을 끝냈다.

그녀의 차가웠던 눈빛이 따스해졌다.

“내 아들이 이리도 생각이 깊었구나. 이 어미가 네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어.”

“과하신 칭찬입니다.”

“아니다. 칭찬할 것은 마땅히 칭찬해야지.”

본래라면 란델리노의 거부에도 로빈이 검술 스승이 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 아이가 과한 욕심으로 헛짓거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후계자는 따로 있었으니까.

아니, 후계자 후보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더 나은 인물이 나오면 언제라도 마음은 바뀔 수 있었다.

아직 후계자라도 확정하고 공표한 것이 아니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란델리노를 내려다봤다.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이었다.

루비로즈의 핏줄이 아닌 아이가 ‘자질’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루비로즈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있었다면 혹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조카가 영 아니다 싶으면 이 아이라도 후계자로 정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아주 당황스러워하는 인물이 있었다.

‘젠장! 이러면 아니 되는데!’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로빈의 표정이 굳었다.

내부에서 란델리노를 감시하고, 나중에 군사적 지지 세력이 생길 것을 막으려고 했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어린 나이부터 곁을 지키며 신뢰를 쌓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로빈은 얼른 감정을 갈무리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주군의 아드님이신 란델리노님을 맡는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그리 말하여도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로빈 단장님,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란델리노가 눈을 내리깔았다.

기사들을 위하는 자신의 마음이 부끄럽다는 듯이 혹은 그것이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듯이 말이다.

로빈이 주춤거렸다.

그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란델리노의 스승이 되는 것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척했다.

사실 머릿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으면서 말이다.

“제가 영식을 부담스럽게 해드렸습니다. 주군의 아들을 맡는다는 것이 그만큼 주군께서 저를 믿어주신다는 생각에 그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란델리노는 가증스러운 로빈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꿈속에서 믿었던 로빈의 배신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란델리노는 그것을 전혀 티내지 않았다.

이미 모두가 란델리노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자신만 반대한다면 그 저의를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물론 란델리노는 어머니가 자신의 검술 스승으로 로빈을 택한 이유를 알았다.

로빈이 자신의 검술 스승이 되려고 한 이유도 알았다.

‘꿈이 아니었다면 눈 뜨고 그대로 당했겠지. 후계자 경쟁에서 제대로 밀렸을 것이야. 꿈 덕분에 많은 일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어. 다행이야.’

페루제 공작부인도, 란델리노도, 로빈도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감췄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우아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아까의 매서움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물론이에요. 그렇지만 시간을 더 주실 수는 없을까요?”

“내가 요즘 바빠서 한동안 연무장에 오기 힘들 듯싶구나.”

란델리노는 어머니의 눈을 보고 알아챘다.

그녀는 자신에게 더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 자신의 검술 스승을 정하기를 원했으니까.

아직은 모르겠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모름지기 지배자란 그 제한된 시간 안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했다.

이런 일조차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영지, 왕국의 큰일을 결정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대답하기 어려웠다.

원하는 인물이 없었기에 대답하기 난처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던 때였다.

“주군, 이 시간에 어찌 이곳에 계시옵니까?”

어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란델리노는 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찾던 인물이었다.

“빅토르, 내가 나의 기사들을 보는 것에 이유가 필요하던가?”

“아닙니다. 단지 평소에는 미리 서신으로 날짜를 알려주셨기에 한 말이었습니다.”

그 사내는 빅토르였다.

그녀의 기사단 ‘다섯 뱀’의 부단장이었다.

또한 다섯 뱀 중 하나이자 비공식 기사단인 ‘검은 뱀’의 수장이었다.

‘검은 뱀’은 기사단인 동시에 세작과 정보 공작 등을 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곁을 지켰다.

어린 시절에는 벗과 노예로, 지금은 기사로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 사람이 필요했다.

“란델리노의 검술 스승을 찾아주려고 왔네.”

“그러셨군요.”

“그대는 왜 지금에야 여기에 온 것인가?”

“개인적인 볼일이 생겨나 잠시 나갔다가 왔습니다.”

“그렇군.”

빅토르에게 개인적인 볼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은 언제나 쉬는 날에 처리했다.

업무를 보는 날에 ‘개인적인 볼 일’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암호였다.

은밀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짧게 말했다.

더 길게 말할 일이 아니었음이다.

란델리노가 폴짝거리며 빅토르에게 다가갔다.

“이분이 좋을 것 같아요.”

“빅토르가?”

“네. 이유가 뭐니?”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인물을 지정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소드마스터를 거부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가장 널널한 것 같아서요.”

“응?”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아까는 전혀 아이 같지 않는 대답을 하더니 이번에는 아이같은 말을 꺼냈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기사님들 비해서 가장 일이 없으신 것 같아요. 가끔 창밖으로 훈련하는 기사들을 봤는데 자주 없으시더라고요.”

“그렇게 보였니?”

“네.”

“그렇게 보였구나…….”

빅토르는 ‘다섯 뱀’의 총괄적인 부단장인 동시에 ‘검은 뱀’의 단장이다.

자연스럽게 영지 밖으로 나갈 일이 많았다.

아이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느낄 만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순수한 대답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역시 아이는 아이구나’하며 웃었다.

그러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이것이 연기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자꾸 뭔가 이상하게 수상쩍었다.

아이의 출중한 연기에도 본능은 맹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부단장이시니까 실력은 있으실 것이고 시간이 제일 많으신 것 같아요. 이분이 제 검술 스승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훈련까지 볼 이유가 없었구나.”

“아니에요. 훈련을 봐서 좋았어요. 출중한 기사들의 실력을 보니까요. 그들이 더 강해질 시간을 제가 빼앗으면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빅토르도 로빈과 비견될 정도로 바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빅토르는 몸이 좋지 않아서 요양을 자주 가는 부단장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페루제 공작부인을 도운 공로로 ‘부단장’ 자리를 받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섯 뱀’ 기사단 안에서도 간부급이 아니면 ‘검은 뱀’의 실질적인 임무를 몰랐으니까.

‘검은 뱀’의 정보 업무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을 그리 핑계를 대는 것이다.

모두가 바로 승낙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소드마스터를 검술 스승으로 추천했는데 부단장을 해주지 않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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